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페이스와 함께하는 아웃도어 파라다이스_가래비빙벽장

글• 이재호 기자     사진• 정종원 부장     사진협찬• 레드페이스  

그날따라 태양이 가까워 보였던 건 기분 탓이었을까? 한겨울이라고 부르기엔 동장군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아침이었다. 전날부터 연일 이어진 포근한 날씨에 얼음이 녹진 않았을까, 괜한 걱정이 몰려왔다.

  모이기로 한 오전 8시의 건국대 앞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수많은 인파에서 어떻게 서로를 발견할까 고민하던 중, 눈에 띤 박지민씨(한국외대산악부)와 강준아씨(서울농대산악부)의 모습은 내 걱정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코트와 패딩의 홍수 속 얇은 재킷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자일과 바일을 두른 반신만한 배낭을 메고 출근시간의 2호선을 뚫고 왔을 그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전사의 모습을 한 그들과 얼음이 녹기 전에 돌아오자는 결의를 다지고 서둘러 가래비빙벽장으로 출발했다.

  가래비빙벽장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도락산 구 채석장 터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빙벽장으로, 서울 근교에 위치하여 주말 이용자가 많다. 형성되는 빙질은 고드름질이며 전국에서 가장 빨리 얼음이 언다. 상단에 형성되는 빙폭은 높이 25~30미터, 경사 85~90도로 사람들이 주로 등반하는 곳이다. 가래비빙벽장은 기존 빙벽등반처럼 확보물을 설치해가며 등반하지 않고, 옆 등산로로 올라가 줄을 내린 후 톱로핑 방식으로 등반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을 두고 오르기 때문에, 과도한 키킹과 스윙은 낙빙을 초래할 수 있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빙벽의 왼쪽 터에는 텐트를 치고 집중적으로 등반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으며,오른쪽으로는 도락산 줄기가 있어 가벼운 산행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빙벽장 앞 주차 공간이 협소하여, 늦장을 부린다면 먼 곳에 주차를 하고 많은 장비를 지고 빙벽장까지 걸어와야 할 수도 있다. 

겨울의 3요소 : 눈, 커피 그리고 빙벽등반

  양주로 달리는 차 안에서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강준아씨는 작년에 다녀온 동계 북알프스 원정을 물꼬로 눈과 친해지고 있는 중이며, 이번 겨울엔 매주 스키장으로 달려가 업힐과 다운힐을 반복한다고 했다. 박지민씨는 올해 7월, 타지키스탄에 위치한 이스모일소모니 피크(해발 7,495미터) 등반을 준비하며 매 주말마다 얼음을 오르고 눈밭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고 전했다. 누가 더 눈에 대한 사랑이 큰지에 대해 벌어졌던 건전한 설왕설래(雪往雪來)는 목적지에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금요일 오전임에도 꽤 많은 인원이 얼음에 붙어있었다. 해는 더 높이 떠오르고 있었고 우측 끝 얼음 아래로는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등반하는 내내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 꼴을 면하기는 어려워보였다. 둘은 서둘러 장비를 차고 톱로핑 줄을 건 후, 빌레이어가 확보할 스크루를 설치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신중하게 확보물을 설치하는 모습이 마치 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모든 등반준비를 마쳤다.

  먼저 강준아씨가 자신의 안전벨트에 줄을 묶고, 박지민씨는 반대쪽 줄을 제동 장비에 걸었다. 서로의 체결 상태를 확인한 후 강준아씨는 바일을 챙겨 길게 뻗은 빙벽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를 비장함이 흐르는 뒷모습이었다. 출발 신호와 함께 ‘톡톡’ 가벼운 소리를 내며 찍어대던 손과 발은 이내 경쾌한 일련의 리듬을 만들어내며 빙폭을 수놓기 시작했다. 빙벽등반은 오랜만이라던 소리가 무색할 만큼 등반은 군더더기 없었고, 30m 남짓의 높이를 순식간에 올라갔다. ‘완료’를 외치고 다시 바닥으로 내려오더니, 멋쩍은 미소에 겸손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개운하다! 오랜만에 붙으니 팔에 펌핑이 오긴 하네요.” 

서로 역할을 바꿔 다음은 박지민씨 차례였다. 앞선 파트너의 부드러운 등반에 잘해야겠다는 부담이 커진 건지, 어렵지 않은 루트라 판단하고 무덤덤해진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얼음 앞에서 고개를 들자 보이는 얼굴에는 전자의 감정이 써있는 것 같았다. 초반 완경사 구간에서는 아직 몸이 덜 풀렸는지 어색한 스윙을 이어가더니, 직벽에 붙는 순간부터는 제 페이스를 찾기 시작했다. 하늘의 구름이 가려질 만큼 연신 입김을 내뿜으며 정상까지 오른 박지민씨는 서둘러 완료를 외쳤다.

