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자전거 순례

 

날씨는 정오가 지나면서 환해져 우리 기분도 좋아졌다.
날씨는 정오가 지나면서 환해져 우리 기분도 좋아졌다.

아비가 돌아왔다. 

제삿밥 물린 지도 오래 청춘의 떫은 찔레 순을 씹으며 시린 뼈마디 마디 가시를 내밀며 산사나이는 지리산에서 내려왔다.

흑백 영정사진도 없이 코끝 아찔한 향을 올리며 까무라치듯 스스로 헌화하며 아직 젊은 아비가 돌아왔다.

-이원규 <찔레꽃> 중에서

 

글 사진 · 김규만(굿모닝한의원 원장)

 

장미의 원형인 찔레꽃과 옛날 장미는 홑겹 꽃이다.
장미의 원형인 찔레꽃과 옛날 장미는 홑겹 꽃이다.

 

#찔레꽃 하얀 꽃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부푼 봄날이 가면 짙은 성장을 한 여름이 온다. 철쭉이 진 산에는 아카시아 하얀 꽃이 상쾌한 향을 날리고 있다. 다소곳이 한적한 길과 산기슭에서 처연하게 핀 찔레꽃은 보릿고개, 화약 냄새 진한 전쟁 그리고 더 오래 짠한 타향살이를 떠나던 이들의 슬픔과 애환을 환기해 주고 있다. 찔레꽃은 덤불을 이루고 무더기로 피어 향을 토하며 수많은 작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꽃이 작고 수수하며 하얀 꽃들이라 무심코 지나치지만, 짙고 화려한 향기가 다시 고개를 돌리게 한다.

뜨거운 여름을 앞둔 5월의 꽃인 찔레는 아이러니하게 아픔과 슬픔과 아련한 추억을 환기시켜 준다. 보릿고개의 흉년을 혹자는 ‘찔레꽃 가뭄’이라고 했다. 배가 고픈 아이들은 들찔레의 연한 순을 꺾어서 먹었다. 5월 하얀 꽃 찔레는 향기로 유혹하지만, 10월 찔레의 콩 같은 영실(營實)은 붉은 색으로 유혹한다. 찔레나 옛날 장미는 ‘홑꽃’이었지만, 중국의 월계화가 유럽에 전해져 ‘겹꽃’인 현재의 장미로 개량되었다. 그 옛날엔 장미조차 찔레처럼 소박했다.
 

핀란드에는 이처럼 널따란 호수가 수없이 많다.
핀란드에는 이처럼 널따란 호수가 수없이 많다.

 

#이병주의 <지리산>

지리산에 대한 기억은 각각이고 지리산에 대한 감성도 각각이다. 나의 지리산이 아닌 이병주의 <지리산>으로 올라가 본다. 지리산은 골이 깊고 기름진 모산으로 넉넉하고 포근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처연(凄然)했다. 나림(那林) 이병주(1921~1992)는 매우 다채로운 작가이다. 이병주의 <지리산>은 1938년부터 1956년까지 ‘일제 식민지-광복-분단-한국전쟁-종전’에 걸친 민족사의 파란만장한 굴곡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72년 9월에 시작해서 1985년 전7권으로 완간되었다. 이병주가 없었다면 지리산 빨치산 문학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섬진강 동쪽 하동의 북촌면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머리가 깨인 수재였다. 그가 다닌 진주농업학교의 식민지 교육에 반발해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유학을 떠나 메이지대학 문과를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다니던 1944년 당시 학병(學兵)에 나갔다가 일제 패망 뒤인 1946년 3월 8일 중국 상하이에서 미군 LST를 타고 귀향했다. 일어, 영어, 불어와 경상도사투리 모두 능통했다. 광범위한 지식과 엄청난 독서를 통해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에 일본유학, 학병생활, 중국체류, 신문사주필, 감옥생활, 여성편력 등 다양한 경험이 더 해져서 이병주만의 ‘구라(口羅)의 세계’를 열었다.  

