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데카브리스트와 투르게네프의 '잔인한 착각'

 

글 사진 · 김규만(굿모닝한의원 원장)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바렌츠 해협과 피오르를 달리는 자전거 순례자.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바렌츠 해협과 피오르를 달리는 자전거 순례자.

 

파리에 간 데카브리스트의 성장통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철수하자 그동안 얻어맞고 당하기만 해서 독이 오른 연합군(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박살냈다. 1814년 4월 파리까지 진격해 나폴레옹을 폐위시키고 엘바섬으로 유배를 보낸 러시아 청년 장교들은 조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다. 진주군으로 반년가량 파리에 주둔하며 수준 높은 삶과 문화, 학문과 예술 등은 물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파리의 모습은 낯설지만 충격적이었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공화정을 실시한 프랑스에는 자유·평등·박애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1815년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권토중래하여 다시 황제가 되어 군대를 모았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기동력으로 연합군의 작은 부대들이 뭉치기 전에 격파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3만 병사로 하여금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는 데 고지식한 그루쉬 장군을 보낸 것은 패착이었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 워털루 전투가 시작된 것을 알고 여러 참모들이 당장 발길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을 묵살하고 프로이센군만 추격해 그 위중한 순간 허탕만 쳤다.

“운명의 실은 매우 중대한 순간에 극히 하찮은 자의 손에 떨어졌다”는 츠바이크의 말처럼 하찮은 그루쉬는 손에 떨어진 운명을 잡지 못했다. 그의 고지식한 행동은 워털루 전투를 패하게 한 주역이었다. 멀고 먼 대서양의 고도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를 가면서 나폴레옹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이렇듯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상대적으로 미개한 러시아의 정치 현실을 인식하며 그들의 고민은 시작됐다. 러시아 청년장교들의 성장통이었다.

 

러시아 최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규모 영지에서 나오는 경제력으로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던 그들은 ‘러시아의 귀족은 과연 귀족다운가’ 또는 ‘조국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주제로 고민했다. 명예와 신분, 돈, 젊음까지 부러울 게 없던 그들은 지배층이 먼저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는 하향식 개혁을 주장하고 실천했다. 러시아 최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짜르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전제군주제와 인구 6천만 명 중 농노가 5천만 명인 매우 비정상적인 농노제를 고집한다면 러시아의 짜르도 프랑스의 왕과 왕비처럼 단두대에 목이 잘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입헌군주제는 짜르를 인정하되 죽이든 살리든 모든 통치행위를 법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약 1천만 명의 귀족과 지주들이 약 5천만 명의 농노를 닦달하고 착취하였지만, 농업생산량은 영국의 절반 이하로서 어떤 희망도 없었다. 농노가 해방되어 자작농이 되고 최신 농업기술을 도입하면 농업생산량이 2배 이상 증가할 수 있었다. 먹거리가 늘면 인구가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나면 세금을 많이 걷고 징병을 늘릴 수 있어 부국강병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청년 장교들은 귀국 후 알렉산드르 1세를 알현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건의했다. 농민공작으로 톨스토이의 외가 친척이며 『전쟁과 평화』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세르게이 볼콘스키 공작은 알렉산드르 1세에게 “명예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많은 귀족들은 전쟁에서 수시로 도망친 반면, 농노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라면서 “귀족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은 맹렬하게 반대했다.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통해서 개혁도 가능하다는 역논리가 오히려 짜르에게 먹혀 들어갔다.

짜르를 설득해서는 개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데카브리스트들은 구제동맹(Union of Salvation)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해 나갔다. 조직마다 주장이 달랐지만 크게 ‘입헌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여러 경로를 통해 짜르에게 알려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1826년 봄에 ‘남부결사’와 ‘북부결사’의 청년 장교들은 거국적 봉기에 나설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변경됐다. 

 

데카브리스트 혁명(바실리 표도로비치 팀 作)
데카브리스트 혁명(바실리 표도로비치 팀 作)

 

12월의 주인공, 데카브리스트

알렉산드르 1세가 1825년 흑해 연안 요양지 타간로크에서 사망한 것이다. 후계를 둘러싼 논쟁으로 3주간의 공백이 있어 자의 반 타의 반 거사를 앞당겨야 했다. 바로 아래 동생인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이 제위를 물려받을 순서라고 생각했으나 폴란드 귀족 요한나와 결혼한 콘스탄틴은 알렉산드르 1세가 비밀리에 제정한€귀천상혼(貴賤相婚)에 걸려 계승권이 없었다.

