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듣다  전주 모악산 기슭에 사는 작곡가 지성호

 

청산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글 · 박원식 사진 · 주민욱 기자

 

오페라 작곡가 지성호(63세)가 산골로 이주한 건 유년에 관한 향수라는 감성적 갈증에 의해서였다. 부여 백마강변에서 태어나 자란 그에게 시골이란 원체험의 끌텅이자 정서적 시원(始原)이다. 일테면 어린 시절, 달 밝은 밤길에 드리워지던 달빛 그림자에 대한 기억이 성년 이후까지 내내 그리움으로 일렁거리더란다.

평생을 작곡가로 살게 한 단초였던 성장기의 음악적 환경 역시 자주 향수를 자아냈다. 그렇다면 후다닥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겠으나, 오랫동안 전주라는 도시를 근거지로 삼아 삶을 끌어온 터라서 그게 쉽지가 않았다. 해서, 그는 전주 지척에 있는 모악산 자락 완주군 구이면의 시골을 정처로 삼았다. 마치 귀향을 한 것처럼 만족스럽게, 모악산의 품에 안겨 20년째 살고 있다.

지성호는 서양의 산물인 오페라에 판소리를 접목한 작곡에 진력해왔다. 다시 말해 ‘한국적 오페라’ 창작을 지향하고 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를 첫 작품으로, “논개” “흥부와 놀부” “루갈다” 등 많은 대작을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던 그는 어려서부터 일찌감치 음악의 세례를 받았다. 얘기를 들어볼까.

“저의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다루셨어요. 고모님은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고요. 그런데 제가 이 고모님에게 특별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자주 저를 업어주었던 고모의 따뜻한 등 냄새, 음악이 흐르던 교회의 분위기, 목조 건물이었던 교회에서 풍겨 나오던 나무 향기, 남폿불에 그을린 교회의 천정, 많은 기억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납니다. 고모의 영향으로 저는 항상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로 자랐어요. 고모님이 최초의 음악교사였던 셈입니다.”

“행복한 유년기였군요.”

“초등학교 때엔 짝사랑이라는 걸 했습니다. 음악선생님을 흠모했던 겁니다. 당시 제 눈에 비친 그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존재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석양이 들이치는 복도를 걸어가는데, 선생님이 교실 안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그 분의 음악수업은 또 얼마나 좋았는지….”

“그 역시 음악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겠어요. 짝사랑이라 아팠을까?”

“일찌감치 고뇌라는 걸 경험했던 셈이죠.(웃음) 여하튼, 제가 각별하게 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고, 음악이 그저 좋았습니다. 동네에 브라스밴드가 지나가면 그 감미로운 음색에 이끌리곤 했어요. 마치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에 나오는 소년처럼 하루 종일 밴드의 뒤를 따라다녔어요.”

유년과 소년기의 굽이굽이에 음악적 체험이 서려있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한 시절이 그렇게 흘렀다. 그러나 인생은 곡예를 닮아 한순간에 기이하게 휘기도 한다. 행복은 대체로 짧게 스쳐 지나가고, 그 스산한 뒷자리로 신산(辛酸)이 흘러든다. 전주의 명문 전주고를 다니며 음악 레슨을 받았던 지성호는 별안간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부친의 치명적인 사업 파산으로 한순간에 거리로 내몰렸던 것.

 

 

교직을 6개월 만에 사직하다

 

“더 이상 부모님의 양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던 겁니다. 충격과 좌절이 컸어요. 부잣집 아들이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추락했으니까.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을 하며 간신히 견뎌냈죠. 그 와중에서도 음악을 포기하진 않았어요. 분수를 모르는 녀석이라 여긴 주변 사람들의 괄시가 많았지만 상관하지 않았어요. 피아노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학비를 벌면서 전북대 음악교육과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고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셨죠? 그러나 6개월 만에 사직을 하셨어요. 왜죠?”

“음악실조차 없는 학교의 기이한 현실에, 교장 앞에서 차렷 자세로 결재를 받는 시스템에 심히 괴로웠습니다. 저의 자아가 완전히 망가지는 걸 참기 어려웠어요. 오직 호구지책을 위해, 연명을 위해, 그 말도 안 되는 현실에 길들여질 수는 없었습니다.”

