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삼백리길 1코스

 

남도삼백리길 제1코스 순천만갈대길은 와온해변을 출발해 순천만을 뒤집힌 U자형으로 돌아 별량 화포까지 가닿는 16km의 걷기 코스다. 여수를 거쳐온 남파랑길이 처음으로 순천과 맞닿는 길이기도 하다. 남파랑길 이정표엔 15.6km로 표기돼 있다.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 일몰.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 일몰.

 

주요 통과 지역은 와온~용산전망대~순천만 습지(자연생태공원)~별량 장산~화포이며 용산(77m)까지 오르는 산길 약 0.4km를 제하곤 대부분 평지다.

글 사진 · 황소영 기자

 

와온은 최근 일몰 여행지로 급부상한 곳이다.
와온은 최근 일몰 여행지로 급부상한 곳이다.

 

낮 2시가 넘어서야 와온을 출발한다. 폭염이 절정을 이룰 때였다. 겨울보단 여름에 걷기가 더 힘든데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가장 더운 시간에 출발한 까닭은 순전히 일몰을 보겠단 일념 때문이었다. 용산을 제하곤 대부분 평지여서 4시간 30분이면 충분, 걸음을 멈출 때쯤이면 얼추 저녁 7시. 재빨리 와온으로 이동해 검은 갯벌 너머로 사라지는 저녁놀을 보면 완벽!     

 

남파랑길과 겹치는 순천만갈대길

순천시내에 식당이 몇백 개는 되겠지만 이왕이면 출발지에서 먹기로 한다. 13년 전쯤 왔을 때와는 달리 와온은 일몰 명소로 급부상했고,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도로변엔 몇몇 식당과 10여 개의 신상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약선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참조은시골집’이 점심식사 예정지다. 며칠 전 사전 답사를 다녀오며 눈여겨보았던 집이었다. 어라, 어찌 된 일인지 꽉 차 있어야 할 주차장이 텅 비었다. 화요일은 정기휴무란다. “다른 식당도 있으니깐!” 하지만 화요일의 저주는 끝까지 이어졌다. 와온의 모든 식당, 적어도 도로변에서 보이는 식당들은 죄다 휴무였다. 폭염 속 둘레길을 빈속에 걸을 순 없었다. 리조트를 겸하는 ‘라움카페’에 들러 커피와 빵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허기진 뱃속 덕분인지 몸은 한결 가벼웠다.

지원 차량이 떠나고 홀로 와온해변에 선다. 광양과 여수를 거친, 아니 부산~창원~거제~남해~하동 등을 거쳐 온 남파랑길이 이 지점에서 순천과 합류한다. 이정표가 인색한 8코스 동천길과는 달리 번듯한 초입 이정표가 두 개나 있다. 전남의 경우 광양 순천 여수 보성 고흥 장흥 강진 완도 해남까지 남파랑길이 지나며 구간 수는 약 40여 개에 이른다. 순천은 이번과 다음에 걸을 2코스 꽃산너머동화사길, 딱 두 개 구간이 남파랑길과 겹치며 이후 63코스는 보성군 벌교로 넘어가 소설 <태백산맥>의 흔적을 따라 이어진다.

정기휴무인 갈매기횟집을 지나면 전봇대를 기준으로 길이 양쪽으로 나뉜다. 빨간색 남파랑길 화살표는 왼쪽을 가리키지만 삼백리길 이정표는 없다. 오른쪽 2차선 도로를 따라 걷다 ‘티엘블루카페’ 맞은편에서 도로를 버린다. 그 앞에 종점인 화포가 15.4km 남았다는 나무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제부터 바다 곁으로 가라는 얘긴데 막상 들어서면 풀이 무성한 밭길이다. 어차피 남파랑길과 만나므로 좀 전에 지난 전봇대 앞에서 빨간 화살표를 따라 걷는 게 낫다. “이 더위에 왜 배낭까지 메고 도로를 걷지?” 마주 오는 차들의 불편한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게 좋다.

