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예술_문막읍 당산 자락에 사는 화가 김봉준

 

산에서 고친 몸

글 | 박원식 사진 | 주민욱 기자

산중 설원이다. 들판도, 냇물도, 산마루도 눈에 뒤덮여 잠잠하다. 주린 고라니가 헤맨 흔적일까, 눈밭에 찍힌 짐승 발자국이 어지럽다. 엄동설한에도 살아 있는 것들은 질기게 견딘다. 잡것 섞인 게 없이 맑고 새하얀 설원이 보기에 장관이지만, 꽝꽝 얼어붙은 겨울이란 산에 사는 짐승이나 사람에겐 고난의 한철일 게다. 오지에 박혀 사는 화가는 오늘도 안녕하실까.

굳게 잠긴 현관 앞 눈밭을 한참 서성거리는데 화가가 문을 열고 나온다. 김봉준(59세)이다. 삐뚜름히 눌러쓴 모자 아래로 드러나는 희끗한 수염과 부스스한 머리칼. 안경 너머 작은 눈이 들짐승처럼 반짝인다. 그는 여기 원주시 문막읍, 당산 자락 외진 산중에서 20년째 살아가고 있다.

김봉준은 지난 1980년대를 운동권에서 뛰었다. 투쟁적이고 저항적인 민주화운동의 전위에서 성난 말처럼 달렸다. 판화가 오윤(작고)을 위시한 일단의 목판화 운동 그룹이 있었는데 김봉준이 거기에 속했었다. 그는 시위용 ‘걸개그림’이라는 걸 창시했으며, 포고령에 쫓겨 1년쯤을 도망 다녔고, 최초의 지역문화운동으로 평해지는 ‘애오개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얻었다. 시위에 필요한 단체 티셔츠, 간판, 깃발 등을 만드는 일로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니까 김봉준은 청춘의 피와 깡을 다해 독재시대와 맞붙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두 가지 독한 좌절을 맛봤다고 한다. 하나는 80년 광주 오월항쟁 직후의 시대상황에 관한 좌절, 또 하나는 몸에 이상 징후가 생기면서 도래한 좌절감이었다. 뭔가 중대한 이상이 온 것 같았는데 막상 병원에 가도 병명을 알아낼 수가 없었단다. 브레히트의 말대로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물고기는 죽은 고기일 따름. 좌절이란 실은 길이다. 좌절이란 일어서라고 닥쳐오는 것이지 쓰러지라 덤벼드는 놈은 아니다. 김봉준은 좌절의 목을 틀어쥐고 도시를 벗어나 산골로 내려왔다.

“제가 원래 서울사람입니다만, 몸도 망가졌고 이젠 농민들과 어울려 사는 게 순리겠다, 어딘가 내가 좋아하는 산에 들어가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러나 벌어 논 게 있나, 손에 쥔 게 있나, 고민이 많았어요. 그 어느 하루는 선배 한 분이 강원도 산골엘 놀러가자 합디다. 선배 소유의 산이 있었던 거예요. 참 좋더라고요. 그래서 선배에게 말했어요. 형님! 이 땅 저 줄 거죠? 선배가 쾌히 응하더군요. 그런 연유로 오늘까지 여기 이곳에 자리 잡고 살게 됐습니다.”

“복도 많으신 분. 놀라워요.”

“그 선배가 아니었다면 제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찔해요.”

“산골에 정착하는 일이 쉽진 않았겠죠?”

“20년 전 처음이나 지금이나 어려운 건 마찬가지에요. 몸의 병증이란 게 인파선암이라는 걸 이곳에 와서야 발견하게 됐죠. 그리고 치료했어요. 산과 숲의 덕을 본 겁니다. 또, 20년 동안 집 다섯 채를 제 손으로 지었어요. 조립식도 지었고, 작업실도 지었고, 흙집을 지었다 부쉈고, 2층 정자가 있는 흙집도 지었고, 가마가 있는 조각실도 지었고, 그리고 현재 우리가 앉아있는 이곳 신화박물관을 마지막으로 지었어요. 집짓다보니까 20년 세월이 흘렀네.”

“작품 활동은 어땠나요?”

“암을 고치면서 판화를 다시 시작했죠. 민간형 판화랄까, 생태주의 판화랄까, 예전과는 다른 경향의 작품들이죠. 판화 외에 조각과 유화, 겨레붓그림(한국화)까지, 모두 네 가지를 합니다. 장르 한 가지를 보통은 10년 이상씩 배웠어요. 스님에게 불화(佛畵)를 배웠고, 조선필법의 비법을 전수받기도 했죠. 덕분에 제 판화엔 여백이 있고, 같은 선이라도 간결합니다. 흔히들 서양의 콜비츠 등에게 영향 받아 강하고 명암법이 두드러진 판화들을 하지만, 제 작품의 절반은 조선의 전통을 이었고 절반은 창작에요. 대중 속에서 제 작품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어때요? 화랑의 물 든 작품들과는 꽤 달라 보이지 않나요?”

