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자전거 순례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 양중해, <떠나가는 배> 中

글 사진 · 김규만(굿모닝한의원 원장)

 

저문 하늘을 볼 때까지 자전거 라이딩은 단순하고 지루한 회전의 연속이다.
저문 하늘을 볼 때까지 자전거 라이딩은 단순하고 지루한 회전의 연속이다.

 

#이제 피오르를 따라 달린다

핀란드에서는 바람이 고요해서 자작나무 노란 이파리들은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넘어 노르웨이 북쪽으로 갈수록 나무들은 앙상해져 갔다. 드디어 피오르(fjord) 협만이 가까운 락셀브(Lakselv) 사거리에 당도해서 약간 직진하면 작은 공항이 나오고, 좌회전 우회전하면 바로 포르상거(Porsanger) 피오르(fjord)와 상봉한다. 이 협만(峽灣)은 좁지만 엄밀하게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 들어온 바다다. 피오르(fjord)는 빙하의 침식에 의해 만들어진 U자형 계곡에 바닷물이 들어와 형성된 길고 좁은 협만으로, 노르웨이의 독특한 지형이다. 빙하의 침식이 있었던 극지방에서만 나타나는 자연지형이다.

 

척박한 황야 깊숙이 들어온 피오르 협만. 바람이 많이 불어 나무들이 살아남기는 어려운 환경이다.
척박한 황야 깊숙이 들어온 피오르 협만. 바람이 많이 불어 나무들이 살아남기는 어려운 환경이다.

 

자연적인 길은 강과 해변을 따라 형성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자연적인 길은 강과 해변을 따라 형성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노스케이프(North Cape)로 이어진 올데피오르(Oldefjord)에서 좌회전하면 부동항 함메르페스트(Hammerfest)로 가는 길이다. 나의 선친께서 ‘함메르페스토’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어린 나에게 이 항구를 알려준 기억이 난다. 함메르페스트는 매우 높은 위도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다. 인구 1만 여명으로 청어나 대구, 포경업을 하는 작은 어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이 이곳을 점령하여 U보트(잠수함) 기지로 활용하다 폭파시키고 떠난 곳이다. 5월 중순부터 80일쯤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가 계속되고, 11월 말부터 80일쯤은 반대로 해가 안 뜨는 극야가 계속된다. 나의 선친은 1917년생으로 윤이상, 윤동주, 박정희, 정일권, 안두희, 존 F. 케네디, 인디라 간디 등과 동갑이다. 이런 사소한 핑계를 찾아 돌아가신 선친을 추억해 본다. 1917년 그해는 조선과 북아메리카에 역사상 최강의 한파가 찾아온 해라고 한다.

 

북반구에서 무역풍(Trade Winds)은 북동풍, 편서풍(Westerlies)은 남서풍, 극동풍(Easterlies)은 북동풍이다.
북반구에서 무역풍(Trade Winds)은 북동풍, 편서풍(Westerlies)은 남서풍, 극동풍(Easterlies)은 북동풍이다.

 

위도를 높일수록 바람은 거세진다. 며칠 북쪽으로 가다보니 서서히 바람이 거세어져 자전거 여행자는 오직 한 명만 만났다. 앞으로 바람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지구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으므로 동쪽을 향해 서면 맞바람을 받는다. 그래서 동풍이다. 여기에 북쪽 한랭고기압대에서 남쪽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의 벡터(Vector)를 더하면 북동풍이 된다. 그래서 지금부터 극풍은 북동풍이다. 이 센 바람과 싸우면서 타협하면서 가야한다.  

 

#센 남자들의 나라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북유럽식 이름은 원래 성이 없었다. ‘이름+아무개 아들, 딸’이라는 형식이었다. 19~20세기 초부터 상류층들은 근본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성’을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했다. €덴마크,€노르웨이에서는 주로 ‘­sen(센)’을 쓰고 스웨덴에서는 주로 ‘­sson(손)’을 쓰며, 핀란드에서는 ‘-nen(넨)’ 형태가 많다. 이전에 소개한 핀란드의 대서사시 <칼레발라>에 등장하는 인물을 살펴보면 베이네뫼이넨, 일마리넨, 레민케이넨, 요카하이넨 등 ‘­넨’으로 끝난 이름이 많다. 아재 혹은 아저씨 개그로 노르웨이에는 난센, 요한센, 아문센 등 ‘센’ 남자들이 많다.