  “초반에 힘을 너무 많이 뺐어요! 마지막엔 바일이 자꾸 얼음에서 도망가더라고요.”

  예상했던 시간보다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이쯤에서 등반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자일을 회수하고 빙벽 장비를 벗는 것만 해도 꽤 시간이 걸렸다. 경직된 얼굴로 급하게 서두르던 둘에게 따듯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건넸다. 그제야 굳었던 얼굴이 풀어졌고, 급하게 하느라 버벅거리던 짐정리도 여유를 가지고 하니 더 수월하게 마무리되었다.

  둘은 이제 각자의 겨울을 즐기러 갈 시간이라고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강준아씨는 매주 하던 것처럼 용평스키장 눈 속에 파묻힐 예정이었고, 박지민씨는 가평 운악산으로 넘어가 계속해서 얼음을 즐길 계획이었다. 동계 산악에 대한 둘의 뜨거운 열정에 얼음이 더 녹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각자의 열정은 빙벽장에 조금 남겨둔 채, 짐과 설렘을 챙겨 그곳을 빠져나왔다. 얼음은 아침에 비해 많이 녹아있었고, 해는 이미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두 사람의 소감을 끝으로 이번 산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박지민씨의 소감이다. “종주산행을 테마로 한 촬영은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빙벽등반이 주제인 산지 촬영은 처음이었다. 그간 굳었던 몸을 풀기 위해 촬영 일주일 전 운악산 무지치 폭포에서 등반을 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있었지만 가래비빙벽장의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말에 자신감이 생겼다. 촬영 당일 건대입구역에서 사진 부장님께서 차로 픽업해 주셔서 편하게 빙벽장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평소 암벽등반보다 등반지까지 왔다 갔다 이동하는 일이 더욱 힘들었는데 이번 촬영은 시작부터 좋았다. 가래비 빙벽장의 첫인상도 포근하고 좋았다. AMG티타늄 관계자께서 빙벽장 부지를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다는 말에 또 한 번 산 사람들의 열정과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인공 빙벽장을 유지보수하려면 한 시즌에 전기세 약 500만원, 그리고 별도의 보수비 2,000만원이 들어간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장비를 착용했다.

  서울농대산악부 준아와 함께 파트너로 톱로핑 등반을 했다. 준아가 먼저 올라가고 나는 밑에서 빌레이를 봤다. N바디, X바디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준아 양이 멋있고 대단했다. 발 위치와 바일 타격 지점 등을 유심하게 지켜보며 루트 파인딩을 했다. 얼추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등반 차례가 되어 얼음 앞에 서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긴장한 탓인지 키킹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고, 다리가 불안하다보니 상체가 벽에 붙어 타격의 힘도 떨어지게 되었다. 중간 정도 오른 후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고, 그 이후로 정상까지는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 이번 촬영을 계기로 빙벽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더욱 커졌고, 동료들과 함께 등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즐거움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어서 강준아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작년 9월 북한산 인수봉에서 오랜만의 암벽등반을 사람과 산 촬영을 통해 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오랜만의 빙벽을 사람과 산 촬영을 통해 하게 되었다. 산을 즐기는 대학생 입장에서 빙벽은 암벽등반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비가 비싸고, 주변에 경험자도 부족하여 비교적 접하기 어려운 스포츠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빙벽은 배워볼만한 가치가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21/22 겨울에 대학산악연맹에서 주최하는 동계아카데미에서 빙벽등반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당시 한 선배님께서 하신 ‘홀드가 정해져있는 암벽등반에 비해 빙벽등반은 자신이 스스로 홀드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자유롭다.’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있다. 당시 암벽등반에서 가끔 작은 키로 인해 홀드가 닿지 않는 경험을 했던 나에게 빙벽등반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는 말이었다. 그 뒤로 빙벽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암벽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스포츠로 다가왔다.

  등반 당일, 8시에 건대입구를 출발하여 가래비빙벽장까지 도착하는데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작년 2월쯤 등반했던 매바위 이후로 1년만의 빙벽이었다. 오랜만이라 긴장도 하고 무서울까봐 걱정했는데 막상 등반을 시작하니 오로지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재작년, 작년에 배웠던 X바디, N바디로 올라가려고 노력했는데 생각처럼 몸이 유려하게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꼭대기까지 오를 정도는 되었다. 몸에 힘을 풀며 ‘언젠가 나도 빙벽 선등을 설 수 있는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하며 바닥까지 천천히 하강했다. 나중에 실력을 키워 꼭 토왕성 폭포를 완등하고 싶다는 다짐도 머릿속에 새겼다. 사정상 짧은 등반을 마치고 근처에서 간단히 배를 채운 후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오랜만에 얼음을 오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고, 산에 대한 마음이 더 커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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