 

 

‘싱그러운 힘’, 신화

지나온 20년을 돌아보는 그의 어조에 자랑이 실린다. 들입다 파고들어 미치면 도달할 수밖에. 적막한 산골살이의 고생이 자심했겠으나 고난을 뚝심으로 해치우고 제 갈길 탕탕 걸어온 이의 자부심이 꽃처럼 환하다.

그의 아내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여 차와 군고구마를 내놓고 내실로 돌아간다. 주변 사방의 벽면엔 신상(神像)이라 해야하나, 갖가지 신화 속 상징물을 조형해 걸어두거나 널어두었다. 해서, 무당소굴에 들어온 것처럼 어쩐지 기가 뒤틀리는 혼선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이곳은 김봉준이 요즘 사로잡혀 있는 신화 연구의 현장이며, 이름인즉 ‘오랜미래 신화박물관’이다. 고구려신화와 단군신화를 비롯해 도깨비신화, 저승길신화 등 다양한 신화를 상징물과 해설문을 통해 관람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꾸며 놓았다. 얼마 전엔 ‘신화순례’라는 책자도 펴냈다. 그는 어떤 내력으로 신화에 필이 꽂혔나.

“제가 원래 이념지향적 인간은 아니고 가치지향적 인간입니다.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가, 가난한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 것인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요. 그러나 사회는 수직적 질서 속에 있죠. 너무도 폭력적이고요. 산골에 살며 생태나 고전 관련 책들을 난독하면서 삶과 사회를 성찰하게 됐죠. 세상을 그간 너무 이원론적으로, 흑백론으로 판단했다는 걸 알았어요. 인류 발전의 직선적 발전 방식의 사고를 깨고 순환적 개념으로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환적 역사관이 이미 고대의 신화에 서려있다는 걸 알았고, 그 길로 관심을 집중하게 됐죠.”

“신화란 한마디로 무엇이죠?”

“보통 신성한 힘, 그걸 신화라고들 하죠. 저도 그 말에 대략 동의합니다만, 신성함엔 기성 종교의 의미가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저는 신화란 ‘싱그러운 힘’이다, 그렇게 정의해요. 싱그러운 힘이 집약된 성지가 산이고요. 인류문명이 만들어놓은 그 어떤 성지보다도 더욱 훌륭한 성지가 산이라는 생각이죠. 그래서 산신(山神)이라는 개념이 형성됐을 텐데, 사람들은 흔히 산신이나 산신할매를 천박하다고 야유하지만 그건 일종의 의인화겠죠. 말로 다할 수 없는 산의 진리를 은유한 것이라는 것. 여하튼 신화의 싱그러운 힘이란 신성한 공기와 기운이 감도는,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순환 질서를 알게 하는, 우리도 결국은 산이나 자연처럼 사라지고 돌아간다는 걸 알게 하는 힘이에요.”

“암 투병 역시 신화 공부에 빠져든 요인이었을 것 같군요.”

“그렇죠. 몸이 많이 아파지면서 단순히 몸이 아니라, 몸이라는 자연이 아픈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아픈 몸을 자연으로 돌리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러자 자연의 힘 중에서 가장 놀라운 재생과 부활의 힘, 다시 말해 신화적 힘을 체험할 수 있었어요.”

“삶엔 어떤 변화가 왔을까요?”

“내면의 평화를 도모하고 성찰을 반복적으로 꾸준히 하는 삶으로 변했어요. 그림이나 조각이나 판화를 통한 장인적(匠人的) 수련 역시 깨달음으로 가는 실천적 방편이겠죠. 수련과 예술과 밥의 일체화라고 할까. 그런 생활에요. 삶의 수양이라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물론 일반인들에게 이게 쉬운 건 아니죠. 하지만 취미도 도(道)일 수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올레길 걷기라든가 산행 같은 거, 이건 참 좋은 치유법이죠. 문화치유가 중시돼야 합니다.”

“문화치유? 뭐죠?”

“문화치유엔 세 가지가 있어요. 예술치유, 자연과 나를 일치시킬 수 있는 산행이나 산책, 숲속의 명상 같은 자연치유,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을 찾을 수 있는 영성치유, 이 셋이죠. 영성치유를 체험할 경우 숲의 영혼이나 동물의 영혼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아(物我)동포주의랄까, 산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인격과 물격(物格)을 함께 소중하게 대등하게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왜 꼭 산이죠? 복잡한 도시나 시장통에선 영성 치유가 불가능한가요?”

