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자전거 순례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김기림, <세계의 아침> 중

글 사진 · 김규만(굿모닝한의원 원장)

 

사진으로 바람은 보이지 않으니 일견 평화로운 듯한 풍광이다.
사진으로 바람은 보이지 않으니 일견 평화로운 듯한 풍광이다.

 

#노르웨이 국경에서 야영

오늘은 사색이 길었다. Karigasniemi는 핀란드의 국경도시로 국경의 다리를 넘으면 노르웨이 Darvunjarga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단조로운 듯 다양하고, 다양한 듯 단조로운 지형을 벗 삼아 달렸다. 200km를 훨씬 더 넘게 달렸다. 너무 앞서간 나를 데리러 차가 와서 오늘의 야영지인 국경 부근으로 다시 돌아갔다. 국경은 묘한 설레임과 기대감과 그리움이 차오르는 곳이다.  

우리는 텐트를 치고 취사준비를 했다. 물은 화개장터처럼 세 갈래로 흐르고 있었다. 물살이 세서 설거지할 때 주의를 해야 했다. 하루 종일 젖산에 쩐 다리 근육을 찬물에 식히기 위해 흘러가는 물속에 다리를 담그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란 생각을 했다. 이곳은 큰 야영장이 아닌 텐트 두세 개를 칠 정도로 아담한 곳이었다. 도로에서 가깝고 은폐, 엄폐가 잘 되어 마음에 들었다. 핀란드 넘어 노르웨이 국경 부근의 야영장이다.

야영하려면 모닥불이 필요했다. 나무꾼이 되어 나무를 하러 갔지만 오래된 야영터 주위에는 나무가 씨가 마른 것처럼 귀했다. 누군가 잘라 놓은, 캠프파이어를 할 정도의 커다란 참나무를 구해 끌고 왔다.

 

#참나무 가라사대 “밤나무야 제발 참아라!”

6~7월이 오면 민망한 냄새를 진동하는 참나무과의 밤나무 꽃만 천지를 진동하며 여심을 뒤흔들어 놓고 있어 주위 참나무들로부터 제발 참으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밤나무는 암수한그루이고 정액(Sperm)과 비슷한 색의 꽃을 피우고, 스펌(Sperm) 냄새를 풍긴다. 밤꽃에 정액에 든 스퍼민(Spermine)과 스퍼미딘(spermidine)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밤꽃이 필 때 산에 가면 남성들 또한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어쩌랴! 이 천지에 수컷 냄새가 진동해도 되바라진 나무를 베어내고 곤장을 치며 풍기문란죄를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거늘~! 만물이 성장한 계절의 진하고 농염한 풍경이다.

참나무는 단일 명칭이 아니고 ‘상수리, 도토리가 열리는 다양한 나무들을 포괄’한 이름이다. 앞에서 5월 찔레꽃 가뭄을 얘기했다. 옛말에 ‘들에 풍년이 들면 산은 흉년이 들고, 산에 풍년이 들면 들은 흉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올해처럼 찔레꽃 가뭄이 심하면 가을 산엔 도토리 풍년이 올 것이라고 한다.  

참나무과(科)인 나무를 통상 참나무라고 부르는데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밤나무 등이 있다. 참나무(oak)는 켈트어로 케르쿠스(Quercus, 좋은 나무)라고 하는데 우리 ‘참’ 나무 이름과 일맥상통한다. 참나무는 추종자들도 많아 6백여 종이나 된다. 예로부터 쓰임새가 다양하고 우리 삶에 매우 친숙하며, 버릴 것이 없는 진짜 나무가 참나무다. 참나무는 무늬가 아름답고 단단하여 고급가구를 비롯한 건축재로 애용했고, 오크통, 철도갱목, 배 등을 만들었다. 자투리로 농기구, 말뚝, 장작, 숯을 만들었다. 굴참나무 껍질은 굴피집, 코르크 마개를 만들었다.  

 

랑스킵(Langskip)은 클링커 이음이고 프람(Fram)호는 크라벨 이음이다. 클링커 이음은 직진성이 뛰어나고 속도가 빠르다.
랑스킵(Langskip)은 클링커 이음이고 프람(Fram)호는 크라벨 이음이다. 클링커 이음은 직진성이 뛰어나고 속도가 빠르다.