“부인께서 기겁했겠어요.”

“아내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놨죠. 차라리 배추장사를 하는 게 떳떳하겠다고. 당시 셋방살이를 하는 형편이었기에 아내의 불안이 컸을 거예요. 그러나 선선히 수긍해줬습니다. 나야 뭐 오케이다, 당신 알아서 하라, 그렇게요. 집사람이 원래 그렇습니다. 평생 돈 문제로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질 않았어요.”

“저런!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부러워하겠어요. 아내의 그 현명한 대범함에 선생께선 오히려 용기백배하셨겠죠?”

“나름대로 치열하게 분발했습니다. 어렵사리 음악학원을 차려 돈벌이를 했고, 대학원에 진학도 했고,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고…. 하지만 성에 차질 않아 내부에 끓어오르는 게 많았어요. 그 불만의 계절에 제가 산에 미쳤습니다. 틈만 나면 지리산으로 달려갔어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엔 더 열심히 지리산을 올랐어요. 저 모악산도 숱하게 올랐습니다. 산행으로 울분과 갈증을 달랬던 겁니다.”

산에서 번뇌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는 얘기겠지. 높고 외로운 산정에 올라서 돌아보면 인생이 새롭게 보인다. 슬픔도 슬프지 않게 다가오고, 기쁨에조차 크게 반색할 일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청산이 가슴으로 들어와 한결 담담하게 마음을 쓰게 돼서다. 텅 빈 새 그릇처럼 마음을 비워서다. 처자를 건사하고 음악전공자로서의 비전을 찾느라 내심 남몰래 조바심치며 독립군처럼 분투하는 나날 속에서, 무시로 산에 올라 긴급 수혈을 거듭했던 지성호의 내심을 공감할 수 있다.

뜰에 봄이 사뿐히 내려앉아 풍경이 환하다. 온갖 초목들이 저마다의 물감을 짜 꽃잎을 물들인다. 저만치 파란 하늘 아래로는 헌걸찬 모악산 봉우리가 푸른 눈을 가늘게 내려뜬 채, 지그시 인간세의 봄날을 지켜보고 있다. 지성호 내외는 거처 안팎의 모든 공간에 온갖 공을 들였다. 2백여 종의 초목들이 자라는 정원의 완결성에서 부부가 쏟은 땀과 품을 짐작할 수 있다. 모악산 산신령이 그 노고를 치하할 테지만, 그 무엇보다 지성호는 이 집의 숨과 결에 스스로 만족한다. 집이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주는 동행이라 할 수 있으니, 그가 이 집에서 얻었을 꿈과 위안의 총량이 수 톤(t)에 달할 것이다. 여기 산기슭으로 옮기기 전엔 전주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파트에서 사는 일은 외로운 고도에 홀로 격리된 삶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산골에 집을 짓고 다만 1년만이라도 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많은 모색과 답사 끝에 결국은 이 시골로 귀촌한 거예요. 집과 정원을 마무리하기까지엔 자그마치 5년이나 걸렸습니다. 그 5년 동안 곡 하나 쓰지를 못했죠.”

“집의 품새가 차분하고 편안합니다. 건축과 음악은 그 내재율에서 서로 닮았다하죠?”

“건축도 음악처럼 변화와 통일, 그리고 비례의 묘를 살려야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봐야겠죠. 저는 이 집을 지으며 몇 가지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단순하게 짓기, 3대2의 황금비율을 구현하기, 갈색과 흰색으로 색감을 통일하기, 창을 많이 내 채광효과 도모하기, 전적으로 자연재료를 쓰기 같은 것들이죠.”

“사실 집보다 인상적인 건 지선생님 본인입니다. 매우 내향적이고 감성적인 개성이라 느껴져서 말에요.”

“음악을 전공하면서 형성된 성향일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음악의 궁극적 의미는 영혼의 울림이랄까, 공감대의 확산이랄까, 그런 것에 있는데, 우선은 저 자신을 자주 돌아보는 습성이 몸에 배였어요. 반성이라는 걸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하는 편이고.”

