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연재 김연미 작가의 네팔에서 살아보기

 

회색 모래바람 속으로 히말라야 곁에 가까이 앉다

글 사진 | 김연미(여행 작가)

“여행은 인간을 겸손하게 해주고, 세상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영역이 얼마나 작은지를 알게 해준다”고 프리벨은 말했다.

김연미 여행작가가 자연이 빚은 경이 그 자체인 산간 내륙국 네팔을 1년 넘게 여행하고 돌아왔다. 희디흰 만년설의 고향, 힌두와 불교 고유의 문화가 공존하는 땅에서 길 없는 오지를 두루 누비며 삶의 지평을 탐험했다. 그 지난한 여정을 모은 ‘김연미 작가의 네팔에서 살아보기’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Prologue

1년-. 네팔 히말라야 곁에 가까이 앉아 소소한 일상에 놓여 있었다. 햇살 좋은 날에는 마당에 널어놓은 몇 가지의 빨래를 원숭이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지켜봐야 했고, 아차 하는 순간 빨래를 당겨서 가지고 노는 원숭이들을 쫓아야 했다. 내 집 앞마당을 놀이터로 삼고 집 뒤 담수장에서 다이빙과 수영을 즐기는 원숭이들과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 조용히 묻혀 있고자 했다. 정문 안으로 정원이 있고 정원을 사이에 두고 있는 4채의 집에 각기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사람만이 아니라 석류나무와 자두나무에 다양한 새들이 날아들었고, 돌담과 내 집 창고에는 뱀이 살았다. 나에게는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였다. 이 모든 것들에게 하루하루 안부를 묻게 되면서 자연스레 우리가 되었다. 이른 아침, 정원을 돌며 꽃과 나무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안부를 묻고 돌아서면 치자꽃  한송이가 그윽한 향기를 풍겼다. 물론 오후가 되면 치자꽃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원숭이들이 꽃 속의 꿀을 빼먹는지 큰 꽃들은 꺾어져 있었다. 사람 속에 살면서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히말라야 원숭이들이지만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가여워서 함께 울기도 했다.

하늘이 푸른 날은 찌아(홍차에 우유를 넣어서 끓인 티)를 끓여 마시며 히말라야에게 인사를 했다. 우리나라 산들은 겹겹이 쌓여 파도가 출렁거리듯 내달리는 모습이라면 카트만두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는 세상 끝 건널 수 없는 곳에 자리한 설산이었다. 히말라야는 인간이 만들어낸 신보다 훨씬 강렬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앉아 잠시나마 닫힌 호흡을 풀어헤쳤다. 히말라야에 오르지 않아도 히말은 늘 곁에 있었다.

 

 

코라를 돌며 기원한 세계평화

이곳에서 지낸 날짜를 정확히 헤아리면 1년 5개월이다. 네팔에서 인도, 스리랑카 등 주변 나라들을 여행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네팔에 머문 시간이 약 1년이다. 티베트 탕카(불교 그림)에 매료되어 그림을 그렸고, 네팔 산속 마을을 여행할 계획으로 네팔어를 배웠다(탕카와 네팔어는 왕초보로 현재 진행형이다). 카트만두 보드나트 인근에 방을 얻어서 반 년 살았고, 스와얌부 킴돌에서 집을 구해 또 반 년 살았다. 보드나트와 스와얌부는 네팔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네팔과 티베트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푸자(불교, 힌두교의 종교의식)를 드리는 신성한 사원으로, 외국인에게는 네팔의 종교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네팔리(네팔 사람·무스탕 트레킹 이후 네팔 사람조차 나를 네팔리로 알았다)처럼 아침 저녁으로 사원의 코라(성스러운 산이나 탑 둘레에 세워진 마니차를 돌리며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도는 티베트식 탑돌이)를 돌며, 풀문데이(음력 보름날)에 촛불을 켜고 세계 평화를 빌었다.

코라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 돌 때다. 티베트 라마(승려)에게 코라를 왜 도는지 물었고, 그 라마는 ‘세계 평화’라고 말했다. 나중에야 코라는 우리나라 탑돌이와 비슷하며 불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계 평화라고 알려주었던 라마는 티베트에 부모님을 남겨두고 혼자서 네팔로 넘어온 사연이 있었다. 보드나트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티베트인이 꽤 있었다. 여권이 없는 티베트 무국적자들. 나는 여전히 그들이 모두 세계 평화를 위해 코라를 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코라를 처음 돌았던 그 마음으로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

네팔은 147,000㎢(대한민국 넓이 99,646㎢, 네팔이 약 1.5배 넓다)로 땅은 작지만 색깔이 분명한 나라다. 너비 160km, 고도가 200m에서 8,848m에 이르는 산들이 전체 면적의  80%를 덮고 있다. 3,000m 이상 산악지역이 국토의 25%를 차지하며, 8,000m가 넘는 봉우리가 8개(에베레스트, 칸첸중가, 로체, 마칼루, 초오유,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안나푸르나)에 달한다. 기후는 코끼리가 사는 아열대 정글부터 뼈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휩쓰는 툰드라까지 펼쳐져있다.