 

왕의 묘지로 수장된 랑스킵. 발굴된 장소이름을 붙여 '오세베르그'호 라고 부른다.
왕의 묘지로 수장된 랑스킵. 발굴된 장소이름을 붙여 '오세베르그'호 라고 부른다.

 

#바이킹의 배, 랑스킵에 특화된 참나무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은 8~11세기 유럽 일대에서 약탈과 교역과 전쟁을 일삼으며 무법자처럼 지낸 바바리안들이었다. 이들은 내륙에서 강을 타고 이동하는 내륙파, 바다를 누비는 해양파가 있었다. 날렵한 북유럽 바이킹의 배는 나무질이 단단하고 변형이 안 되며, 질기고 썩지 않으며, 물에 강한 오크로 만들었다. 이들은 배에 쓸 참나무 숲을 관리하고 가꾸었다. 바이킹 배는 가볍고 안전하며 기동성이 탁월했다.

유럽을 침공한 몽골기병은 5~10마리의 말을 거느리고 3일 만에 280km를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이킹은 랑스킵(Langskip, longship)을 타고 평속 5~10노트(시속 9km), 최대 속력은 15노트(시속 28km)로 달렸다. 1893년 바이킹의 랑스킵은 28일 만에 대서양을 횡단해 하루 평균 185km를 항해해 사상 최고의 기동력을 실증한 적이 있다. Langskip에서‘lang’은 ‘long’이고, ‘skip’은 ‘ship’으로 ‘긴 배’라는 뜻이다. 

길이가 긴 랑스킵은 주로 전투, 원정에 사용되고 배의 규모는 100피트 길이, 25피트 넓이에 50개의 노가 있었다. 무장한 병사 200명을 태우고 항해를 한다. 짧고 넓으며 깊은 크나르(Knarr)는 다소 느리지만 많은 승객과 화물(최대 20t)을 실을 수 있었다.  

 

현대에 재현된 랑스킵의 날렵한 모습. 선수장과 속도는 비례한다.
현대에 재현된 랑스킵의 날렵한 모습. 선수장과 속도는 비례한다.

 

‘랑스킵’은 날렵한 유선형의 길쭉한 배로, 용골 좌우로 참나무 판재 여러 개를 가로로 길게 약간씩 겹치게 이은 형태(Clinker 이음)라서 턱 홈을 따라 물을 가르므로 좌우 흔들림이 적고 직진성이 뛰어나며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중간에 10m 전후의 돛대가 있어 양모로 짠 사각 돛이 바람을 받으며 갈 수 있고, 필요시 양쪽에서 노를 저으며 갈 수도 있다. 방향전환은 측면 방향타와 좌우측 노의 강약으로 변경했다. 선수와 선미가 대칭이라 배를 돌리지 않고도 먹튀(Hit and Run)가 쉬웠다. 좌우측 중 한쪽은 전진, 한쪽은 후진을 하면 어렵지 않게 360도로 제자리 회전을 할 수 있어 갑자기 나타난 빙산이나 다른 배를 피하고 공격하기 쉬웠다. 용골이 있지만 가볍고 평평해서 수심 1m의 얕은 물에서도 항해할 수 있고, 수심이 더 낮으면 배를 어깨에 메고 갈 수 있어 동분서주하면서 약탈과 살인과 절도를 일삼으며 야만의 역사를 썼다.

해적의 대명사인 바이킹은 뿔투구를 쓰고 거대한 양날 도끼를 든 잔인하고 야만적인 마초(Macho)에 바바리안(Barbarian) 이미지가 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탁월한 항해가, 탐험가, 상인, 문화전파자기도 했다. 그들은 처음엔 일장석(Sunstone)으로 나중엔 물에 띄운 나침반을 보며 경이로운 항해술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캐나다 동부의 뉴펀들랜드까지 진출하여 ‘빈란드’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그들은 너무 춥고 황량해서 아메리카 정착을 단념하고 철수한 후에도 다시 방문했는데 배를 만들기 적합한 참나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해 뜨는 아침과 해지는 저녁은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롭다.
해 뜨는 아침과 해지는 저녁은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롭다.

