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글•사진   김기현(서울대 문리대산악회 OB) 

둘째날 아침 충분히 숙면을 취하고 8시쯤 일어났다. 전날 산행으로 다리는 조금 아팠지만 컨디션은 괜찮았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창밖에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전 날 전호나물을 많이 먹어 그런지 화장실도 잘 다녀오고 9시쯤 아침식사로 소머리국밥을 먹었다. 식사 물가는 비싼 편이었지만 대체로 맛있었다.

  이번에는 나리분지에서 출발했는데 들머리에 도착해 보니 산 위로 쌓인 눈들이 제법 보여 신이 났다. 큰 기대 없이 갔으나 이번 시즌 스키를 열심히 타서 그런가 하늘이 나에게 행운을 주었나 싶었다. 초입 부분에서 잠깐 길을 헤매다 다시 찾았는데 경사가 꽤 가팔랐다. 최희돈 선배가 스키 크램폰을 차라고 하셨지만 데날리도 다녀왔는데 이걸 못 올라가겠어 하는 오만과 자만으로 낑낑대며 힘쓰면서 올라가 봤다. 어떻게 올라가긴 했지만 체력 소모가 심했고. 나중에는 결국 크램폰을 차게 되었기에 진작 찰 걸 하고 후회했다. 어차피 챙겨간 장비로 잠깐이면 보다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는데 괜한 위험부담을 감수한 셈이다. 사실 이전에 스키 크램폰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등반 크램폰처럼 설치가 귀찮거나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사용해 보니 설치는 너무나도 간단했고 불편함도 전혀 없었다.

이번 코스는 스키로 업힐 할 수 있는 구간이 길지 않았는데, 다운힐에 초점을 맞추어 최대한 빠르게 능선으로 붙을 수 있는 길로 가다 보니 계속 경사가 센 곳으로 가는구나 싶었다. 나중에 보니 성인봉은 어디서 오르더라도 경사가 센 거 같았다. 하긴 성인봉의 높이가 바다에서부터 986.5m라고 하니 가파를 수밖에. 2시간가량 걸어 능선 부근에 도착하니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원래부터 쌓여 있던 것도 있었지만 아침에 내린 것이 한쪽으로 몰려서 더 많아 보였다. 마치 영동 지방과 영서 지방 날씨가 다른 것처럼 능선 반대쪽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실제로 울릉도에서 한 쪽은 비가 오는데 반대쪽은 맑은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신설에 더욱 신난 세 사람은 능선에서부터 즐겁게 스키 투어링을 진행했다.

오후부터는 조금씩 개이는 하늘에 멋진 풍광을 눈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 행복했다. 그저 눈만 봐도 행복한 필자였지만 울릉도의 설경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해외 히말라야나 알래스카의 멋있는 풍경들도 많이 봤지만 피를 못 속여서 그런지, 익숙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한국 산의 정취가 더 좋았다. 지금도 후배들한테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은 설악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파란 하늘과 구름, 눈꽃이 핀 나무는 너무나 조화로웠고 투어링 내내 탄성과 웃음이 나왔다. 말잔등(967.8m)에서 한참을 머무르며 사진도 찍고 시간을 보냈다. 성인봉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미륵산-송곳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절경이었다. 많이 쌓인 곳의 적설량은 1m가 넘는 곳도 있었는데 마치 어느 히말라야의 정상에 다다른 듯 설정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조성일 선배는 눈처마가 너무 아름답다며 꼭 사진으로 담고 싶어 하셨다.