이런 독특한 지형과 환경은 약 30여 종족의 삶터이다. 종족마다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종족 고유의 전통을 유지한다. 이 종족들은 먼 옛날부터 히말라야를 넘어오거나, 인도 평원을 건너와 정착한 이주자들이다. 이들은 다른 종족과 평화를 유지했으나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성격이 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배타성 때문에 종족의 고유한 전통이 지켜졌다고 한다.

나는 네팔이 매력적인 이유를 들라고 하면 히말라야 설산이 아니라 척박한 자연을 일구어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라고 의문이 드는 지점에는 언제나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은 높고 척박한 바위에 산양처럼 집을 지었고, 사슴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띄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네팔리가 다 좋지는 않았다. 약간의 돈이라도 오고가는 사이가 되면 맑은 하늘에 갑자기 몰려드는 구름처럼 의심이 몰려왔다.

네팔은 ‘여행자 가격’이 별도로 정해진 곳이 많다. 어느 공원 입장료는 네팔리보다 30배나 높게 받았다. 이런 것들이 의심을 더 부추겼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속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오해들이 쌓이면서 불편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문제 속에서 풀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네팔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네팔 시스템을 알게 되면서 화나는 횟수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내 조급했던 마음으로 생긴 오해도 많았다. 히말라야 곁에서 살짝이나마 이런 나를 알아채게 되었다. 만약 오해의 시간들을 풀어가지 못 했다면 나는 네팔을 끔찍하게 싫어했을 것이다. 네팔을 떠난 지금에도 애틋한 마음이다.

 

 

무스탕의 시작, 그리고…

무스탕 트레킹은 4월 말에 시작해서 5월 초(위 무스탕 12일, 아래 무스탕 5일)에 마쳤다. 나는 네팔에서 가을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고 있었다. 네팔에 산 지 7개월째, 무스탕에서 사과꽃 지고 피는 봄을 보았다. 위 무스탕은 짜인 일정에 맞추어 트레킹을 했다면, 아래 무스탕은 사람이나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혼자서 느릿느릿 산책을 즐겼다.

네팔의 오지로 알려진 ‘마지막 은둔의 땅(The Last Forbidden Land)’은 변하고 있었다. 좀솜에서 로망탕(무스탕의 옛 이름)까지 지프가 다니고, 그 차들이 좀 더 많이 다닐 수 있게 길은 점점 넓어졌다. 걸어서 5일 걸리던 길이 차를 타면 하루도 안 걸렸다. 마을은 몰려드는 관광객을 맞이하려고 전망 좋은 언덕부터 좁은 골목까지 게스트하우스와 호텔로 들어찼다. 물론 트레커들이 다니는 길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다. 그러나 트레커보다 먼저 차도를 통해서 마을은 코카콜라를 팔고 있었다. 무스탕이 개방된 이후부터 변화는 예견된 것이다.

나는 변화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찻길이 생기면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자연과 떨어져서 편리한 생활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편리하다’는 것은 야생 토끼의 발에 새 신발을 신겨 말랑말랑한 발바닥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나는 말랑거리는 발바닥이 자꾸만 거북스러워서 숲으로 향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궁극에는 원시의 숲으로 갈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차도로 들어오는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전통들을 자해하게 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사라진 곳에 사람들이 찾아갈까. 사람들은 조만간 비싼 체류 허가비를 낼 만한 곳인지 따져보게 될 것이다. 무스탕에 대한 불평은 아니지만 카트만두 타멜 거리에서 외국인들이 네팔의 폭등하는 물가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들었다. 무스탕도 언제 이런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나는 무스탕이 막 변화하는 시점에서 트레킹을 했다. 그래서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칼리간다키 강(Kali Gandaki)의 바람은 사납고 폭력적이었다. 트레킹 4일만에 콧등의 피부는 벗겨지고 입술은 거칠게 텄다. 현지인들이 나를 구룽족(Gurung)이라고 할 만큼 피부는 검게 변했다. 그러나 나는 그 변화가 참 좋았다. 피부는 탄력을 잃고 거칠어지고 있었지만 나의 내면은 어느 때보다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모래바람 속을 거닐면서 무스탕의 황량한 세계에서 참담함 외로움 서글픔 냉소 등 여러 감정이 내 스스로가 만든 감옥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3,500m 무스탕 고원에서 고독에게로 걸어갔다.  

 

세계는 산이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메아리로 돌아오는 외침이다.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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