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영의 고지도와 인문학

이태원의 이야기

그 서글픈 공간

글 · 정대영(서울대 규장각)


사람과 산 독자 여러분 안녕하신지요. 이제 2017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는 어떤 목표와 희망을 가지고 계신지요. 다사다난했던 2016년이 지나고 우리에게 다가온 새해의 아침. 여러분 모두가 행복하시길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태원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서울의 이태원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최신 유행과 외국인이 머무는 그곳, 그리고 미군기지를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장소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러한 모습의 이태원이 탄생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변화와 고난의 세월들이 역사 속에 오롯이 녹아 있었는지 알고 계셨는지요. 오늘은 이태원의 옛날이야기를 고지도를 통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땅이라는 공간의 옛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지요.


1. 이태원을 걸어가며

이태원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필자에게는 늘상 그러했던 것 같다. 같은 용산구에 살면서 자주 가 보곤 하는 곳이었음에도, 미군기지를 넘어 펼쳐져 있는 그 공간에서 언제나 이질감을 느끼곤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단순히 이곳이 관광특구이며 외국인이 많아서 그랬던 것일까. 이슬람사원이 있고 서울에서 가장 뚜렷한 빈부의 구성이 펼쳐져 있어서인가. 그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필자는 10년 전에 이태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연구하여 논문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 글을 쓰면서 느끼게 되었던 감정이라는 것은 약간의 당혹감과 서글픈 모습이 땅에 오롯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바라보이는 저 화려한 네온사인의 모습 뒤로 이태원의 대로변을 조금만 들어가 보더라도 우리가 바라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님을 알게 될 것이었다. 일반 관광객이 이태원의 남쪽과 북쪽의 주거지를 가볼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고, 행여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모습이 우리네 삶에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지. 이태원의 주민도 아니면서 감히 이태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 보면 볼수록 기구한 인생사가 이 땅에 담겨 있음을 학자의 입장으로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그 오랜 시간 인고의 세월을 감내해온 이태원이라는 땅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다.

2. 땅에도 운명이 있었던가.

사람에게 운명이 있다는 말처럼 땅에도 운명이 있었던가. 풍수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필자는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이 가능해 진다면 서글픈 일이 아닌가. 이태원이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이야기를 살펴보다 보면, 그와 같은 굴레를 안고 살아갔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태원은 기본적으로 본래 ‘역(驛)’이었다.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부터 조선시대에 남부지방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주요한 역(驛)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역을 중심으로 취락들이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도성과 가까웠기 때문에 숙박의 역할은 크지 않았던 듯 하다.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이태원 지역은 그저 한가로운 도성외곽의 농촌지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 따르면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경의 이태원 지역은 왕십리와 함께 도성에 필요한 미나리, 배추 등 야채를 재배하는 상업적 근교농업에 주로 종사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이태원역 건물을 제외하고는 고지도에 표시되는 것으로는 전생서(典牲署)가 있는데 이 기관은 현재의 이태원 북서쪽에 자리 잡은 해방촌지역으로 왕실, 문묘의 제사용으로 쓸 돼지, 양, 염소를 기르던 기관이었다.

이태원이라는 지명을 한자로 어떻게 써야 옳을까. 현재 이태원의 공식적인 한자 지명은 ‘梨泰院’이다. 이러한 이름은 예전 이곳에 배나무가 많았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옛날 지명에는 그 동네 주민들이 사용하던 음만을 한자로 옮기고 실제 의미가 다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래의 옛 고지도를 보더라도 그러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利太院’, ‘二泰院’, ‘利泰院’처럼 조선시대에도 불리는 음만 같을 뿐 서로 다른 한자를 혼용해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다르게 부르는 지명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특히나 이런 작은 지명의 경우 일상다반사일진데 말이다, 하지만 조금은 독특한 이태원의 옛지명이 필자를 머뭇거리게 한다. 역사문헌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으나 일제강점기의 몇몇 신문기사와 조선후기 서적인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등장하는 ‘異胎院’이라는 지명이 바로 그것이다. ‘異胎院’. 뜻을 풀이해 본다면 다를 이(異), 임신할 태(胎)라는 뜻이 된다. 즉 조선인이 아닌 다른 이들의 아이를 임신한 곳이라는 비하의 뜻이 담겨있었다. 도대체 이는 어떠한 영문인가. 일제 강점기의 신문기사 등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의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는 용산에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주둔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선의 여성들을 욕보여 태어난 아이들이 이 지역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란이후 조선정부는 전란 중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이태원 지역에 살게 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러한 전설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하여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앞으로 다가올 운명의 슬픈 예감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려운 전문용어이긴 하지만 ‘시참(詩讖)’ 이라는 말이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 내용처럼 인생살이가 살아진다는 것인데, 미래의 암시가 시 속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흔한 이야기로 가수들이 자신의 노래 가사처럼 인생살이를 하게 된다는 풍문과 비슷한 것이라 하겠다. ‘異胎院’이라는 이름도 그러한 예견처럼 다가온다. 본래 서울 근교의 조용한 동네였던 이 곳은 언제나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곤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1592년) 당시에는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이태원 근방에 있었으며, 임오군란(1882)때는 청나라군대가 용산과 이 근방에 주둔했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 당시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이 지역에 일본군기지가 생겨났고, 해방이후에는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미군기지가 들어섰다. 외인들에 의해 하루도 쉴 날이 없는 세월이었던 이 곳에서, 지역민들은 삶은 자연히 그들을 위한 장사에 초점이 맞춰질 수 밖에는 없었으리라.

3.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동양의 고전인 ‘장자(莊子)’에 등장하는 말이다. 잘난 나무들은 오히려 그 쓰임 때문에 제 명을 다 지키지 못하고 베어짐을 당한다. 가장 쓸모없는 나무는 그 쓸모없었음이 무기가 되어 무용(無用)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산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혹은 그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이태원 지역의 시련은 그 지역의 잘난 위정자들에게는 매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지금까지 이 지역을 지키고 살아남게 만든 것은 바로 평범한 서민들의 힘이었다. 그들은 고된 시간을 이 땅과 함께 감내하며, 변화하는 세력들에 따라 땅의 쓰임이 바뀜에도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그리하여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던 이 지역은 더 이상 60-70년대의 모습이 아니며, 관광특구와 역동하는 생명력의 다문화성으로 외지인의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예전 이태원 지역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1920년부터 현재까지의 지적도를 구해 살펴본 일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둘 늘어가는 상가와 도로, 그리고 논밭이 사라짐을 보면서 이 지역의 생명력이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태원의 진짜 모습은 저 멀리 보이는 한남동의 화려한 주택이 아니라, 이태원로 남쪽의 가파른 다세대 주택에서 보이는 진솔함에 있을 것이다. 상점가의 대로변을 따라 걷게 되는 관광객이 미처 다가서지 못한 그 너머의 삶에서는 회로애락을 이 땅과 함께해온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예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또 다른 시련을 이겨내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중국의 사상가였던 맹자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게 된다. 사람들의 그 위대함에 감사하며.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우리가 함께임을 다시금 깨달으며, 필자 역시 이 땅과 시대를 걸어가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그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육체적인 괴로움을 주시며

그를 굶주림에 빠지게 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하여

하는 일들을 모두 어그러트린다.

이러한 이유는 그의 마음속 깊이 참을성을 완성시켜

그동안 불가능했던 일마저 해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 맹자(孟子) 가운데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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