콘스탄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와서 자초지종 교통정리를 해 니콜라이 1세가 제위를 계승하는 동안 약 3주간의 공백이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데카브리스트들은 그 3주간 조직을 점검하고 나폴레옹 전쟁과 조국전쟁 등에 수차례 참전해 본인들과 친한 콘스탄틴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황제가 될 생각도 자격도 없었으며, 거사 계획이 새어나가는 등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인 1825년 12월 14일 동트기 직전 북부결사의 베스투제프 형제는 니콜라이가 콘스탄틴의 권력을 찬탈했다고 선동하며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로원 광장으로 나왔다. 무엇보다 혁명군을 지휘할 사령관 트루베츠코이 공작이 나타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새 황제에 충성서약을 거부하고 ‘콘스탄틴’, ‘콘스치투치야(헌법)’란 두 개의 구호만 외쳤다.

그들은 전제정치 타도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고 군복무 기간을 25년에서 10년으로 단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혁명에 들뜬 그들은 러시아의 겨울이 얼마나 춥고 음산한지 잠시 잊고 있었다. 날은 너무 춥고 해는 짧았다. 그들에게 닥칠 운명의 그림자는 가뜩이나 해가 저물어 어두운 광장을 더욱 어둡게 했다. 니콜라이 1세는 신성한 즉위식에서 유혈사태를 피하려고 대주교를 보내 달래고, 조국전쟁에 참전해서 병사들에게 인기 있던 노장군 밀로라도비치를 보냈으나 혁명군의 총에 쓰러졌다.

몇 차례 총격이 일어나자 화가 난 니콜라이 1세는 현장에서 모든 지휘를 맡았다. 오후 2시 30분쯤 해가 저물자 포병의 지원 사격을 받은 후 기병대와 보병 9천 명을 보내 추위에 지치고 배가 고프고 오줌도 마렵던 오합지졸 혁명군 3천 명을 단 1시간 만에 진압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1천 3백여 구의 시체와 부상자들을 차디찬 네바강에 버리고 광장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니콜라이 1세는 비밀경찰을 운용하고 검열제도를 강화하며 철저한 독재와 반동 정치를 했다.

실패한 혁명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형과 시베리아 유형이었다. 다소 혐의가 약한 600여 명의 장교들은 계급장을 떼고 카프카스 전쟁에 노예병으로 투입됐다. 주동자€€5명은 처형되고 31명은 감옥에 수감됐으며, 나머지 121명은 1년 동안 영하 40도의 강추위와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발목에 5kg 족쇄를 차고 6,000km를 걸어가는 시베리아 유형에 처했다. 30년이 흘러 니콜라이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고 바로 사면을 했지만 121명 중 30년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은 45명뿐이었다. 일부는 이르쿠츠크에 정착하여 서쪽에서 온 농사기술과 씨앗을 심으며 자신들의 삶도 그 땅에 심었다.

1812년 조국전쟁에 승리한 후 파리를 점령하고 돌아온 애국심으로 가득한 청년 장교들이 졔까브리(Декабрь, 12월)에 혁명을 꾀해서 ‘데카브리스트(Dekabrist, 12월 당원) 혁명’이라고 불렀다. 시기상조로 처절하게 실패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야망과 사리사욕이 아닌 조국을 위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30년간 시베리아로 유배 간 희생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짜르를 짝사랑했다. 그래서 30년씩이나 호되게 당할 줄 몰랐다. 짝사랑은 잔인한 착각이었다. 어쩌면 숭고한 희생과 고결한 이상보다도 순진하고 어리숙한 바보스러움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켰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규모 영지와 농노를 거느린 소수 지배층이 특권을 내려놓고 변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노동자의 망치’와 ‘농민의 낫’이 지배자의 목과 머리로 향할 것이라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주장은 불행히도 92년이 지난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세비키들에 의해 이뤄졌다.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러시아가 멸망하고 소비에트가 탄생하여 격렬한 적백내전으로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숙청당했다. 역사에 선후는 있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결자해지(結者解之)한다.

 

투르게네프.
투르게네프.
폴린 비야르도.
폴린 비야르도.

 

유럽의 인기 작가이자 위대한 농노해방 운동가

투르게네프(Тургeнев, 1818~1883)는 무겁고 심각하며 문제의식이 가득한 도스토옙스키(Достоеeвский,1821~1881)나 톨스토이(Толстоoй, 1828~1910) 같은 작가들과 달리 아름답고 유려하며 수채화처럼 맑고 은은한 묘사로 유럽 독자들을 열광시켰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는 성인이 된 후 인생의 대부분을 파리와 바덴바덴 등 유럽에서 보냈다. 플로베르, 모파상, 위고, 졸라, 조르주 상드, 공쿠르 형제들과 막역한 사이였다.

