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덕용의 티롤 알프스

글•사진 임덕용 EU주재기자 

1970년부터 1986년까지 16년에 걸쳐 히말라야 14좌를 초등 한 살아있는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 Reinhold Messner는 천혜의 산악지대인 이탈리아 북부 남 티롤 주 푸네스 골짜기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그의 놀이터는 티롤 알프스 오들러였다. 10세의 메스너는 오들러에서 암벽 등반을 시작했고 오들러는 그의 모산이었다.

히말라야에 심취하기 전까지 그가 오른 알프스 등반은 약 2,000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히말라야 고봉 등반에서, 대규모 원정대 고소 적응과 종래의 극지법 등반 방식을 벗어나 소수의 대원들로 구성된 알파인 스타일 Alpine style등반을 실현했다. 특히 등정이 쉬운 고전 루트를 피해 어려운 루트를 선택하고 셀파 도움 없이 무산소 등반을 했으며 단독, 또는 극소수 인원만으로 등반을 성공했다.
당시 쿠쿠츠카(히말라야 14좌 2번째 등정 자)와의 14좌 초등 레이스는 세계 산악인들의 드라마틱한 게임이었다. 물론 메스너의 지나친 독주에 시기와 질투를 보내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기념비적인 등반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그 단적인 예가 그 당시 세계 산악 계의 숙원 이었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이다. 이 등반의 성공은 과학계와 의학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1970년 낭가파르밧 등정 후 1982년 가셔브룸2봉 등정에 이르기까지 8개봉 등정에 성공한 후 자기 능력의 한계를 확인해보려는 의도에서 14개 고봉 완등 목표를 발표했다. 그리고 4년 뒤인 1986년 그의 마지막 목표인 마칼루(8,463m)와 로체(8,516m)를 무산소 등정하면서 인류 최초의 8,000m급 14개 고봉 완 등이란 대 위업을 이룩했다. 그는 18회나 8,000m급 정상에 올라서서 '세기의 철인'이란 이란 명성을 얻었다. 세계 최초 16좌 초 등정자인 국내 등반가를 ‘세기의’ 뭐라고 부를까 궁금해졌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산행철학을 뛰어난 저술로 승화시켜 산악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저서로 [죽음의 지대], [벌거벗은 산], [검은 고독, 흰 고독], [산은 내게 말한다], [자유로운 영혼], [도전] 등 20여종의 저서가 있다. 1970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밧 등정에서 귀환해 동상에 걸린 발가락 7개를 절단했다. 그 원정은 그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다. 하산 도중 동생 귄터 메스너가 죽은 것이다. 당시 사고는 수 많은 논란이 되었다. 심지어 동생을 죽이면서까지 정상에 올랐고, 동생을 혼자 두고 살아 내려왔다는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50년이 지나서 동생의 등산화가 하나씩 모두 발견 되면서 그들이 정상을 오른 후 횡단을 하다가 동생이 추락사 했다는 게 사실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메스너 두 형제가 태어나고 등반을 시작한 발 푸네스 계곡에 있는 오들러는 메스너 형제의 영광스럽고 비극적인 등반과 수 많은 신비한 삶을 말없이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

겨우 37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

산타 막델레나(Santa Maddalena) 해발1,339m에 위치한 마을이다. 계곡의 상징 중 하나인 산타 막델레나 성당을 뒤로한 오들러 암군은 남 티롤과 돌로미티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유명한 사진 포인트로 수 많은 사진작가뿐만아니라 최근에는 중국 등 아시아 신혼 신부의 웨딩 촬영 장소로 유명해져 추운 겨울에도 많은 이들이 사진 출사를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까운 거리에 말가 디 자네스(Malga di Zannes)가 있으며 여러 등반 출발점이 된다. "산을 만지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산을 가고 싶다면 바로 여기이다.” 남 티롤과 돌로미티에서 가장 잘 숨겨져 있고 관광객이 적은 계곡 중 하나로 꼽힌다. 제네스 대형 주차장에서부터 수 많은 트레킹 루트는 물론 겨울철에는 크로스 컨트리 스키, 설피 트레킹과 산악 스키 투어를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과 산 군에 그 흔한 스키장 하나 없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자랑이다. 산을 보호하는 자세와 마음으로 마을의 발전과 경제적 이익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을 자기 발로 걸어 올라갈 사람만 오라는 자신감이 이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이다.

2월의 티롤 알프스는 가장 눈이 많은 계절이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유럽의 많은 스키장들의 온도가 영상 15-25도를 연일 기록하자 문을 닫았지만 티롤 알프스에는 예년의 겨울과 같이 풍부한 적설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기존 슬로프에서 매일 스키를 타는 것도 지겨워질 즈음 친구들과 오랜만에 설피와 산악 스키 등반을 했다.

 

볼자노 대학 경제학 교수인 드미트리와 그의 아내 루이다밀라, 그리고 내가 스네이크를 전개할 때 누이 동생과 같이 클라이밍 포토 모델은 한적이 있는 친구 로란드가 동행했다. 로란드는 메르체데스 벤츠 회사에서 수석 기술자로 일을 하고 있어 내 차 2대를 10년 이상 손봐주고 있는 내 자동차 주치의이고 푸네스 계곡에 살고 있어 수시로 적설량과 눈 상태에 대해 정보를 주고 있었다.