 

영국을 대표하는 극지 탐험과 스콧과 섀클턴(오른쪽)
영국을 대표하는 극지 탐험과 스콧과 섀클턴(오른쪽)

 

1888년, 센 남자 난센은 그린란드의 만년설을 횡단한 후 에스키모들이 사는 고드호브 마을에서 겨울 동안 머물며 그들과 교감하고 추위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이후 3년간 에스키모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Eskimoliv,(에스키모의 생활, 1891)>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생고기를 먹으면 비타민C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을 예방한다. 극지방에서 이동은 개썰매가 최적화된 것이고 극한 상황에서는 개도 잡아먹을 수 있다. 탐험하는 사람, 장기간 배를 타는 사람들에게 아주 요긴한 지식이었다. 서양인들이 단고기(!)문화를 비판하지만 살기 위해 개를 잡아먹은 아문센과 섀클턴은 살아 돌아왔지만, 조랑말도 개도 먹지 않고 유기한 스콧은 부하들을 다 죽이고 자신도 죽었으며 동물 대원들마저 모두 죽였다.

노르웨이는 스웨덴, 덴마크 등과 함께 바이킹 시대(800~1050)에는 통일 왕국이었지만 1380년부터 덴마크의 지배를 받다가 1814부터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현명한 스웨덴의 카를14세는 프랑스의 편에 서서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뺏을 것인지, 영국의 편에 서서 덴마크를 상대로 노르웨이를 빼앗을 것인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겼다. 1813년 10월 러시아원정에서 돌아온 나폴레옹과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관망하던 카를14세는 눈썹을 휘날리며 신속하게 덴마크를 치고 노르웨이를 손에 넣었다.

1905년, 노르웨이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나자 연합왕국의 왕 오스카르 2세는 영양가(!) 없는 노르웨이의 왕권을 포기했다. 이때 난센은 막후에서 스웨덴왕 오스카르 2세를 열심히 설득해서 ‘덴마크 왕의 차남 칼 왕자가 노르웨이 왕위를 받을 수 있게’ 했다. 당시 33세였던 칼 왕자는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딸 모드공주와 혼인하여 영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두 살짜리 아들까지 있어서 당분간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었다. 영민한 칼 왕자는 노르웨이 국민들이 진정으로 입헌군주제를 원하는지 국민투표(79%찬성)로 확인하고 호콘 7세(Haakon VII)로 즉위했다. 참고로 현재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1인당 자산(資産)보유액이 가장 높아 영양가가 넘치는 나라로 스웨덴보다 GDP가 훨씬 높다.

 

스콧이 테라노바호에 싣고 간 설상차. 얼마 안 가서 고장이 났다.
스콧이 테라노바호에 싣고 간 설상차. 얼마 안 가서 고장이 났다.

 

남극점을 향한 아문센의 코스와 스콧의 코스. 왼쪽이 스콧, 오른쪽이 아문센이다.
남극점을 향한 아문센의 코스와 스콧의 코스. 왼쪽이 스콧, 오른쪽이 아문센이다.

 

스키를 신고 개썰매로 이동 중인 아문센의 남극탐험대(1911년)
스키를 신고 개썰매로 이동 중인 아문센의 남극탐험대(1911년)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선택했다면 난센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유력했다고 한다. 1906년 난센은 외교관으로 영국 대사를 하면서 영국의 에드워드 7세와 친해져 노르웨이 건국에 영국의 지지를 얻고, 남극 탐험에 나선 어니스트 섀클턴에게 조랑말과 설상차(스노모빌) 대신 개썰매를 이용하길 권했다. 섀클턴은 개보다 조랑말이 짐을 운반하는 데에 유용하고 설상차가 고장 나더라도 조랑말에 짐을 실으면 된다고 우겼다. 결과는 조랑말이 대부분 얼어 죽고, 설상차는 고장났으며, 결국 살아남은 조랑말조차 크레바스에 빠져 죽으면서 섀클턴 남극탐험대는 실패했다. 다만 탐험대가 아무도 죽지 않고 돌아왔다는 공로로 섀클턴은 기사 작위와 훈장을 받았다. 난센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사람이다.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며 핵심을 잘 짚고 행동하는 지덕체를 갖춘 사람이었다. 난센이 없었다면 아문센도 없었을 것이다.