  이날 다운힐 코스는 처음에 들머리로 드는 차 안에서 봤을 때 최희돈선배가 괜찮다고 판단했던 곳인데 막상 붙어보니 적설이 조금 부족했다. 그리고 좁은 협곡 형태로 좌우로 경사가 진 곳이 많아 웬만한 실력으로는 턴을 하기 쉽지 않았다. 자연설에서 자유자재로 숏 턴과 밴딩 턴 등을 구사할 수 있어야 원만한 턴을 그릴 수 있을 거 같았다. 선배들은 한두 턴씩 그리며 내려갔지만 나는 거의 사이드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내려와 거의 다 왔을 무렵 끌루와르 지형에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스키를 벗고도 조심히 내려가야 할 지형이었다. 최희돈 선배는 배낭에서 6mm정도 굵기의 비상용 로프를 꺼내셨고 짐을 먼저 내린 뒤 몸으로 확보하며 조심스레 내려갔다. 내가 먼저 내려가고 밑에서 다른 배낭을 받으려고 하는 찰나 최희돈선배가 미끄러지며 나를 넘어서 추락하고 말았다. 몸이 거꾸로 뒤집어져 우리 모두 놀라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약간의 타박상 말고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셨다. 1차적으로 배낭이 쿠션 작용을 했고 로프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원정을 다니면서 안자일렌을 여러 번 해봤지만 실제로 동료가 미끄러진 것은 처음이었다. 별일 없었으니 좋은 공부와 경험이 된 셈이지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늘 사고는 일어날 수 있는 경각심을 일깨우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스키 투어링을 나가게 된다면 항상 로프나 비상용 장비들을 챙겨 다녀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뼈저리게 느꼈다.

무사히 하산 후 주차를 해놓은 곳 근처 최희돈 선배의 단골집인 ‘늘푸른 산장’에서 해물 산채전과 막걸리로 요기를 했다. 산나물로 상큼하게 담은 간장과 함께 정말 꿀맛이었다. 서울에서 좋은 직장에 다니다 울릉도의 매력에 반해 들어와서 살고 계신다는 주인 내외분의 친절함도 한몫했다. 다음날 들릴 때는 선물로 고로쇠 수액을 1페트씩 주시기도 하며 또 놀러 오라고 하셨다. 숙소이자 최희돈선배의 집인 천부 아파트 쪽으로 다시 내려가서 저녁식사는 뚝배기 불백으로 또 맛있게 먹었다. 하늘이 박명으로 예쁘게 보일 때쯤 식당에 도착했는데, 마침 그날이 금성과 목성이 대접근한다는 날이어서 별 보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사진들이 막 올라오고 있었다. 나도 송곳봉 오른쪽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금성과 목성을 확인하고 방파제에 올라가 셔터를 연거푸 눌러댔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오늘 밤은 은하수를 찍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으로 일찍 들어가서 나는 미리 촬영 준비를 단단히 해놓고 먼저 자겠다고 했다. 봄에는 은하수가 뜨는 시간이 새벽 시간인데 달이 서쪽으로 지고 나서 달빛이 없을 때 촬영해야 잘 나오기 때문에 그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한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울릉도에 들어오기 전 철저한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촬영 계획을 세워서 왔다. 3시에 일어나야 동이 터오는 6시까지 촬영을 시도할 수 있었다. 선배들도 깨워달라고 하셨지만 너무 곤히 잠들어 계셨기에 조용히 장비를 챙겨서 나왔다.

