늘마음 한 구석이 저려온다. 12세의 나이에 천하를 얻었지만 작은아버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단종을 생각하면. 영월 청령포에 서서 서강을 바라보며 단종의 를 읽어보면 강은 우리의 마음으로 흘러와 서늘한 물소리를 남기고 흘러간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
누구나 ‘그 곳’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때, 산다는 것에 사랑하는 것에 지쳐 녹초가 되어 버렸었을 때, 그 곳은 마음 한 구석을 허물고 등장한다. ‘이리와 내가 너를 부드럽게 안아 줄께!’ 그 목소리는 포르말린 가루처럼 미세하지만 결코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부른다. 그 곳은 시야가 툭 터진 산등성이, 강변 오솔길,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고향집 뒷마당, 종착지가 없는 밤 기차, 텅 빈 공원의 그네… 이처럼 형형색색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장소의 공통점은 그 사람
학창시절, 자신이 좋아하는 시 한편을 분석해서 발표하는 수업이 있었다. 미천골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총총히 빛나는 뭇 시들 중에서 단 한편을 고르기는 예상외로 간단했다. 그 무렵 우연히 읽었던 이상국 시인의 를 미련 없이 뽑은 것이다.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심상치 않은 첫 연이 내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당시는 미천골이 어디에 박혔고 어떻게 생겼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삼겹살 같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낮 동안 머물며 공부도 하고 텃밭도 가꾸고 낮잠도 자곤 하는 도시 근교 나의 오두막에도 어느덧 추색(秋色)이 무르익었다. 새들의 은거지이자 명상의 바다인 앞산 뒷산의 울긋불긋한 단풍 색조는 조석간에도 그 농도가 달라지고 있다. 뜨락으로는 종일토록 아카시아 작은 잎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토담 아래에, 샘물 가에, 은행나무 밑에 우거진 풀덤불들도 해쓱하고 까칠하게 사위여 불그레한 가을빛을 머금고 있다. 그 덧없는 조락의 풍경이 마음에 안쓰럽다. 계절의 순환, 시간의 수레바퀴에 휩쓸리어 미지의 생명 영역으로
'샛령’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이름만큼이나 소박한 길입니다.’ 여름의 끝무렵 평택에서 보내온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도통 얼굴을 알리 없지만 보낸 이의 ‘옛길’에 대한 대단한 관심이 짐짓 짐작되는 그 편지는 ‘유년시절을 보냈던 강원도 인제의 고갯길 하나를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용건을 먼저 밝히고 있었다. 30여 년 전 그향 고향인 용대리에서 뱀 잡고 약초 캐러 다녔다던 그는 ‘옛길’이란 타이틀에서 기억 속의 그 고개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가 말한 ‘샛령’은 그러니까 5만분의 1 지형도에 ‘대간령(大間嶺)’ 혹은 새이령이라
비가 내립니다. 산 첩첩한 정선 땅에 가는 비가 안개처럼 부옇게 흩날립니다. 가을을 배달하는 전령이지요. 이제 이 비가 그치면 가을은 한층 빠른 발걸음을 움직여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올 테지요. 그러면 당신은 살갗에 스미는 한기를 느끼며 긴팔옷을 꺼내 입을 테지요. 다소 움츠러든 어깨로 팔짱을 낀 채 창문가에 서서 “아아, 벌써 가을이야.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온 거야” 하며 문득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힐지도 모를 일입니다. 창문 밖 영롱한 코발트빛 하늘을, 그리고 그 하늘가 한 모롱이로 자유로운
산등성이 솔밭 속에서 한 여자를 만나는 것으로 전상국의 장편소설 「유정의 사랑」은 시작된다. 주인공은 ‘유정’과 ‘하리’, 그들은 제각각 금병산(657m)을 오르는 중이었다. 금병산은 1937년 30세의 나이에 폐병으로 요절한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을 품고 있는 산이다. 예사롭지 않은 배경을 통해 짐작하겠지만 이 작품은 소설가 김유정에 관한 소설이다. 김유정과 같은 해, 28세로 비명횡사한 모더니스트 ‘이상’이 쓴 「김유정- 소설로 쓴 김유정론」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얻은 것 같다. 작품의 구성은 액자구조를 띠고 있다. 액자