 

와온해변의 갯벌. 칠게와 짱뚱어가 산다.
와온해변의 갯벌. 칠게와 짱뚱어가 산다.

 

용산전망대 직전까진 바다를 왼쪽에 두지만 그게 또 갯벌이어서 “아, 바다다!”란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발자국 소리에 놀라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칠게와 이글이글 그 칠게를 당장이라도 구워낼 듯한 태양열만 있을 뿐. 두 개의 카페를 연달아 지나면 바다가 잠시 멀어지며 키 큰 갈대밭이 나온다. 예쁜 정원인 가야농장 앞에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협조 바란다”는 순천시 안내판이 서 있다. 용산전망대 0.3km 이정표를 지나면 이번엔 400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낮은 산이지만 1시간 만에 만나는 그늘이었다.

 

순천만 갯벌과 칠면초.
순천만 갯벌과 칠면초.

 

용산전망대와 순천만 습지

아, 이게 웬일이지? 가볍던 몸이 고작 400m의 오르막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헉헉, 몇 번을 쉬며 심호흡을 한다. 늦은 오후면 일몰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용산전망대엔 해설사 한 명을 제하곤 아무도 없었다. 여름 한낮을 갈대숲을 서성이며 보내는 이들은 드물다. 더러 보이긴 했지만 그 수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삼백리길이 아니라면 나 역시 오지 않을 길이었다.

안내도에 의하면 1970년대 이전부터 분포했던 순천만 하구의 갈대군락은 2000년대 이후 팽창 속도가 급격히 증가했다. 간척 농지와 상사댐 조성 등 수계 변화가 그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이 갈대군락은 여행 명소로도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지만 홍수 조절과 적조 방지 등 천연 하수종말처리장 임무를 톡톡히 해내고 있다. 어패류의 산란 장소이자 철새들의 보금자리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용산으로 올라서는 숲길. 이 길 위에 전망대가 있다.
용산으로 올라서는 숲길. 이 길 위에 전망대가 있다.

 

출렁다리를 건너 갈대밭에 섰을 땐 하늘이 낮게 흐려 있었다. 제법 강한 바람도 불었다. 더위도 바람 앞에선 힘을 잃었다. 초록의 잎들은 서로의 몸과 몸을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갈갈갈, 샤샤샥, 바람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소리가 달랐다. 바람이 나를 살렸다. 더위에 절은 몸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바람은 걷는 이의 다리에 힘을 실었다.

길은 선착장 앞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지지만 바로 앞 매점에 들르기로 한다. 지난달 동천길을 걸으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던 갈대열차의 승차장이 있는 곳이다. 홍시빙수 한입에 생명이 몇 년은 연장된 기분이다. 아직 코스는 절반이나 남았지만 이곳 이후론 식음료를 살 곳이 없으므로 여기서 먹거나 사전에 미리 마실 물과 간식을 챙겨야 한다. 쉬어갈 곳은 많다. 지붕이 있어 볕이나 비도 피할 수 있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엔 입장료가 있지만 (적어도 1코스에서) 순방향이든 역방향이든 매표소를 거치진 않는다.

길은 선착장을 등지고 왼쪽으로 이어진다. 걷는 이는 높은 둑길, 바퀴가 달린 자동차나 자전거는 넓은 비포장 아랫길이다. 좁은 제방엔 어린 시절 ‘계란꽃’으로도 불렀던 개망초가 한가득이다. 혹여 뱀이 나오지나 않을까, 지레 걱정에 아랫길로 내려서지만 사실 길을 막고 있는 건 새끼 뱀 정도는 거뜬히 잘라낼 게들이었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사람이 나타났다 싶으면 순식간에 풀 속으로 사라지는데, 행군하는 군인들처럼 일정한 발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던 한여름의 갈대숲.
시원한 바람이 불었던 한여름의 갈대숲.

