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삼백리길 8코스

 

대체로 둘레길엔 숙명처럼 도로 일부가 포함되기 마련이다. 지난달 걸은 9코스(천년불심길)는 조계산(888m)을 사이에 둔 선암사~송광사 길이어서 용케 땡볕을 피했지만 나머지 길들에겐 그런 행운이 없어 보였다. 아예 자전거 코스로 작정하고 만든 11코스(호반벚꽃길) 45km를 제하고도 남은 구간은 열. 거의 초행이지만 가보지 않아도 이글대는 태양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글 사진 · 황소영 기자

 

2013년에 이어 10년 만에 다시 열리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순천만정원은 매년 풍성해지고 있다.
2013년에 이어 10년 만에 다시 열리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순천만정원은 매년 풍성해지고 있다.


순천시 홈페이지엔 남도삼백리길 전도가 없다. 구간별로 나와 있긴 한데 단순한 개념도에다 확대도 안 된다. 순천시민도 200여km에 달하는 이 길을 한눈에 이해하기 어렵다. 관광과 공무원도 마찬가지. “담당자가 자리에 없어서” “제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친절하게 응대는 하지만 정확히 모르는 사람끼리 묻고 답하기를 해봤자 결과는 뻔하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남도삼백리길

지난달 소개한 것처럼 남도삼백리길은 1코스 순천만갈대길(16km)을 시작으로 각각 꽃산너머동화사길(20km), 읍성가는길(14km), 오치오재길(20km), 매화향길(25km), 십재팔경길(15km), 과거관문길(19km), 동천길(12km), 천년불심길(12km), 이순신백의종군길(25km), 호반벚꽃길(45km)로 나뉘는데, 마지막 호반벚꽃길은 상사호를 순환하는 자전거 코스고, 10코스 백의종군길은 기존 구간과 일부 중복이 되는 듯하다.

1코스부터 5코스는 ‘남도문화길’에 속하고 6코스부터 8코스, 또 10코스는 ‘한양옛길’이다. 마지막 ‘생태치유길’은 두 코스로 이미 소개한 선암사~송광사 길과 45km의 자전거 길이니 더이상 걸을 일은 없다. 이 두 코스는 외톨이처럼 다른 길들과 떨어졌다. 아, 4코스(오치오재길)가 조계산 송광굴목재에서 9코스와 잠깐 만나긴 한다. 결론은 1코스부터 5코스가 하나로 쭉 이어졌고, 6코스부터 8코스가 연이어졌다. 5코스와 6코스 사이를 잇는 길은 없다. 한마디로 원점에서 출발해 원점으로 돌아오는 환형은 아니란 뜻이다.

둘레길이 평지만 있는 게 아니어서 사실 장거리를 하루에 걷기란 쉽지 않다. 해가 긴 여름은 더워서 힘들고, 덥지 않은 계절엔 해가 짧아서 힘들다. 삼백리길 (자전거길 제외) 절반은 코스당 거리가 20여km이다. 10개 코스 평균도 18km에 달한다. 조계산 천년불심길을 걸을 때만 해도 이 길에 큰 욕심이 없었다. 길고 멀어서다. 그런데 두 번을 걷고 보니 욕심이 생긴다. 한번 다 걸어볼까? 무작정 걸으면 간단하지만 거리와 날씨, 또 낮의 길이와 난이도를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죽도봉공원에서 내려다본 동천 일대. 동천은 봄에 가장 예쁘다. 넓은 물가 좌우가 모두 벚나무다. 이 사진은 지난 3월 하순에 촬영했다.
죽도봉공원에서 내려다본 동천 일대. 동천은 봄에 가장 예쁘다. 넓은 물가 좌우가 모두 벚나무다. 이 사진은 지난 3월 하순에 촬영했다.