 

난센의 호리호리한 큰 키에 명민한 용모.
난센의 호리호리한 큰 키에 명민한 용모.

 

#프리드쇼프 난센의 단단한 범선 ‘프람호’

1888년, 난센(1861~1830)은 다섯 명의 탐험대를 이끌고 스키를 타고 그린란드를 횡단했다. 난센은 북극해 얼음이 시베리아에서 스피츠베르겐 쪽으로 표류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시베리아 동부까지 배를 타고 간 후, 얼음과 함께 해류를 타면 북극점을 가로지를 수 있을 거라 믿고 거기에 맞춰 설계해 만든 배가 ‘프람호’다. 노르웨이어로 ‘프람(Fram)’ 이란 Forward(앞으로)라고 한다.

 

얼음과 함께 표류하기 전의 프람호는 바이킹의 롱쉽(Longship)과 대조적으로 뚱뚱하고 선수장도 짧아 속도는 속 터질 정도로 느릴 것 같다.
얼음과 함께 표류하기 전의 프람호는 바이킹의 롱쉽(Longship)과 대조적으로 뚱뚱하고 선수장도 짧아 속도는 속 터질 정도로 느릴 것 같다.

 

1892년에 북극 탐험용으로 건조된 프람호는 배의 선수와 선미는 날렵하지만 선수장(길이)은 짧고 측면이 둥글고 볼록해서 얼음덩어리가 잘 붙지 않고, 얼음에 갇혀 옥죄어도 배 측면이 부서지지 않고 위로 쑥 떠오르게 설계됐다. 동력은 증기기관과 돛을 겸하고, 키와 프로펠러는 얼어붙지 않게 배 안으로 들어 올릴 수 있게 했다. 이 유례없는 튼튼한 배도 주요 구조물인 용골과 키, 돛대 등은 노르웨이산 Oak(참나무)로 만들었다. 배의 겉 표면은 충돌을 대비하여 전나무와 소나무를 얇게 다섯 겹 겹치고 외부는 철판으로 둘렀다.

1893년, 난센의 북극탐험원정대 13인은 프람호를 타고 장도에 올랐다. 표류시간을 감안하여 6년 치 식량과 8년 치 연료를 실었으며, 시베리안 허스키 50여 마리도 실었다. 그리고 오랜 선상 생활에 맞게 개개인의 선실을 배정하고 도서관을 만들어 수천 권의 책도 실었다. 프람호는 예상대로 얼음과 빙산 속에서 잘 적응했지만 이동 속도가 느려 1년 반이 지난 후 북극점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북위 84°에서 난센과 동료 요한센(Johansen)은 카누 썰매에 짐을 싣고 개들과 함께 프람호에서 내렸다. 난센은 북극점까지 남은 거리인 660km를 개썰매로 도달한 후 프람호로 복귀하지 않고 노르웨이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난센의 북극점 원정 당시 이동 루트.
난센의 북극점 원정 당시 이동 루트.

 

프람호 박물관-스칸디나비아의 건축물은 이런 삼각형 지붕으로 아무리 눈이 내려도 쌓이지 않겠다.
프람호 박물관-스칸디나비아의 건축물은 이런 삼각형 지붕으로 아무리 눈이 내려도 쌓이지 않겠다.

 

그러나 영하 50도의 추위, 식량부족, 장비부족 등으로 1895년 4월 인류 최초로 북위 86° 14'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두 사람은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물개, 바다코끼리, 북극곰 등을 사냥해 연명하고, 심지어 썰매를 끌던 개까지 잡아먹는 극한 상황을 맞으면서 남쪽 프란츠 죠지프섬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드제크소나 섬에 도착해 머물다가 영국탐험대를 만났다. 난센은 자신들을 구해준 탐험대장의 이름을 붙여 ‘프레더릭 잭슨 섬’으로 명명하고 그들 도움을 받아 돌아왔다. 이후 프람호도 무사히 돌아오면서 그들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아침이나 점심을 먹은 후에 이런 그룹 라이딩이 가끔 포착된다.
아침이나 점심을 먹은 후에 이런 그룹 라이딩이 가끔 포착된다.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유일하게 반겨주는 것이 이정표다. 아직은 핀란드다.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유일하게 반겨주는 것이 이정표다. 아직은 핀란드다.