 

잎을 떨군 강가의 자작나무는 앙상하지만 멀리 침엽수림은 생기로 가득했다.
잎을 떨군 강가의 자작나무는 앙상하지만 멀리 침엽수림은 생기로 가득했다.

 

#바이킹의 장례의식

Viking은 누구인가? 노르드어로 만(灣)을 뜻하는 ‘Vik’와 ‘~에서 온 사람’을 뜻하는 ‘ing’의 합성어로 ‘만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다. 구불구불 리아스식 해안 깊은 협만인 피오르에서 온 사람이라고 보면 되겠다. 서기 8~11세기는 바이킹 시대였다. 스칸디나비아에 살던 바이킹들에게 인구가 증가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일조량이 부족하고 척박하며 농지도 부족하여 식량부족으로 굶주림에 직면한 것이다.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들은 농지를 개간하여 씨앗을 뿌리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젊고 건장한 이들은 날렵하게 생긴 랑스킵(Langskip)을 타고 유럽의 내륙, 발트해, 북해, 대서양으로 뻗어 나갔다. 생존을 위해서 장사를 하고 물물교환을 하며 인신매매를 하고 약탈을 했다. 이들의 랑스킵은 너무 빨랐다.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 북서부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에 상륙했다. 바이킹은 뉴펀들랜드에 정착한 첫 백인들이었다. 영국, 아일랜드는 물론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노르망디공국은 노르만족의 지도자 ‘롤로’가 프랑스 샤를 3세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대가로 받은 땅이다.

내륙으로 볼가강을 따라 러시아의 모태(母胎)가 되는 키예프도 점령하고, 사람들을 잡아다가 콘스탄티노플에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멀리 이태리 남쪽 시칠리아 섬은 물론 지중해 동쪽으로 시리아 해안에도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이런 바바리안들이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을 건설했다. 이들이 유럽 최고 수준의 문화와 국력을 갖추면서 바이킹들의 ‘북유럽신화’는 오늘날 중요한 문화적 요소가 되고 있다.

 

불붙은 랑스킵은 바람을 타고 피안을 향해 갈 것이다.
불붙은 랑스킵은 바람을 타고 피안을 향해 갈 것이다.

 

바다 가까운 경작지에 있던 바이킹 분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발굴되었다. 오슬로의 빅도이(Bygdøy) 지역에 가면 ‘프람호 박물관’, ‘콘티키호 박물관’ 그리고 ‘바이킹 배 박물관’이 있다. 전시된 배 이름은 튜네(Tune), 고크스타(Gokstad), 오세베르(Oseberg)로, 발굴된 장소명을 붙였다. 바이킹 장례식은 신분, 지역, 관습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간단한 부장품과 함께 매장하지만 무덤에 배 모양으로 돌을 배치하기도 했다.

 

신분과 경제적 형편에 따라 이렇게 소박한 장례식도 있다.
신분과 경제적 형편에 따라 이렇게 소박한 장례식도 있다.

 

왕족이나 신분이 높은 귀족이 죽으면 마지막 가는 길에 필요한 양식, 무기, 장신구, 돈 등은 물론 노예나 시녀까지 순장(殉葬)하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배의 돛대 끝까지 진흙으로 모두 덮고 완만한 곡선의 커다란 분묘를 만들었다. 그 후 아스라한 세월이 흐르고 1천 년이 지나도록 이것이 바이킹 분묘인지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땅속에서 배의 파편이 나오자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3척의 배는 각각 크기와 보존된 상태가 다르지만 전형적인 바이킹 배였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사들은 랑스킵(Langskip) 위에 장작이나 불쏘시개를 쌓은 다음 그 위에 시신을 올려두고 바다로 떠나보냈다. 누군가 ‘떠나가는 배’를 향해 불화살을 쏘아 불이 붙으면 장례식의 분위기는 고조되기 시작한다. 샤먼(무당)들이 사설을 읊거나 춤을 추면서 장례 분위기는 절정에 이른다. 불붙은 장작이 시신을 태우는 동안 배는 흘러가고 나중에 결국 배도 타면서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죽은 전사의 영혼은 화염에 휩싸여 불 위로 너울너울 하늘로 올라가고, 불에 타고 남은 배의 잔재는 검푸른 북해 바다 저 멀리 흘러가다 무거운 것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이것은 사생결단 용감하고 의로운 전사들을 보내는 정중한 의례였으리라.

 

풍경은 바람과 빛이라는 실존적 현장감이다.
풍경은 바람과 빛이라는 실존적 현장감이다.

