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수의를 준비했어, 침낭으로...” “수의 침낭 따로” “후에 북망산천(北邙山川) 가려고, 오지에서 죽는 게 꿈이지.” 삶과 죽음이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듯이 말하는 김부래씨(59세)는 30년을 넘게 오지의 산을 누비며 살아왔다. 산은 그의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도 찾지 않은 원시의 숨결을 들이쉴 수 있는 곳에 있을 때 그는 진정 자유를 느낀다. 자신의 생(生)과 사(死)를 던져둔 오지산은 그에게 돌아가야 할 고향이고 숙명이었던 것이다. 성우에서 밴드 마스터를 거쳐 산으로 김부래씨는 강릉에서 8남매 중
박헌태(서울 종로구청, 45). 그는 이 땅의 평범한 공무원이다. 그러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처음 그는 산이 좋아 종주 산행을 하며 전국의 산을 밟아왔다. 그러던 중 조석필씨가 낸 「산경표를 위하여」를 보게 되었고, 이 땅의 산과 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졌다. “백두대간과 정맥의 산줄기가 일본에 의한 지리역사 왜곡으로 현실과 맞지 않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잊혀진 우리 지리역사를 체험하며 되새기고자 산줄기 종주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박헌태씨는 94년 5월 29일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토요일
77에베레스트 촬영대원이었던 원로 사진가 김운영씨(69세)가 당시의 등반사진을 비롯해 그간 촬영해온 히말라야의 꽃과 풍물을 모아 6월 23일부터 30일까지 서울 광화문의 ‘포토아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1933년 강화에서 태어난 김운영씨는 군 제대 후 서울 친척집에서 생활 할 때, 평소에 사진을 찍고싶다는 소망으로 당시 사정으로는 드물게 사진기를 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59년 세계일보(국민일보)에 사진부에 입사하면서 사진을 제대로 배우면서 마음껏 찍었다. 1970년 3월 김정섭씨를 대장으로 한 원정대
돈현(頓玄)스님. 모자를 눌러 쓰고 미소를 짓는 모습이 아직 때묻지 않은 소년을 닮았다. 자그마한 몸피를 하고서 스님은 우뚝 솟은 수직의 바위를 오른다. 잡을 것 없는 미세한 홀드에 몸을 의지한 채 모든 기력을 토해내 듯 손끝에 기를 모아 자신의 몸을 바위에 밀착시킨다. 여리게만 보이는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스님의 모습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하다.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요. 정신을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곤두선 바위를 붙들고 기어오르려 애를 쓰다보면 어느새 나를 잊게 됩니다. 그 때는 다
내려가기 위해서는 올라가야 한다. 많이 내려가기 위해서는 많이 올라가야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내려올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물론 가장 높은 곳일 것이다. 바로 에베레스트(8848m). 이 에베레스트를 내려오기 위해 오르려는 사람이 있다. 많은 산악인들이 오르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건 채 도전하는 에베레스트를 내려오기 위해서 도전하려는 사람이 있다. 프로 스노보더 김은광씨(33세)가 그 주인공. 김씨는 지난 4월과 5월 동안 박영석씨(38세·동국대 산악회)가 이끈 로체 원정대에 동행하여 3캠프 조금 못 미친 약 7천미터
인수봉을 등반하던 도중 한국철도산악연맹 회원인 고윤호씨(37세)가 정상을 코앞에 두고 보잘 것 없는 자잘한 숲으로 발길을 돌리다 한탄을 한다. “어어! 청솔모가 다 갉아먹었네” 뜬금없는 소리에 머리를 돌려 들여다보니 껍질이 샅샅이 벗겨져 하얗게 벌거숭이가 된 자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눈 속에 서 있었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던 지난겨울. 먹을 것을 못 찾은 청설모가 나무 껍질을 갉아먹은 모양이다. 주변에 심어놓은 지 5년이 지났다던 무릎만한 일곱 여덟 그루의 어린 주목들도 죽어 있었다. 안타까움에 숲을 샅샅이 헤치며 발길을 움
‘여성 등반가’라는 수식어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가능성이 충만한 이 세 사람은 한몸이 되어 엘캐피탄을 오를 예정이다.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게 된 것은 제일 막내인 채미선씨의 꼬드김 때문이다. 작년 가을 김점숙씨와 함께 엘캐피탄의 ‘조디악(A2)’을 등반했던 채미선씨는 당시 등반에서 몇 가지 아쉬움을 안고 돌아왔다. 인디안 써머데이(가을철에 열흘정도 지속되는 무더운 여름날씨)를 계산하지 못해 식수부족으로 꼬박 하루를 허비해야 했던 일과 한 코스 정도 더하고 싶었으나 시간부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일 등이 그것이다. 돌아