청양(靑陽)이란 이름을 음미하고 나면 절로 한낮의 땡볕아래 태양보다 더 붉게 번쩍이는 붉은 고추부터 떠오른다. 백로가 막 지난 이맘때, 청양으로 드는 충남 들판엔 벼가 누렇게 패여 가고 있다. 6.25 전쟁 때도 포탄소리조차 듣지 못했다는 깊은 산골 청양. 지금도 사정이 그닥 달라진 게 없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건 외지로 연결된 찻길이라곤 칠갑산 북쪽 허리에 난 한티고갯길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그 한티고개도 대치터널로 대치돼 옛길이 돼버리고 말았지만. 대티, 대치. 모두 한티의 다른 이름인데 청양사람들은 조선시대 역로가 지나갈 정
창밖으로 하나 둘 대밭이 눈에 띠는 걸 보니 담양에 들어온 줄 알겠다. 담양은 그 기후조건으로 인해 대대로 대나무가 풍성한 곳이다. 대나무는 오뉴월 쑥쑥 죽순이 나온 이후 20∼40일만에 다 자라버린다. 그 후 수년간 오직 단단해지기만 한다. 고대사회부터 인간들은 대나무의 속성을 간파했다. 대의 단단한 성질은 활과 창으로 변했고 텅빈 속은 피리와 대금으로 둔갑했다. 무기와 악기는 대나무를 통해 나타난 가장 극단적인 인간사회의 속성이다. 고대국가를 정립한 삼국은 끊임없는 전투를 벌였고 대밭들은 점점 쑥대밭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나
우기(雨期)가 지난 지 오래건만 며칠을 두고 내내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마이산(馬耳山) 둘레를 돌아보았던 어제 오후엔 가랑비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오늘의 일기도 야단스럽기 짝이 없다. 아침 한때엔 햇살이 쨍하니 내리쳤다. 그리곤 일순 검은 구름장이 하늘을 뒤덮는가 싶더니 느닷없는 장대비가 한바탕 흐벅진 춤을 추어댔다. 꽝꽝 지축을 흔드는 뇌성(雷聲)의 반주에 리듬을 맞추어. 하지만 지금 하늘은 다시 말간 얼굴로 돌아와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한여름 날씨의 양상은 가히 오두방정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지만 그런 대로 흥취를 자아내는 박
곧 비라도 쏟아질 기세였다. 게릴라성 폭우가 전국을 강타하고 지나갔지만 일기예보는 산발적인 기습 폭우를 경고하고 있었다. 완주와 진안군의 경계를 넘어서자 얼굴마담처럼 나타난 마이산은 먹구름을 잔뜩 이고 있다. 한번 대면하면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는 마이산의 기이한 형세는 점점 낮게 내려앉고 있는 구름 때문에 더욱 괴괴해 보였다. 진안읍에 무사히 당도하기도 전에 저 마이산으로 흡입되고야 말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진안과 무주로 이어지는 26번 국도는 한가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전라북도에서도 최오지의 대명사라 할 땅 무진장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두 달을 버티던 인조는 한강 동쪽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름하여 병자호란! 조선의 순박한 땅은 오랑캐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집권 서인과 소수 남인이 치열한 당쟁을 벌이던 때였다. 정치적으로 열세인 남인가문에 태어난 고산 윤선도는 집권 서인세력과 견줄만한 수장으로 자라났다. 1616년(광해군 8년) 성균관 유생시절, 집권 이이첨 일파의 부패를 격렬하게 비판했고 결과는 유배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의 생애는 20년 유배생활과 19년 은거
경상북도 울진(蔚珍)으로 가는 길은 참 멀다. 섬 지방을 제외할 때 서울에서 차편으로 닿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울진이다. 서울은 그만두고 대구에서 울진을 다녀올 경우에도 하루 온종일의 시간을 길바닥에 쏟아야만 한다. 강릉에서 삼척을 거쳐 울진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와 영주·봉화를 경유해 울진에 이르는 36번 국도가 뻗어있지만 높은 산들로 가로막힌 국토의 변방이라는 지리의 숙명 탓에 도통 접근이 수월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엔간히도 떠돌아다니길 즐기는 여행자라 할지라도 울진과 늘 교제를 하며 친숙하게 지