 

#모든 이별에는 애수가 담겨있다

2016년, 쿠바 혁명의 상징인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피델은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를 출발한 12인승 요트 ‘그란마(Granma)호’에  동생 라울, 체 게바라 등 총 82명의 게릴라 원정대를 태우고 12월 2일 쿠바에 도착했다. 이후 그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개시했고 1959년 혁명에 성공했다. 그란마호를 타고 와서 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쿠바 공산당의 기관지인 <그란마>의 명칭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노 혁명가 피델을 태우고 피안으로 떠날 요트 '그란마'호.
노 혁명가 피델을 태우고 피안으로 떠날 요트 '그란마'호.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치러진 피델의 장례식에서 요트 그란마호는 열띤 학생들과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행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늙은 혁명가 피델을 그란마호에 태워 저 멀리 피안으로 떠나보내려는 것일까? 모든 이별에는 애수가 담겨있다. 하물며 망자를 보내는 마지막 송별은 어떠하겠는가?

포르투갈의 국민가요인 파두(Fado)는 영어로 ‘Fate(운명)’이라고 한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파두가수(Fadista)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odrigues, 1920~1999)가 부른 <검은 돛배, Barco Negro>가 있었다.

오지 않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의 눈에 ‘검은 돛배’는 ‘간절히 원할 때 보이는 망상(望狀) 또는 환영(幻影)’이 아니었을까?

사람이 죽으면 남은 육신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은 거룩한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불교계의 고승들이나 선사들은 뜨거운 화장을 한다. 그리고 재 속에서 사리를 찾아내어 그들을 기리고 경배한다. 이런 화장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 반(反)불교적이다. 차라리 조로아스터교의 천장(天葬)이나 티베트의 조장(鳥葬)이 오히려 불교적이다. 오늘날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범선시대의 오랜 장례 전통은 정해진 의식을 행한 후에 <수장>을 했다.

내가 죽는다면 어떤 세리모니를 선택할까? 나는 지체 없이 수장을 선택하리라! 배를 타고 가다 수장되어, 물고기의 밥과 자양분이 되어 자연으로 산화되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을 때 한정된 나의 욕망일 뿐이다. 죽는 다음에는 어떤 세리모니든지 다 받아들일 것이다. 다만 자연에 폐를 덜 끼치고 사라지고 싶다. 가톨릭의 트라피스트(Trappist) 수도회는 바깥 출입을 금하는 완전 봉쇄된 무문관(無門關)에서 평생 침묵 중에 하루 일곱 번의 기도, 묵상, 노동이 전부인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침묵 중에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인사한다. 이 말은 이 수도사들의 평생을 사로잡는 화두(話頭)다. 우리 모두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인 쿤제랍패스(4,693m). 중간은 최근 외롭고 쓸쓸하게 저세상으로 떠난 히말라얀클럽 오인환 회장으로, 극락왕생하시길 빈다.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인 쿤제랍패스(4,693m). 중간은 최근 외롭고 쓸쓸하게 저세상으로 떠난 히말라얀클럽 오인환 회장으로, 극락왕생하시길 빈다.

 

#떠나가는 배

<떠나가는 배>라는 시의 제목이 다수 있다. <나두야 간다>라는 김수철 노래의 원제는 박용철시인의 <떠나가는 배>다. 정태춘이 곡과 가사를 쓰고 노래한 <떠나가는 배>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가곡으로 불리는 양중해 작사, 변훈 작곡인 <떠나가는 배>다. 이 노래에는 다소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의 사연이 있다. 시인 박목월(1915~1978)에 대한 일화다.

1953년, 목월은 대구 피난 시절 다니던 어느 교회에서 목사의 딸이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두 자매를 만났다. 문학소녀인 두 자매는 목월을 흠모하고 따랐다. 서울에 환도하고 대학은 문을 열었다. 언니가 체념하고 먼저 결혼했지만 동생의 가슴은 도저히 말려도 안 될 정도의 뜨거운 불길이 목월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사랑에 빠진 목월은 그녀와 만나고 밤거리를 걷는 횟수가 많아졌다. 39세로 5남매의 아버지인 목월은 자책감으로 괴로웠다. 목월은 어느 날 가까운 시인 Y에게 H양을 만나 자신을 단념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H양은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저는 다만 박 선생님을 사랑할 뿐, 이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얼굴을 감싸며 울었다고 한다. 어느 누가 이 거대한 힘과 불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함께 흘러가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해 여름이 가고 가을바람이 불어 왔을 때 서울에서 목월과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곳으로 도피했다. 한참 어린 자식들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할 때였지만 바람난 그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 자리마저 팽개치고 사라졌다.