“평소 협회의 회원들이 부담 없이 만나 얘기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회원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서로 안부를 주고받고, 자연적인 것을 벗삼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동우회가 산악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김현주씨 또한 어엿한 여성기업가다. (주)사라인터내셔날의 대표이사로 있으면서, 현재 ‘백 패커(BACK PACKER)’라는 브랜드로 배낭을 직접 디자인하고 생산하여 대부분의 물량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르까프로 유명한 화승에 납품을 하고 있다. 사라인터내셔날에서 생산하는 배
차설광씨가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22살, 포항에서 해병대 하사관으로 근무하던 때다. 스킨 스쿠버장비를 사기 위해 들렀던 장비점에서 몇 번이나 허탕 치다, 벽면에 진열된 암벽장비에 매료되어 등반을 시작했다. 때마침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던 후배가 노조활동으로 인하여 입대, 같은 부대에 근무하게 됐다. 전문 산행을 해 온 후배와 자일파티를 이뤄, 내연산 관음암 등반을 시작으로 가지산 쌀바위, 부산 금정산의 부채바위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제대한 86년 이후에는 백두대간 위주의 워킹을 하던 중, 서울 김포공항에 취직하여 후배와 만나지만
김씨는 47개의 지도자 자격 종목 가운데 ‘산악’ 부문에서 처음으로 1급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이 되었다. 이 부문은 등반경기 즉, 스포츠클라이밍을 관장하게 된다. 스포츠클라이밍은 올해 전국체전에서도 시범종목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지자제 이후 각 구청마다 인공벽을 설치하는 예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 따라서 경기지도자나 생활체육지도자 등 전문 관리인의 필요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게 앞으로의 전망이다. . 1세대 클라이머로 97년에는 63빌딩을 오를 정도로 클라이밍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온 김태삼씨. 여행사를 운영하고
이런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친 여성 클라이머가 있다. 백인숙(56세)씨. 토왕폭을 올라 젊은이들의 낯을 붉히게 한 아줌마. 그녀가 산을 찾게 된 계기는 심한 위장병 치료와 열여섯에 사고로 세상을 등진 큰아들을 잊기 위함이었다. 그때가 6년 전 일이다. 그 이후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등산을 시작하였는데 산을 찾으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산에 오르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더군요.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지는 순간만큼은 힘든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산을 찾고 산에서 위로를 받았구요.” 그녀에게
산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지난 산행을 이야기할 벗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서운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백담산장에 어린이 등산학교를 개설했을 때, 김근원 선생도 동행했었다. 3·40명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산에도 가고 그 맑은 백담사 앞 계곡에서 수영도 하며 밤에는 캠프 파이어와 포크 댄스를 추던 일이 있었다. 하루는 비가 촉촉히 내리는데 김근원 선생이 좋은 사진을 찍으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진지한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좋은 산 사진을 찍으려고 비를 꼬박 맞으면서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고, 맘에 드는 대상을 고르느라 며
첫 연결된 전화선을 타고 ‘허클베리핀’이 건너왔다. 씩씩하게, 논두렁에서 개구리 한 마리 마악 건져 올린 아이처럼 거침없이. 하, 하, 하, 하, 터지는 웃음소리가 서른 세 살 주부로 정의되는 나른한 선입견에 엇박자를 냈다. 감색 재킷에 청바지, 짧게 자른 스포츠형의 노란 머리. 세계적인 암벽 경기 등반가 고미영은 생각보다 몸이 작았다. ‘세계적인’이란 말은, 유럽에서 종종 “고미영을 아세요?”라는 질문을 받는 한국 사람이 있다는 뜻. 그녀는 사진에서처럼 잘 웃었다. 웃을 때마다 하얗게 드러나는 이와 보기 좋은 잇몸. -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