 

 

그리움, 삶과 음악을 지속하게 하는 힘

 

지성호는 집안에 ‘곡감옥(曲監獄)’이라는 이름의 작업실을 마련해 뒀다. 외부와 차단되고 밀폐된 작업실로 일단 작곡 작업에 들어갈 경우엔 감옥살이처럼 완벽하게 몰입하겠다는 투지의 산물이다. 타인이나 잡념의 틈입을 일체 허하지 않겠다는 독심(毒心)의 표명이다. 대체로 자기세계를 탁발하게 돋운 예술가치고 독종 아닌 이가 드문 법. 목을 건 심정으로 야무지게 덤벼들지 않고서 예술을 이루긴 힘든 법. 언뜻 산골에 살며 한가하게 화초나 완상하며 유유자적하는 산림처사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지성호는 실상 작곡에 혼을 쏟고 진을 빼는 인물이다.

“작곡행위란 제게 긴 유폐의 시간을 통과하는 일입니다. 오페라 한 편에 필요한 작곡을 위해서는 최소 1년여의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팽팽한 긴장감을 갖고 작업실에 박힐 수밖에요. 그럴 때면 감정의 기복도 심해서 좌절과 희열이 교차합니다. 그러다보면 뇌 용량상의 한계가 오는데, 그럴 때 뜰에 나가 풀을 뽑으며 머리를 쉬는 겁니다.”

“그 과정을 일컬어 산고(産苦)라 하겠죠?”

“음악이란 매우 추상적인 예술입니다. 그림이나 소설과 달리 끌어다 쓰거나 모방을 할 구체적 대상이라는 게 없어요. 오페라 작곡의 경우엔 그나마 대본이라는 기저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실체가 없는 대상을 형상화해야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로 어려운 작업이죠. 그래서 자주 제 자신의 무능력과 한계를 절감합니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좌절이라는 놈이 그렇게 엄습해요. 그러나 좌절 속에서 끙끙대다 보면 드디어 비집고 들어갈 문이 보입니다. 영감이 찰나에 떠올라서. 좌절과 희망의 숨바꼭질! 제가 살아가는 모습이 그와 같습니다.”

“근래에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간 뮤지컬과 달리 오페라는 여전히 특정한 애호가들이나 즐기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오페라는 오락 중심의 문화를 즐기는 대중들의 취향에 부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은 게 사실이죠. 오페라와 뮤지컬의 중간쯤 되는 공연물로 대중과 소통을 하자, 저 자신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있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클래식과 대중가요엔 우열이 있을까요?”

“클래식과 달리 대중음악은 진리를 드러내기 보다는 오락이나 유희로 기능한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감흥을 전혀 느낄 수가 없던데요.”

“사람들은 가요를 듣거나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어요.(웃음)”

“제가 음악적 편식이 심한 걸까요?(웃음) 아도르노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대중음악은 소비적이고 오직 대중의 취향에 따른다. 작곡가보다 가수가 중시되고, 불꽃같이 일어났다가 거품처럼 꺼져간다.’ 제가 전적으로 동감하는 얘깁니다.”

기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기차를 타고, 버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버스를 탄다. 음악에 대한 취향도 그와 같아서 우열을 가를 일이 아닐 것만 같지만, 지성호는 클래식의 손을 번쩍 들어줄 뿐이다. 평생 오페라 작곡에 전념하였으니 딴엔 온당한 클래식 사랑이라 할 수밖에.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흔들 수 있는 오페라 창작에 관한 집념, 나아가 불멸의 음악에 대한 선망까지를 엿볼 수 있는 귀띔이고.

지성호는 공공생활의 잡답(雜沓)에 휩쓸리기를 경계한다. 가급적 단독자로 존재하는 게 생의 본연을 만날 수 있는 길이라 여긴다. 이런 그가 유심히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건 외로움이라는 물건이다. 외로워야 창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 아니랴? 예술이란 결국 외로움을 집전하는 행위가 아니던가. 외로움과 샴쌍둥이처럼 머리를 붙이고 동행하는 그리움이라는 형제도 지성호의 삶과 음악을 지속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제 마음 속엔 삶의 시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갈망이 가득합니다. 이 갈망이 외로움과 그리움의 감정을 야기해요. 당신은 왜 작곡을 하는가, 그렇게 묻는다면,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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