 

먹거리 볼거리 가득, 문화의 거리

조계산 산행 경험이 있어 천년불심길은 걱정이 덜했지만 동천길은 사정이 달랐다. 출발지인 ‘서문성곽터’가 정확히 어디인지 몰랐고, 안다 해도 그 다음 목적지까지 이정표가 잘 되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종점인 순천만 습지도 마찬가지였다. 갈대밭은 가봤지만 삼백리길 이정표가 주차장에 있는지, 매표소 앞에 있는지, 아니면 일단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담당 공무원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2019년까진 이정표가 있었지만 이듬해 도로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다며, 그이도 다른 이가 올려놓은 블로그를 보고 설명하는 처지였다. 나 역시 검색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딱히 없었다. “사거리에서 서문안내소를 오른쪽에 두고 옥천 쪽으로 가야 하는데요.” 노고단의 중계탑이 빤히 보이는데도 노고단을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상대방은 열심히 설명했지만 나는 도통 그 옥천이 어디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직접 가서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은 이미 ‘진주에나길’에서도 할 만큼 하지 않았던가.

 

동천길 출발점인 서문터. 발로 옆에 서문안내소가 있다.
동천길 출발점인 서문터. 발로 옆에 서문안내소가 있다.

 

안내도에 적힌 ‘서문성곽터’는 내비게이션에 없다. ‘문화의 거리’에 있는 서문안내소가 기점이다. 조선시대 순천부읍성의 서문이었던 이곳은 순천향교와 공마당으로 갈라지는 금곡사거리, 그러나 골목에 가까운 좁은 도로다. 1872년 작성된 순천부지도에 따르면 고을 수령의 집무와 생활이 이루어졌던 장소다. 낙안읍성과는 달리 현재 읍성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질 않다. 일제의 시가지 정비로 성벽이 헐렸고, 조선 왕조의 행정기관 건물들도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바뀌거나 다시 지어졌기 때문이란다.

새로 깐 도로는 깔끔했지만 그 바람에 남도삼백리길 이정표는 뽑혀 사라졌다. 서문안내소를 등지고 오른쪽 ‘옥이네팥죽’ ‘수생당한의원’ 쪽으로 5분쯤 걸어가면 옥천(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도 좋고, 건너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옥천, 그리고 동천은 10여 개의 다리로 연결돼 언제든 오갈 수 있기 때문인데, 정석대로라면 동천을 왼쪽에 두어야 하니 다리를 건너 내려서는 게 좋긴 하다.

 

구간 출발점인 서문 일대는 골목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구간 출발점인 서문 일대는 골목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코로나19로 잠시 끊겼지만 매년 9월, 문화의 거리와 중앙시장 일대에선 푸드앤아트페스티벌이 열린다.
코로나19로 잠시 끊겼지만 매년 9월, 문화의 거리와 중앙시장 일대에선 푸드앤아트페스티벌이 열린다.

 

8코스는 문화의 거리에서 시작해 ‘옥리단길’을 지난다. 예쁜 카페와 맛있는 식당, 각종 수공예 전문점들이 밀집돼 (동천길 코스와 상관없이) 골목 사이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코로나19로 잠시 끊겼지만 9월이면 푸드앤아트페스티벌이 열리고, 늦가을엔 거리 일대가 샛노란 은행나무로 장관을 이룬다. 마음 같아선 아무 곳이나 들어가 점심을 먹고픈데 일부 식당은 대기하는 손님들이 문 앞까지 서 있어 엄두가 나질 않는다. 다리를 건너 옥천변으로 내려온다. ‘호남사거리 150m’ ‘동천 1.2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있다. 삼백리길 이정표는 아니지만 동천을 향해 걷는다. 옥천의 작은 물줄기는 동천을 만나면서 한껏 수량을 불리고 있었다.     

 

동천 너머로 보이는 풍경. 다리로 이어져서 오갈 수 있다.
동천 너머로 보이는 풍경. 다리로 이어져서 오갈 수 있다.