  생각했던 포인트로 열심히 달려가다 보니 ‘딴섬’ 옆으로 달이 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고 사진에 꼭 담고 가고 싶어졌다. 시간은 부족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후 한참을 더 가서 생각했던 포인트에 가보니 가로등이 너무 많아 적합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져서 계속 더 가보았지만 성에 차는 곳은 없었고, 약간의 타협으로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거리가 먼 곳을 찾아 재빨리 카메라를 설치했다. DSLR 두 대를 설치해 타임랩스 방식으로 해가 뜰 때까지 ‘죽도’ 위로 은하수가 떠오르는 장면을 담았다. 처음에 입도해서 가는 길에 들었던 이야기 중 죽도에 한 가구만 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게 들렸었고 섬의 모양도 꽤나 멋지게 생겼었기에 배경으로 좋다고 느껴졌다. 세팅을 다 해놓고 요즘 나온 휴대폰으로도 은하수가 잘 담길까 테스트 삼아 한번 찍어 봤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나와서 기기의 발전 속도를 크게 체감할 수 있었다. 전문적인 사진들도 장비의 도움으로 조금 더 쉽게 촬영할 수 있는 날이 금방 오게 될 거 같았다. 그러면 작가로서의 경쟁력이 떨어지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럴수록 보통 사람들이 가기 힘든 곳에서 촬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별과 산을 주로 촬영하는 사람으로서 작가의 감각과 장비를 다루는 기술적인 것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촬영지까지 가는 게 90% 이상이라고 본다. 그 시간에 깨서 무거운 장비를 챙기고 거가까지 가는 거만 해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한 장 건졌다. 일출과 함께 방에 들어가 조금 더 눈을 붙인다.

셋째 날, 보통 산행을 하면 거의 늦어도 6~7시는 일어나 준비를 하기 마련인데 울릉도에서는 여유를 마음껏 부렸던 것 같다. 9시쯤 일어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나리분지로 갔다. 11시쯤 출발 하늘이 가장 맑은 날이었다. 매번 다른 길로 가니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나리분지에서 성인봉을 바라보고 우측으로 접근했는데 등산로를 따라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가팔랐다. 그리고 중간 정도 올라가서 기온이 좀 떨어진 곳에서는 스킨이 뒤로 쭉쭉 미끄러졌는데 오래전 와서 녹았다 얼은 크러스트 눈 위에 어제 온 신설 층이 쌓여 위에 있는 층이 미끄러지는 것이었다. 눈사태 관련 교육을 받으면서 들었던 내용들이 생각났다. 허벅지에 아무리 힘을 줘봐도 소용없었고 재빨리 스키 크램폰을 착용했다. 위에 얇은 눈층 아래로 크램폰을 힘을 주어 누르면서 올라가니 제동이 잡혔다.

 

  3시간가량 거친 숨을 내쉬며 성인봉에 올랐고, 첫날에는 흐려서 볼 수 없었던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혹시나 정말 맑으면 독도가 보일까 싶어서 무겁게 400mm 망원렌즈를 챙겨왔지만 수평선 쪽에 깔린 옅은 구름 때문인지 독도는 찾을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카메라를 집어넣고 다시 스키 다운힐에 집중해 본다. 3일차면 이제 적응하고 겁이 좀 없어질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긴장했다. 아마 처음 가보는 길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내가 속도를 제어할 만한 구간이 어디쯤 나올지 전혀 예측이 안되니 될 것도 안된다. 처음 가는 곳의 투어링은 사전 답사나 그쪽의 지형을 잘 아는 가이드와 꼭 함께 가야 안전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다운힐이니만큼 그래도 용기 내어 몇 턴을 더 시도해 본다. 그렇다고 그렇게 아쉽지만도 않았다. 내가 그동한 준비했던 노력과 준비가 딱 이 정도 수준이었던 것이다. 다음에 더 준비해서 온다면 더 즐겁게 즐길 수 있겠지. 아쉬움이 남아야 또 오고 싶으니까라고 작은 위안을 했다. 조성일 선배는 그동안의 구력을 보여주듯 신나게 환호를 외치며 다운을 즐기셨다. 가볍게 점프를 하며 턴하는 모습이 너무 멋졌다. 나는 과연 몇 년 뒤에나 저렇게 탈 수 있을까 싶었지만 별명이 거북이니만큼 천천히 한 걸음씩 경험치를 쌓다 보면 언젠가 잘 되는 날이 오겠지.