 

#난민구호활동가와 탐험의 아버지 난센

북극에서 돌아온 뒤에 오슬로 대학에서 동물학교수로, 나중에 국제해양연구소 소장이 되어 연구에 몰두했다.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분리·독립한 조국 노르웨이 건국 관련 일을 하고 1906년에는 영국공사로 부임했다.

난센은 이후 프람호를 아문센에게 물려주고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다. 아문센과 탐험대원들은 난센의 실사구시적인 극지 탐험의 경험과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1910년 아문센의 원정대는 프람호를 타고 남극으로 향했다. 굶주림과 위기상황에는 개라도 잡아먹고 생존해 돌아와야 한다는 노하우를 아문센이 난센에게서 전수받은 것인지 이누이트 원주민들에게 전수받았는지 궁금하다.

제1차 대전(1914~1918) 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난센여권’을 발행하여 포로송환과 난민구제·기근구제 등에 힘썼다. 1920년, 국제연맹의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된 난센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포로 약 50만 명을 송환했다. 192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상금은 구호단체에 기부했다. 그의 정신을 기려 매년 ‘UN 난센 난민상’을 수여하고 있다.

난센의 탐험정신은 탐험가로 출발하여 과학자, 정치가, 외교관, 국제 난민구호활동가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이렇게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적인 삶을 산 탐험의 아버지가 난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카누 썰매는 허영호, 최종렬, 박영석, 홍성택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극지방탐험대 썰매의 전형이었다.

 

소년 빨치산 출신 경제학자 박현채(1934~1995)
소년 빨치산 출신 경제학자 박현채(1934~1995)
태안사가 낳은 '국토'의 시인 조태일(1941~1999)
태안사가 낳은 '국토'의 시인 조태일(1941~1999)

 

#태백산맥

‘창작과 비평사’의 창비시선집 2권인 <국토>의 시인 조태일은 곡성의 유서 깊은 절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이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의 작가 조정래는 승주군 선암사 대처승 아들로 태어났다. 이 두 조씨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문인이 되어 일반 글쟁이들과는 급이 다르다. 조태일의 호는 그가 태어난 곡성 죽곡(竹谷)면의 죽(竹)과 사사(師事)한 김현승 시인의 호 다형(茶兄, ‘플라타너스’의 시인)의 형(兄)을 따서 ‘죽형(竹兄)’이라고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순전히 나만의 상상이다.

오래됐지만 고즈넉하고 조용한 태안사와 유서 깊고 아름다우며 사람이 많은 부자 절집 선암사는 차원이 다르다. 두 조씨의 인생도 그렇다. 둘 다 광주서중을 졸업했지만 조태일(1941~1999)은 광주고, 조정래(1943~)는 보성고로 진학했다. 부처님의 가피에도 불구하고 조태일은 술과 담배가 지나쳐서인지 간암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조정래는 ‘황홀한 글 감옥(!)’ 운운하며 아직도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소속사 매니저는 부인인 시인 김초혜다.€1천 3백만 부 이상이 팔린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남들은 하나도 갖기 어려운 문학관을 세 개나 가졌다. 그가 받은 인세는 엄청나겠지만 언급 하지 않겠다. 소설 제목이 <태백산맥>이지만 주 배경은€지리산이다. 작가는 ‘태백산맥은 민족의 등뼈로, 끊겨진 등뼈를 다시 잇는다는 심정’으로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