“아직 우리의 시민사회에선 영성문화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어요. 서구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어요. 요즘 치유니 힐링이니가 범람하지만 농담수준에 그치고 있어요. 사회과학적 대안으로 뭘 찾을 수도 없어요. 문화 운동적 과정을 거쳐 대안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 중심 학문이 신화학입니다. 신화학을 통해 영성적 공동체 문화를 일궈야하고, 그 핵심에 산이 있어요.”

 

 

“길 없는 산이 좋아”

영성과 영혼을, 신화와 힐링을 말하는 김봉준의 언어는 민첩하나 그의 앞에 앉은 돌대가리의 귀엔 환해지는 게 없다. 굽이굽이 굴곡을 거친 지난 삶의 피로와 내일의 희망을 성찰하는, 그의 떨리는 고백이 값지게 서려있겠지만 말이다. 시종을 일관해서 무표정한 그의 진지한 낯빛도 난수표처럼 어렵기만 하다. 눈 내린 이 겨울날, 그는 혹시 살풋 외로워 따분한 인터뷰가 아니라 흉금을 털어놓을 정든 벗의 방문을 갈망하는 게 아닐까?

“친구들과 요즘은 페이스북으로 소통합니다. 각자 다들 바쁘고, 고교 동창들을 만나면 골프나 사업 얘기나 하고, 재미없어요. 반면 예술은 ‘자기 안의 자기’라는 게 있어요. 재미있죠. 잘 가고 있나? 그렇게 스스로 묻는 재미. 보통 사람들은 창작의 기쁨을 잘 모르죠. 말없는 것들과 혼자 대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산을 신화적 성지로 여기는 당신이 산을 즐기는 방식은 특별할 것 같아요.”

“길 없는 산을 좋아합니다. 또, 이끼를 환장하도록 좋아해요. 이끼를 보면 어머니의 자궁처럼 근원적인 게 떠올라요. 아, 좋구나, 절로 탄성이 터져요. 산부인과 의사 말이 자궁벽이 이끼처럼 생겼다 해요. 여하튼 그늘지고 아주 조용하고, 실개천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는 산길을 좋아합니다. 홀로 소요하는 걸 좋아해요. 산이 저의 성지이자 인류의 가장 오래된 사원이니까.”

“사람보다 산을, 인간보다 자연을 더 좋아하시는 거 아네요?”

“그런 편이죠. 그래서 여기까지 왔죠. 아홉 개를 포기하고 한 개가 좋아서 왔어요. 출세 명예 유토피아, 그런 것들 다 포기했어요. 살가운 내 가정마저도 반쯤은 포기했었죠. 절더러 독한 놈이라 하던데요, 마누라가.”

“그렇다면 도피나 은둔?”

“거창하게 좀 얘기합시다. 대안문명의 창출을 위해 산에 왔다, 그렇게요. 새로운 대안문화, 영성문화를 창조하고픈 겁니다. 제가 꽤나 야심 있는 사람입니다. 하하핫.”

“그림만으로 생활은 무난하세요?”

“백조가 우아해 보이지만 물 밑에선 열심히 움직인다죠? 하루하루 생활을 절제하며 사는 일만으로도 전투예요.”

“영성을 체험한 사람은 뭐가 어떻게 다를까요?”

“자유로운 영혼이죠. 도그마가 없어요. 문화다원주의를 인정하고, 그리고 내면의 평화를 내 몸 안에 가질 수가 있습니다.”

“도 닦기보다 어려운 게 결혼생활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그렇던가요?”

“아내는 서울에 살다가 3년 전에야 이곳에 들어왔어요. 신화를 공부하면서, 신화적 사유를 공유하며 부부사이가 많이 좋아졌어요. 신화가 갖고 있는 속성, 영혼 평등주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생태주의, 언어 이전의 세계, 그런 것들을 함께 의논하고 연구하면서 좋은 사이를 유지해요. 죽이 맞아요.”

어느 선사는 말했다. 섹스하기 전에 맞절하라. 이기적이고 다급한 갈망에만 몰두하지 말라는 경책이다. 의식(儀式)이나 욕망에서 벗어나 삶에 신화를 도입하라는 귀띔일지도 모른다. 생활도, 꿈도, 사랑도, 그래야 죽이 맞는다는 훈수일지도. 죽 맞추기. 신화와 자연에 관한 김봉준의 생각들을 그쯤으로 쉽게 풀어도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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