  무사히 하산을 마치고 마지막 날은 횟집에서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횡계 출신의 스키어이신 이성재 선배도 자리에 합석했는데 인상도 너무 좋으시고 정이 넘치는 분이셔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나는 고향이 대구라 어릴 적 회를 많이 못 먹어봐서 그런지 엄청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날의 회는 정말 맛있었다. 생선들보다 한치회가 가장 맛있었는데 최희돈 선배가 말하길 오징어회는 보리밥 한치회는 쌀밥에 비유된다고 했다. 달짝지근하니 녹아들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를 떠나서 아이처럼 순수하게 산을 좋아하고 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서 무얼 먹어도 더 맛있는 식사 자리가 되었던 거 같다.

마지막 출도하는 날도 12:30배라 여유 있게 푹 잠을 자고 별미인 따개비 칼국수로 아침식사를 한 뒤 겨울에 또 여름에도 다이빙하러 한 번 놀러 오리라 약속하고 울릉도와 아쉽게 안녕했다. 나오는 길에 부모님과 나눠먹을 반건조 오징어를 기념품으로 조금 사고, 전날 식사를 같이 했던 이성재 선배님이 선물로 내가 너무 맛있게 먹었던 전호나물 한 박스를 주셨다. 감동이었다. 크루즈를 타고 나오면서 멀어져 가는 울릉도를 한참 바라보았고, 포항에 다 와갈 때쯤에는 망망대해 위에 석양이 아름답게 물들어 또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포항에 내려 아구찜 맛집에서 마지막 식도락을 즐기고 3시간가량 차를 달려 횡계에 잘 도착함으로써 3박 5일 울릉도 스키투어 여행이 무사히 끝났다.

  돌아와서 글을 적으며 생각해 보면 울릉도는 무조건 강추다. 실제로 해저에서부터 3,000m 이상의 산이라고 하는 울릉도는 섬이라는 느낌보다 산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규모에 충분히 멋진 자연들을 담고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목적은 산악스키였지만 자연설을 한 번 맛본 정도로 충분했고, 두 번째는 가보고 싶었던 울릉도를 가보게 된 것, 세 번째는 은하수를 잘 촬영하고 왔다는 것 등, 이룬 것이 충분히 많은 만족할 만한 여행이었다.

  산악스키 대상지로서의 울릉도는 듣던 대로 만만치는 않았다. 울릉도에서 자유롭게 스키를 탈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면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정말 그렇겠구나 싶었다. 어려운 구간이 많기는 하지만 길을 잘 아는 사람과 루트를 잘 정해서 가면 자연설에서의 산악스키를 맛보기에는 또 괜찮을 수 있다고도 생각되었지만 많은 준비를 하고 가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없을 수도 있다.

  산악스키도 좋기는 했지만 늘 원정을 꿈꾸는 사람 중 한 명으로 겨울에 설상 훈련을 여기서 하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악부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한라산에 훈련장을 허가해 줘서 장구목에서 야영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후로는 계속된 통제와 적설량의 부족으로 국내에서 훈련하기 좋은 장소를 찾기가 많이 어려웠다. 겨우 스키장이 폐장하면 허락을 맡고 남은 눈으로 훈련을 하곤 했는데, 울릉도는 정말로 설국이었다. 이제는 크루즈로 인해 일정상의 차질도 거의 없어서 훈련 계획을 짜기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 해는 산악부 후배들을 데리고 설상 교육을 하러 들어올 생각이다. 설동도 파고 러셀도 하고 눈맛을 실컷 보여줄 수 있는 울릉도로 다시 꼭 와야겠다.

day 2

8.22km 6시간 45분 1도

- 10:00 출발

- 14:15 말잔등

- 16:30 하산

-----------------------------------------------------

day 3

9.37km 5시간 23분 8도

- 03:00 기상

- 05:00 은하수 촬영

- 11:00 출발

- 14:00 성인봉

- 15:30 하산

---------------------------------------------------------

day 4

- 12:30 출도

- 18:30 포항

- 23:00 횡계 도착

-----------------------------------------------------------

저작권자 © 사람과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