 

굵고 짧게, 태양 아래 동천길

옥천 일대가 아기자기 골목길 여행의 최적지라면 동천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로 활기찼다. 여름에도 덥지 않게 중간중간 터널 같은 보행로가 있었다. 벽 한쪽엔 사진과 그림 등 예술작품이 걸렸고, 나머지 벽은 난간처럼 뚫려 바람과 풍경을 실어다 주었다.

동천은 봄에 가장 예쁘다. 넓은 물가 좌우가 모두 벚나무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3월 중순부터 만개한 하순, 꽃눈이 내리는 4월 초순까지 꽃과 시민들로 화사하다.

여름 동천길은 매력이 없다. 사계절 꽃이 피는 순천만정원이 있지만 둘레길을 걷는 이에겐 철책 너머의 공간일 뿐이다. 그저 삼백리길 대부분이 도로를 끼고 있으니 그나마 짧은 동천길이 낫겠다 싶었을 뿐. 내내 평지여서 쉴 일이 별로 없고, 쉴 일이 없으니 3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여름에 걷기 좋은 길은 절대 아니었지만 둘레길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차라리 짧고 굵게 빨리 걷고 마치자!

 

여름에는 초록색 바다를 이루는 순천만 갈대밭.
여름에는 초록색 바다를 이루는 순천만 갈대밭.

 

동천엔 그늘이 되어주는 공간이 있어 여름에도 부담이 덜하다.
동천엔 그늘이 되어주는 공간이 있어 여름에도 부담이 덜하다.

 

알록달록 타일을 덧댄 듯한 다리가 보인다. 어린이들의 그림으로 장식된 ‘꿈의 다리’로 순천만정원의 동문과 서문 지구를 잇는 다리다. 소형궤도차 스카이큐브도 보인다. 이제 동천길은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저 큐브 레일과 함께 가는 셈이다.

구간 후반부로 들어서면 나무보다 물억새 혹은 갈대가 더 많다. 볕은 이글이글 뜨겁게 내리쬐었고 머릿속에선 팥빙수나 아이스커피, 심지어 직접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 식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보행 전용 이사천 현수교를 건너 문학관 쪽으로 들어선다.

 

순천 출신인 동화작가 정채봉.
순천 출신인 동화작가 정채봉.

 

순천문학관은 이 지역 출신 작가 정채봉과 김승옥 기념관으로 구성됐는데, 김승옥의 저 유명한 단편 <무진기행>은 지금의 순천만 대대포구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순천만정원에서 출발한 스카이큐브는 문학관역에서 정차한다. 문학관역과 습지를 오가는 갈대열차도 있다. 아, 나도 타고 싶다.

 

문학관역과 순천만을 오가는 갈대열차.
문학관역과 순천만을 오가는 갈대열차.

 

길옆에 간이 건물과 “입장권 제시”를 바란다는 안내판이 있지만 매표소 직원은 별 반응이 없다. 매표를 강요하면 “문화의 거리부터 동천 따라 10km 이상을 걸어왔어요. 갈대밭은 안 갈 거고요.” 힘든 표정으로 사정을 해볼 참이었다. 이제 구간 종점은 코앞이다.

삼백리길 이정표는 갈대밭으로 넘어가는 다리, 선착장 앞에 있었다. 1코스(순천만갈대길) 이정표지 내가 걸어온 8코스 방향은 어디에도 없었다. 매표소 앞에 있나 하고 주차장까지 나오지만 없다. 습지 쪽에서 시작하려면 일단 매표를 하고 들어와야 한다. 이정표 확인만 아니었다면 갈대열차를 타고 문학관역까지 돌아간 다음 스카이큐브에 몸을 싣고 순천만정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버스 요금보단 비싸지만 걷는 내내 머리 위를 오가는 저 편한 궤도차가 어찌나 부럽던지…. 결국 순천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40분 뒤에나 탈 수 있었다. 출발 전부터 코스로 속앓이를 해서인지, 아니면 한낮 햇살을 혼자 다 쬐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의외로 비싼 아이스커피 때문인지, 생각보다 기운 빠진 걷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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