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요들클럽이 보내는  오마주

 

한국 요들의 산 증인, 김홍철_두번째

 

 

90년대 이후 김홍철은 캐나다 이민을 떠나고 97년 새로운 음반활동 및 집필 작업을 하였으나 한국에서의 활동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사실 힘든 이민생활과 바쁜 사업으로 요들을 거의 잊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예전의 요들곡들을 다시 듣게 되었고 요들과 고국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김홍철은 다시 한국을 찾게 된다. 그리고 2003년, 드디어 ‘김홍철과 친구들’이 멤버를 보강, 재결성되어 우리나라에서 요들 공연 및 방송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다시 그들의 공연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 인물이다.

 

1997년 ‘The Last Yodeler’라는 음반을 발매하면서 김홍철은 오랜 공백을 깨고 컴백한다. 이 앨범은 그간의 그의 히트곡을 90년대 분위기에 맞추어 힙합, 재즈, 팝, 락 등 다른 장르와 혼합한 새로운 시도가 돋보인 앨범이다. 70년대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포크 감성의 요들이 90년대에 새로운 장르의 옷을 입고 재탄생한 것이다. ‘아름다운 베르네’에는 랩이 등장하고 ‘아름다운 산장’에는 재즈의 블루노트 선율이 흐른다!

이 음반에 대한 대중적 반응과 성과는 아직 유보적이며, 제목 그대로 김홍철의 마지막 요들 앨범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요들을 처음 소개했을 뿐 아니라 요들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한, 최초의 요들러이기도 한 것이다.

2003년, 오랜 공백기를 깨고 김홍철은 새로운 멤버 영입과 함께 ‘김홍철과 친구들’을 재결성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다.

1997년 신나라 뮤직에서 만든 ‘구자형이 뽑은 위대한 한국가요 여름에 듣기 좋은 노래’라는 편집 앨범의 12번째 곡으로 김홍철의 ‘푸른 창공에 로프를 던져라’가 수록되어 있다. 같이 수록된 곡들은 윤형주의 ‘조개껍질 묶어’, 김원중의 ‘바위섬’,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 박상민의 ‘무기여 잘 있거라’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유명한 노래들이다.

 

김홍철은 요들이라는 외국의 음악장르로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유일한 사람이고 그 족적 또한 독보적이다. 하나의 장르에 천착하여 이런 뛰어난 음악적 성과를 이뤄낸 가수가 우리나라에 또 있을지 필자는 의심치 않는다.

 

“우리나라 방송에서 최초로 요들을 부른 사람은 전 항이라는 분입니다. 친동생 전언수님이 홍일점 권성희씨와 80년대 ‘새샘트리오’라는 팀으로 활동했었고, 인기곡으로는 <나성에 가면>이 있습니다. 이후 전언수님은 이태원님과 ‘쉐그린’이라는 팀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두 분 다 미국에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서수남씨가 나왔는데, 지금은 작고하신 원로 가수 현인씨의 딸인 현혜경님과 ‘정말로 너무해’라는 듀엣곡을 했고 거기에 요들이 들어갔습니다. 이게 방송에 소개된 최초의 혼성듀엣 요들곡일 겁니다. 이후에 김홍철님이 나타났는데, 앞서 소개한 분들이 컨트리송에 요들을 살짝 가미했던 것이라면 이분은 스위스에서 직접 요들을 전공하고 오신 분으로, 방송에 출연하여 알프혼, 아코디언 등의 새로운 악기를 선보였고, 스위스 전통의상을 선보이는 등 우리나라에서 요들이라는 장르를 정착시킨 진정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전문적으로 방송에 출연한 요들가수는 없습니다.”  

-이두진(포크듀엣 둘다섯의 리더)

 

 

요들을 우리나라에 널리 퍼트린 대중가수로서 충분히 김홍철을 한국 요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으며, 결정적으로 그는 우리나라 전역에 아마추어 요들클럽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김홍철은 스위스 연주여행을 통해서 본토 요들클럽의 매력과 가능성을 깨닫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스위스의 그것을 한국화 하였고, 요들가수로 데뷔하던 시절부터 전국에 요들클럽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평균 일 년에 한 클럽 꼴로 전국의 여러 도시에 왕성하게 생겼던 모든 아마추어 요들클럽의 탄생에 김홍철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었고, 그 결과 20여개의 아마추어 요들클럽이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요들의 본향인 스위스를 제외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며, 우리나라 요들의 유지발전에 기반이 되어주고 있다.

전국적인 아마추어 요들클럽들이 존재했기에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요들의 명맥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아마추어 요들클럽들의 탄생은 대부분 김홍철 개인의 헌신적인 요들강습으로 시작되었다.

혹자는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요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니 김홍철이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이 일을 대신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현재와 같은 전국적인 아마추어 요들클럽의 분포가 가능했을 거라고. 그러나 김홍철은 우리나라 요들의 현황을 가장 먼저 설계하고 궁극적으로 건설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를 한국 요들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 타당한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은 요들에 반해 스위스 유학을 가게 되고 이후 고국에 돌아와 요들가수로 활동하면서 전국의 많은 지역에 요들클럽을 만든 김홍철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요들이 많이 불리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 동화 같은 사실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 요들 연구가들에게도 경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이후 전국에서 탄생하는 아마추어 요들클럽들로 이야기는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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