한국의 발자크라는 나림 이병주의 <지리산>이 빨치산 출신 작가 ‘이태’의 도움을 받아 활력을 얻었다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민족경제론’과 ‘DJ 대중경제론’의 틀을 만든 ‘박현채(1934~1995)’라는 출중하지만 알려지지 않는 경제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박현채는 조정래의 광주서중 선배였다. 그는 1950년에 입산한 차돌같은 소년 빨치산으로 문화부 중대장을 하다가 1952년 체포당했다. 휴전 후 1954년 전주고에 편입하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없었다면 <태백산맥>은 ‘김빠진 맥주’, ‘귀 빼고 × 뺀 당나귀’가 될 뻔했다. 아~ 명민한 박현채. 아~ 태백산맥! 그는 평생 조정래로부터 공짜 밥과 술을 대접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뭣이 급했는지 <태백산맥>을 두고 훠이훠이 떠났다. 뇌졸중으로 요절한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시대 상황은 이랬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명령을 받은 후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명분과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의 기치를 내걸고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 과정 중 무고한 민간인이 많이 죽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그 유명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강력한 반공 정권을 구축했다.

<태백산맥>은 ‘여순반란 사건’이 실패하자 지리산으로 올라가 빨치산 투쟁을 펼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까지의 전라남도 벌교와 지리산 일대가 배경이다. 시간적으로는 4~5년간 치열한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을 집중 조명하면서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친일과 반일, 빈부격차, 토지문제(농지개혁) 등을 다루고 있다.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절박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좌익 빨치산 계열, 중도적 또는 양심적 민족주의 계열이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며,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사건은 전개된다.€이러한 타협과 갈등과 투쟁의 이면에는 남북 분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투쟁하고 싸우며 실패하고 좌절하며 못다 이룬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지만 많은 이들이 죽고 떠났다.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지켜냈던 영혼을 뒤흔들었던 뜨거운 신념은 늙고 병든 비전향 장기수로 남아 저세상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은 그들의 이루어지지 못한 눈물겨운 옛사랑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나리 호수에서 관광객을 기다리는 수상비행기.
이나리 호수에서 관광객을 기다리는 수상비행기.

 

시속 30km으로 달릴 때 바람저항이 80%고 전진하는 추진력은 20%다.
시속 30km으로 달릴 때 바람저항이 80%고 전진하는 추진력은 20%다.

 

#뜨거운 빨치산에게도 불은 필요했다!

그들은 대부분 민가에 가서 양식을 조달하는 것을 ‘보급투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빈번해지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므로 외면당하지만, 굶고 살 수는 없으니 약탈이 이루어진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지 않으려면 끓임 없이 투쟁해야 했다. 그들에게 만물이 침장(沈藏)하는 겨울이 가장 힘들었다.

‘싸리나무’는 병역필한 남자는 모두 아는 나무다. 겨울마다 눈이 쌓인 막사나 도로, 연병장을 싸리나무 빗자루로 쓸었다. 월동준비를 할 때도 싸리나무가 요긴했다. 쭉쭉 뻗은 가는 가지로 울타리와 사립문, 빗자루, 삼태기, 바구니, 광주리, 소쿠리 등도 만들었다. 야외에서 젓가락이 없을 때 안심하고 꺾어 쓸 수 있는 안성맞춤 나무다.

싸리나무[胡之子]는 잎과 꽃대를 끓는 물에 데쳐 나물로 먹거나, 열매를 가루 내어 떡, 국수, 수제비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여름이 지날 때쯤 피기 시작한 꽃은 서리가 내리기 직전까지 60~100일쯤 지속되어 ‘싸리꿀’을 따는 양봉업자들이 아주 좋아하는 나무다. 싸리는 콩과식물로 뿌리혹박테리아가 있어 건조하고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만들면서 잘 자라서 60년대 초 사방공사에 많이 심었다. 싸리나무는 ‘보병의 나무’다. 군 시절, 보병의 야전수칙에 ‘불을 피우되 연기가 안 나게 피워야 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싸리나무는 연기가 적게 나고 불에 잘 탄다. 비 오는 날에도 불이 잘 붙어 보병 빨치산들의 사랑을 받았다.

 

'땡중나무' 라고도 하는 때죽나무(Snowbell). 주렁주렁 달린 꽃과 열매 모두 아래로 향하고 있다.
'땡중나무' 라고도 하는 때죽나무(Snowbell). 주렁주렁 달린 꽃과 열매 모두 아래로 향하고 있다.