투르게네프는 고향 아룔에 5천여 명의 농노를 둔 대지주로서 평생 부유하게 살았다. 7개 국어에 능통한 그는 모스크바 대학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파리에 살면서 서유럽에 온 러시아 지식인들을 돕고 여러 곳에 연결해주는 인텔리겐차들의 대사 역할을 했다. 문학, 미술, 음악에 종사하던 러시아인 중에서 투르게네프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투르게네프는 스케일이 큰 대인배였다.

투르게네프는 1850년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농노를 학대하던 어머니가 죽자 당장 1천여 명의 농노를 해방했다. 해방된 농노들이 그를 찾아와 러시아 전 민중을 대표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고 전한다. 그가 쓴 『사냥꾼 수기』는 당대 러시아 농노의 심각성을 유럽 각지에 알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러시아 당국은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반대 여론이 너무 거셌다.

궁금한 사람들에 의해 『사냥꾼 수기』는 순식간에 매진되고 재판에 재판이 거듭되면서 농노제 폐지가 공론화되자 압력을 못 이긴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 해방령을 선포했다. 데카브리스트들도 감히 못 이룬 농노해방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위대한 농노해방가였다. 

 

투르게네프의 영원한 뮤즈, 폴린 비야르도

역사는 때때로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이들의 삶을 불멸의 역사로 기억해 준다. 투르게네프는 25세 때 첫사랑에 꽁꽁 묶여 평생 한 여자의 그림자가 되어 살다 갔다. 그의 일생이 곧 세계 최고의 연애소설이었다.

184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을 보기 위해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스페인계 프랑스 가수로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전설적인 디바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821~1910)가 프리마돈나였다. 그녀의 기대 이하 외모는 잠시 관객을 실망하게 했지만 곧바로 고혹적인 목소리가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폴린 비아르도는 개선장군처럼 목소리 하나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많은 관객을 압도한 후 오직 단 한 사람만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열병에 걸린 그 포로는 연일 찾아와 피멍이 들도록 미친 듯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하다 짝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맛이 간 사람은 앞에서 소개한 러시아 위대한 소설가이자 농노해방가인 이반 투르게네프였다. 40년 동안 지속될 기이하고 슬프고 한심한 사랑의 서막은 《세비야의 이발사》로부터 시작됐다.

청년 투르게네프는 폴린의 남편 루이 비아르도를 먼저 찾아갔다. 폴린과 루이 부부는 4명의 자녀를 두고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투르게네프는 평생 독신으로 폴린에게 충절을 바치면서 희생적인 짝사랑의 위대함을 실천했다. 가슴에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생이 끝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라는 문신을 새기고 부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며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내 유일한 가족”이라고 말했다. 그는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에게 “폴린이 명령하면 발가벗고 온몸을 노랗게 칠하고 지붕 위에서 춤출 각오도 되어 있소”라는 민망한 고백까지 했다. “당신이 없으면 마치 공기가 부족한 것처럼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납니다”라는 말은 듣는 사람의 닭살을 돋게 했다.

그는 파리 근교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평생을 폴린의 후원자로 살았다. 1883년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폴린을 ‘여왕 중의 여왕’이라 불렀고 그녀에게 전 재산을 상속했다. 헌신적으로 과분한 사랑을 받은 폴린 비야르도보다. 파리의 ‘마담 비아르도 살롱’은 화려하고 기품이 있어 많은 명사들이 찾았다. 마담 비아르도는 목소리에 한계가 생긴 60대가 지나서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83세에 3막의 오페라 《센드리용》을 완성하고 89세까지 오래오래 살다 갔다. 

 

첫사랑, 봄날 아침의 뇌우 같은 것

아이러니하게 이런 얼빠진 짝사랑은 “투르게네프의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사랑에 가장 근접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모파상은 두 사람의 관계를 19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라고 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폴린을 사랑한 투프게네프가 불멸의 사랑의 주인공이라는 역사적 평가에 대해 불편함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첫사랑은 잔인한 착각이라고 믿는 상처받은 수많은 남녀는 이들의 행위가 몹시 역겨웠으리라!

나에게도 첫사랑이 있었나? 그녀 앞에 서면 나는 뜨거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불이 도대체 어떤 불인지 알 필요가 없었다. 달콤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통과의례로서 첫사랑에는 달콤함과 씁쓸함이 공존한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소설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과거이자 인생이었다.

그런 첫사랑이 깨지지 않고 그의 인생을 지배했다. 소설은 후미에 “내가 소망했던 것들 중에서 과연 무엇이 실현되었는가. 벌써 내 인생에 황혼의 그림자가 밀려오기 시작하는 지금,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봄날 아침의 뇌우에 대한 추억보다 더 신선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당신에게도 ‘봄날 아침의 뇌우’ 같은 추억이 남아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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