 

모자를 잃어버려 손수건을 쓰고 빗속을 걷는 기자.
모자를 잃어버려 손수건을 쓰고 빗속을 걷는 기자.

 

왼쪽으로 걸어온 갈대숲이 보였다. 바람은 여전히 시원했다. 모자를 벗어 손에 쥐고 젖은 머리칼을 날려보지만 습기 때문인지 여전히 땀내 진동이다. 한참을 걸은 후에야 오른손에 들린 모자가 사라졌단 사실을 알았다. 금방 쉬었던 정자로 돌아가지만 없다. 그 전 지점까지 돌아갈 엄두는 나질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비싸거나 아끼는 모자도 아니었다. 누군가 남이 쓰던 걸 주워갈 리는 없고, 괜히 쓰레기를 버린 꼴이 된 건 아닌지 걱정될 뿐. 잘가라, 모자야!

 

고마운 비를 맞으며

하늘은 점점 더 흐려졌다. 스마트폰엔 곧 비가 내릴 것이라는 알림이 뜬다. 한낮만 해도 나름 맑았던 날씨였다. 둘레길이라고 방심한 탓도 크다. 배낭 안에 판초우의를 넣고 다닐 땐 한 번도 비가 오질 않더니 빼놓은 날엔 여지없이 비다. 저 앞에 마을이 보인다. 큰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라도 들어갈 형편인데 다행히 폭우는 아니었다. 비는 딱 더위를 식힐 만큼 적당히 내렸다. 하아, 바람과 비가 나를 살렸다. 모자도 우의도 없으니 손목에 감았던 수건을 풀어 머리에 묶는다. 비를 막진 못하지만 볼썽사납게 젖은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이들이 “화이팅” “수고하십니다!” 격려를 한다.

 

개망초 가득한 길. 아래에는 차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 있다.
개망초 가득한 길. 아래에는 차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 있다.

 

마을이 가까워질 때쯤 남파랑길 이정표가 세 군데로 나뉜다. 하나는 걸어온 방향(10.6km)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야 할 방향(5km), 나머지는 다른 길(11.2km)을 향해 있었다. 걸어온 방향엔 하계코스, 제3의 길엔 동계코스(61-1)라고 적혔다. 안내도를 보니 갯벌이 아닌 내륙으로 이어진 길이다. 두 개의 남파랑길 61코스는 이 지점에서 만나 똑같이 화포로 이어진다.

 

와온이 일몰로 유명하다면 화포에선 일출을 볼 수 있다.
와온이 일몰로 유명하다면 화포에선 일출을 볼 수 있다.

 

화포 버스정류장. 우측 도로로 올라서야 나온다.
화포 버스정류장. 우측 도로로 올라서야 나온다.

 

장산마을을 벗어나면 도로지만 보행자를 위한 안전한 길이다. ‘불무골’ 버스정류장 앞에 ‘순천만 일출 일몰 전망대’ 안내판이 섰다. 봉화산(235.9m)으로 이어진 등산로로 시내의 봉화산(355m)과는 다른 산이다. 출발지 와온에도 일몰을 볼 수 있는 소코봉(231m)이 있다. 순천만과 여자만, 고흥 팔영산 조망이 끝내준다. 어쨌든 이 길 끝에 이번 구간의 종점이자 다음 구간의 출발점 화포가 있다.

화포에 도착했을 땐 오후 7시 6분. 하늘은 여전히 빗방울을 흩뿌리고 있었다. 지원 차량은 대기해 있었지만 와온으로 달려간다 해도 석양을 보긴 어려웠다. 딱 맞춰 일몰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포 바다의 일출도 쉬운 건 아니었다. 드물게 맑긴 했지만 대체로 흐린 날의 연속이었다. 그나저나 다음 달에 걸을 2코스는 무려 20km인데다 그늘이 없다. 그 생각을 하니 일몰이고 일출이고, 비를 내려준 하늘이 고마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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