한계령. 그 이름을 되뇌일 때마다 늘 가슴 뭉클하고 압도당하는 이유는 왜일까. ‘한계령’이란 그 가수의 노래 때문인가. 아니면 고갯마루가 선사하는 설악산이 그려놓은 장엄한 풍경 때문인가. 둘 다일 터이다. 그 한계령 옛길이 지금도 남아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두어 해 전부터였다. 그러나 감히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험하디 험한 산골짜기를 타고 국도까지 뚫린 마당인데 옛길이 남아 있으랴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허나 장하고 놀랍게도 한계령 옛길은 건재했다. 44번 국도로 인해 허리가 수시로 잘려나갔지만 적어도 장수대에서 고갯마루에
동강(東江)의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다. 비스듬히 기운 채 물처럼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강은 고요하다. 동편 산정(山頂)으로 불쑥 해가 솟아오른 아까부터 동강은 수면에 휘감긴 푸른 안개의 잠옷을 벗어 던지느라 자못 부산스럽다. 이윽고, 말끔한 초록 강물이 천천히 풍경의 중앙으로 떠오른다.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 동강의 시발점이다. 아침 동강의 밝음과 맑음과 순수함을 무엇에 비유해 찬미할 수 있을 것인가. 투명하고 해사한 아침 강물을 바라보는 신성한 기쁨을 누리는 일을 미처 알지 못했더라면 사는 일은 얼마나 더 진부하고
오죽 청량산(淸凉山 870m)이 그리웠으면 퇴계는 자신의 별호를 ‘청량산인(淸凉山人)’으로 지었을까. 1555년 겨울, 50대 중반인 퇴계는 수십 년만에 청량산을 찾았다. 그 때 청량산에 큰 눈이 내렸다고 한다. 눈 쌓인 태초의 신비 속에서 퇴계는 한달 여를 머물렀다. 그리고 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서 ‘저 하늘에 꽂힌 재에 올라 우주를 두 눈으로 다 보고 싶다’고 했다. 산을 내려온 후, 퇴계는 자신의 호를 아예 ‘청량산인’으로 바꾸었다. 점점 늙어갈수록 청량산이 새록새록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마침 제자 금응협이 이란
현리에 들어서니 공기부터 달라졌다. 국내에서도 몇 남지 않은 청정구역으로 손꼽히는 곳. 방동리와 진동리를 거슬러 오르는 동안 개인산과 응복산∼단목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울창한 수림이 뿜어내는 신선한 물을 들이킨 방태천은 일대의 공기를 맑고 또 맑게 정화시켜 놓고 있다. 그 공기를 들이키며 연둣빛 이파리들은 시시각각으로 몸을 부풀리는 중이고. 진동리 가는 길은 안개에 휩싸여 있다. 마치 저 〈무진기행〉의 어느 구절처럼 ‘적군처럼 진주해오는’ 안개 더미였다. 그 안개를 뚫고 옛 현리 사람들이 넘던 양양장 길을 간다. 울퉁불퉁한 비포
내성천(乃城川) 푸른 물줄기 따라 기찻길이 뻗어있다. 그리고 작은 역이 하나 있다. 문득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오고 산모롱이로부터 시근벌떡 기차가 달려온다. 그러나 기차는 역을 그대로 통과해버린다. 이미 폐쇄된 역이기 때문이다. 예천군 보문면 간방리의 보문역. 강물가 정거장이다. 기차가 이 역에 정차하던 시절, 플랫폼에 발을 내린 승객들은 일변 백사장 화사한 내성천의 환대부터 받았을 거다. 하지만 역 풍경은 이제 을씨년스럽고 뒤숭숭하기만 하다. 명패도, 이정표도, 열차 시각표도, 대합실 장의자도 모두 뜯기고 부서지고 으스러진 채
생각해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천오백년 전, 이곳 부여까지 쫓겨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에 대하여. 그리고 나당(羅唐) 연합군에 밀려 낙화암(洛花巖)에서 떨어짐으로써 역사 속에서 지워져버린 망국(亡國)에 대하여. 늦은 밤 숙소를 나와 백마강변을 어슬렁거리다 부소산에 걸린 둥근 달을 바라보며 생각해 봅니다. 시인 신동엽은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고 했지만, 나와 백제는 저 달과의 거리처럼 멀게만 느껴집니다. 부여를 생각하면 늘 아스라한 여운이 남습니다. 꿈이 좌절된 사람의 뒷모습 같은 쓸쓸함 같은 것이요. 부소산 낙
여기, 머잖아 물 속에 잠길 서글픈 운명에 처한 강이 있다. 전남 장흥(長興)의 탐진강(耽津江). 이 강의 부음(訃音)은 이미 통기되었다. 댐을 축조하는 거창한 공사는 상당히 진척되었다. 그래 공사장 부근에서 바라다 보이는 강의 모습은 내장이 터진 채 나자빠진 푸른 고래의 형용을 상상케 한다. 사람의 도발과 공격 앞에서 자연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하기야 강이 무슨 입이 달렸다고 항변을 할 것이며, 무슨 귀신 곡할 재주가 있어서 저항을 할 것인가. 아무런 분노의 몸짓도 없이, 아무런 방어의 태세도 지어 보이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