 

붉나무(오배자 나무) 잎줄기에 화살깃이 있다. 가을이면 가장 붉어진다는  붉나무의 소금열매로 빨치산들은 동치미나 김장을 담갔다.
붉나무(오배자 나무) 잎줄기에 화살깃이 있다. 가을이면 가장 붉어진다는 붉나무의 소금열매로 빨치산들은 동치미나 김장을 담갔다.

 

‘청미래덩굴’은 경상도에서는 ‘망개나무’, 전라도에서는 ‘명감나무’로 부르며, 의령망개떡이 유명하다. 망개의 뿌리는 선유량(우여량) 또는 토복령이라 한다. 녹말이 많아 빨치산들의 주요 식량자원이었다. 맹감열매도 먹을 수 있지만 허기가 진다.

‘조릿대[산죽]’는 조리질을 하는 조리를 만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리산에는 키 작은 대나무류인 산죽 또는 조릿대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조릿대는 한 겨울에 바닥 잠자리로 깔기 위해서 사용했다. 불에 태워도 연기가 안 난다. 조릿대를 잘라 잘 엮으면 지붕이 되고, 바람벽이 되며, 작게 만들면 비옷이 되고 겨울엔 방한용 깔개 이불이 되기도 한다.

‘때죽나무’는 열매가 땡중(黨聚-무리‘당’, 모일‘취’)의 머리를 닮아 땡중나무, 열매를 찧어서 물에 뿌리면 물고기가 떼죽음 당해 떼죽나무, 열매 속에 든 에고사포닌(Soap의 유래)으로 떼를 죽이는 빨래를 해서 떼죽나무다. ‘붉나무’는 이질과 설사 등에 끓여먹고 소금을 제공해 주며 연기가 안 나는 나무다. 가을에 붉나무 소금을 모아 복잡한 양념이 안 들어가는 무와 배추로 백김치를 담았다. 연기가 나는 나무는 빨치산에게 무용지물이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냄새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북쪽에서도 외면당한 빨치산

소년 빨치산 박현채에 의하면 “여기 세석평전에서 경남도당이 몰살을 당해부렀어야. 밑에서는 포위한 군경들이 밀고 올라오고, 우에서는 비행기가 네이팜탄을 퍼부서 대는디 워쩔 수가 있었겄냐. 시체들이 늘핀허니 여그럴 다 덮어부렀제. 여그서 지천으로 피는 철쭉은 그냥 철쭉이 아닌 것이여”라 했다. 세석척촉이 유난히 붉은 것은 피를 먹고 피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가 오영세에 의하면 “세석평전에 철쭉이 만발할 무렵에 기쁜 소식과 암울한 소식이 동시에 들려왔다. 기쁜 소식은 곧 휴전이 될 것 같다는 것이고, 암울한 소식은 유엔군이 제안한 빨치산의 북송에 대해서 북한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휴전이 성립되면 당연히 북으로 돌아갈 줄 알고 있던 빨치산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휴전회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당에서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지리산 빨치산들은 구월산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반공유격대와 맞교환될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힘든 세월을 이겨나갔다. 그렇지만 그 가녀린 희망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절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북은 끝내 빨치산 송환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빨치산에게 남은 선택은 둘. 투항하는 것과 신념을 지켜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다. 당에서는 개별적으로 도시로 잠입해서 장기투쟁에 대비하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연고가 있는 구빨치들도 내려가는 족족 체포되었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인 이현상. 그는 남한과 북한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인 이현상. 그는 남한과 북한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에 의하면 “이현상은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고 그 주검조차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비극적인 인물이다”라고 했다. 북한은 김일성에게 매우 비판적이던 이현상에게 무기 공급을 중단하고 ‘적’으로 간주해 암살자를 보냈으며, 남한의 군경이 빨리 토벌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가 죽자 북한은 갑자기 그를 혁명 열사로 추대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 멘트가 있다. 그러나 해방 격동기에 각자의 사정과 위치와 신념에 따라 멋모르고 번지수를 잘못 알고 선택한 ‘좌우’ 이념이 평생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순간의 선택은 평생 틈을 주지 않고 집요하게 따라다닌 ‘맨발에 가시밭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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