목월은 제주 관덕정 아래 동화여관에 머물렀다. 교회에 나가고 가끔 시낭송회를 하기도 했다. 몸이 약한 소녀를 등에 업고 병원에도 갔다. 제주 제일중학교 국어교사인 양중해와 가끔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날개도 없는 소문이 바다 건너 육지까지 전해졌는지 목월의 부인 유익순이 제주도로 찾아왔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돈 봉투와 직접 지은 겨울 한복을 전해주고 “힘들지 않으냐? 잘 지내라!”는 간단한 안부만 묻고 떠났다. 시인의 부인은 시인보다 위대했다! H양은 “사모님”이란 말을 토해내며 오열했다고 한다. 흥진비래라는 말을 여기에 사용할 수 있을까? 얼마 후 목사인 그녀의 아버지가 찾아와 이틀 밤낮을 어르고 달래며 설득해 결국 그녀는 부산행 연락선에 올랐다. 목월과 양중해와 여관집 아들은 떠나가는 배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넓은 피오르 해변. 생선을 말리는 건조대들이 을씨년스럽다.
제법 넓은 피오르 해변. 생선을 말리는 건조대들이 을씨년스럽다.

 

목월은 <이별의 노래>를, 양중해는 <떠나가는 배>라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두 시는 유명한 가곡이 되어 지금도 이별의 애달픔을 노래하고 있다. 목월은 가난했지만 다섯 자녀를 둔 다정한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버지, 사랑은 사랑이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한 소녀를 사랑했던 목월은 진정한 시인이었다. 목월은 죽기 전 마지막을 예상하듯 담담하게 그 여인을 만났다. ‘이승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다시 만나 보려던 젊은 날의 그 결심’을 이룬 극적인 해후 뒤 1978년 봄날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지금 나이로 치면 너무 이른 63세 요절이었다. 그 여인은 지금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시인이라지만 알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불현듯 궁금하기도 하다.

 

#모험과 도전정신이 필요한 시대의 교훈

우리가 유럽문화를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성경>과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이해해야 한다. 풍요롭고 따뜻한 지중해 연안의 남부 유럽에서 탄생한 그리스로마 신화는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아름답고 이성적인 내용으로 ‘북유럽 신화’와 아주 대조적이다.  

지나온 핀란드는 북유럽이지만 ‘핀란드 신화’는 ‘북유럽 신화’와 별개라고 한다. 신화가 무엇일까? 각 민족의 신화는 그 민족의 정신세계의 바탕이고 감성과 상상력의 원천이다. 북유럽 신화는 우리에게 낯설지만, 요일에 그 흔적이 있다. 화요일은 ‘전쟁의 신(Tyr)’의 날로, ‘the day of Tyr’는 Tuesday가 된다. 수요일은 ‘폭풍의 신(Wodin)’의 날로, ‘the day of Wodin’은 Wednesday가 된다. 목요일은 ‘천둥의 신(Thor)’의 날로, ‘the day of Thor’은 Thursday가 된다. 금요일은 ‘사랑의 신(Friya)’의 날로, ‘the day of Friya’는 Friday가 된다. 북구신화의 티르(Tyr, 전쟁의 신), 오딘(Wodin, 폭풍의 신), 토르(Thor, 벼락의 신), 프리야(Friya, 사랑의 신)가 등장한다.  

 

모처럼 만난 마을. 평화가 가득해 보였다.
모처럼 만난 마을. 평화가 가득해 보였다.

 

북유럽의 거칠고 척박한 자연환경에 맞서서인지 북구의 신들도 거칠고 조악하며 사납다. 바이킹들은 당장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거친 자연환경에 맞서서 생존하려면 독하고 강하며 잔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늘 절박했으므로 모험심이 강하고 도전적이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아야 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의 덩치가 큰 해양 전사(바이킹)들은 이런 조건에 최적화된 사람들이었다.

평화롭고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사는 오늘의 인간들에게 거칠고 험난한 환경 속에 죽음과 싸우며 살아간 해양 전사 ‘바이킹’의 신화는 더 절실한 모랄(Moral, 교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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