산악 스키 경험이 없는 라우다밀라는 설피를 신었고 우리 3명은 스키 씰을 부착하고 간만에 막노동 한다며 즐겁게 올라 쳤다. 출발 전 장비 점검을 하며 눈 사태 시 긴급 구조를 위해 각 대원들이 몸에 휴대를 해야 하는 빕스 작동이 잘 되는지도 각자 체크했다. 예전에는 빕스 장비가 고가라 많은 사람들이 착용을 안 하고 산행을 했지만 몇 년 전부터 의무화 되었고 산악 경찰이나 산림 경찰에게 걸리면 엄청난 벌금을 내야 한다. 눈 사태로 수 많은 산악인들이 조난사했고 그들을 구하기 위한 수 많은 구조대원들도 사고를 당하는 일이 많았었다.

이 장비가 있으면 같이 등반하던 동료나 주변 산악들이 힘을 합쳐 센서로 눈에 깔린 조난자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조난자를 찾는 손다 (텐트 폴 같이 길이에 연결해서 눈을 찔러 조난자를 찾는 장비)와 눈삽은 빕스와 같이 3형제 장비이며 이제는 필수 휴대품으로 이 세가지 중 하나만 없어도 벌금 감이다.

약 30분은 자동차 한대 지나갈 만한 넓은 길로 오르다가 운치 있는 등반을 위해 스키 두 발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좁은 눈 덮인 숲 속으로 들어가 지그재그로 올랐다. 몸에 땀이 날 즈음에 시야가 트이며 메쓰너 형제의 놀이터이며 훈련장이던 오들러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햇살이 들기 전이라 오들러가 음산하게 보이며, 그 웅장함에 등반하며 힘들어 했던 메쓰너 형재의 신음소리와 숨결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 형제들이 오들러 암군에 개척한 수 많은 루트는 지금도 여름철에만 등반되는 음침한 북벽이 대부분이고 당시 6급이 최고 난이도였지만 그들이 개척 한 루트는 5급이라 해도 지금도 오르기 힘들다. 햇빛이 안 들고 습기가 많아서 이끼가 많이 끼어 있고 확보 점에도 녹슨 하켄이나 종종 우드팩도 발견되며 등반 중 고정 되어있는 확보물이 거의 없어서 많은 확보 장비를 직접 설치해야 한다.

우리 보다 먼저 출발한 티롤 아가씨들이 정상에 먼저올라 신설에서 요들송을 부르며 신나게 내려간다. 멋진 색상의 다양한 옷을 입고 각자의 실력을 자랑하며 보라는 듯 요염하게 내려가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나에게 암벽 등반과 스키를 배우고 있는 리우다밀라가 자기에게는 언제 산 스키를 가르쳐 주냐며 눈을 홀긴다.  빨간 머리 그녀의 볼이 홍건하게 달아 오를즈음 우리는 정상 바로 아래 꼴이 보이는 지점에서 간단한 휴식을 했다.

라우다밀라는 더 이상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아래 작은 산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같이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스키로 번개처럼 내려 오지만 설피를 신은 그녀는 오른 시간만큼 걸어서 내려와야 했다. 드미트리와 그녀가 간단한 입 맞춤을 하고 팀을 2개로 나눴다. 그녀의 빨간 머리가 찰랑거리며 하산하는 것을 본 우리는 속도를 내어 숨통이 터질 듯 힘차게 올라가 정상에서 안개 낀 파노라마를 즐기며 스키 씰을 때어내고 신발을 하강 모드로 장착했다.

경주 말들이 경기 바로 전에 흥분해서 코를 벌렁거리며 앞 발을 동동거리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신설을 가르고 내려갈 준비를 했다. 촬영을 위해 내가 먼저 짧은 8자를 그리며 내려갔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멋진 활강을 하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터졌다. 광각 렌즈이니 더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가라고 소리를 몇 번이고 질렀지만 파우다 눈이 잘리는 소리와 내 옆으로 휘날리는 설 연 가루가 렌즈를 덮었다.

메쓰너가 낭가파르밧 정상에서 안 보이는 동생 귄터에게 수 많이 소리를 지르며 동생을 찾았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처절하게 울렸고 올라온 벽을 횡단하며 노르말 루트로 하산을 시작했다. 어쩌면 동생이 먼저 내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안개를 뚫고 동생의 발자국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도 지쳐갔고 급기야 환청이 들리고 눈에는 설인이 보일 정도가 되어갔다. 몇 번이고 눈 밭에 쓰러지며 기어 내려갈 정도까지 되는 기분을 나도 이미 81년 카라코람 히말라야에서 경험했었다. 동상에 걸린 두 발과 손가락이 가려워 걸을 수가 없어서 기어서 내려왔던 세락과 크래버스 지대에서 맛 본 죽음의 그림자.

루이다밀라가 기다리고 있는 아주 작은 산장에서 맛있는 티롤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친구들과 여려 산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 머리 속은 온통 메쓰너와 귄터의 대화와 그들과 같이 등반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 형제들이 이 작은 산장에서 식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그들을 만나기 위해 산장 구석을 살피니 메쓰너 형제의 어릴 적 사진을 만날 수 있었다.

장발의 머리를 반다나 수건으로 묶은 메쓰너와 짧은 머리의 귄터가 닉커복을 입고 쉐터 가슴을 묶은 로프로 만든 벨트와 60년대 내가 사용했던 같은 장비들이 녹슨 사진 속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오들러에서 만난 메쓰너 형제의 무용담이 아닌 무속담이 남는 등반이었다.

 

저작권자 © 사람과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