1950년대 부산은 <부산일보>의 주필 황용주와 <국제신보>의 주필 이병주가 쾌도난마 쌍두마차로 부산의 언론을 이끌었다. 황용주는 밀양출신으로 박정희와 대구사범 4회 동기였다. 이병주는 1921년생으로 박정희(1917)보다 네 살 연하였다. 부산 군수기지창 사령관에 부임한 박정희는 자연스레 먼저 황용주와 나중에 이병주와 통음, 쾌음하는 술친구로 교분을 나눴다. 그러나 불만투성이에 급진주의자 술 친구였던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자 군사정권의 반공 광풍의 희생자가 됐다. 그 와중에 가장 피를 본 사람이 부산일보 사주 김지태였다. 김지태는 5·16군사혁명 재판에서 부정축재자로 구속된 상태에서 서슬 퍼런 중정의 강압으로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부일장학회를 ‘5·16장학회’에 헌납해야 했다. 10·26사건으로€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하자€박근혜가 물려받은 ‘정수장학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병주는 박정희에게 서운했지만, 복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발자크를 인용하여 “이 사람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룰 것이다”라고 하면서 펜을 들었다. 
 

수도사의 카프초를 입고 글쓰기에 임한 발자크는 통통한 동네 아저씨를 닮았다.
수도사의 카프초를 입고 글쓰기에 임한 발자크는 통통한 동네 아저씨를 닮았다.

 

#발자크가 되고 싶었던 남자  

이병주는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의 팬으로 발자크를 존경하고 그를 뒤따르려 했다. 일찍이 그는 책상 앞에 “나폴레옹 앞에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고 써 붙여 두고 글을 썼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의 양과 질은 얼마간 발자크를 뒤따를 수 있었다. 2년 7개월간의 감옥 생활에서 풀려나 작가로 방향을 튼 그는 늦깎이 작가로 현대사의 사관(史官)이 되기로 작정하고, 자신이 흠모하던 발자크처럼 무서운 속도로 엄청난 양의 원고를 쏟아냈다.

발자크는 1819년에 소르본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부모는 그가 공증인이 되기를 바랐으나 발자크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부모에게 작가의 재능을 인정받으려고 작품 저술에 몰두했다. 그러나 처녀작 희곡 <크롬웰(Cromwell)>의 반응이 아주 나빴다. 한 대학 교수는 발자크의 모친에게 “아들이 문학계에 발을 들이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내용을 편지를 보냈을 정도다.  

1822년부터 가명을 쓰면서 상업소설, 통속소설을 여러 편 썼다. 모든 유명 작가 뒤에는 그림자처럼 따르는 뮤즈(Muse, 학예의 여신)들이 있었다. 발자크는 나이는 많더라도 돈이 많고 영향력이 있으며 문학적 조언과 물질적 후원을 해주는 뮤즈들을 특별히 애정했다. 이때에 자신보다 22살이나 많은 ‘로르 드 베르니 부인’과 교제하며 조력을 받았다. 그녀는 그의 첫 번째 육체적 상대로 1836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둘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1824년 ‘쥘마카로’는 발자크의 누이가 둘의 만남을 주선해주면서 친한 사이가 되었다. 발자크가 채권자들에게 쫓기면서 힘들고 고달프고 아플 때 그녀의 집은 도피처였다. 그녀는 발자크 인생의 대부분 동안 그를 돕기 위해 애쓴 지속적인 여인 중 한 명이었다.

1825년부터는 15세 많았던 쥐노 장군의 미망인 ‘아브랑테스 공작부인’과 관계를 맺으며 원숙한 여인의 품위와 우아함과 호화로움은 물론 인간관계나 에티켓 등을 배웠다.

1825년, 사업에 뛰어든 발자크는 인쇄업과 출판업을 하다가 연이어 전부 실패하고 6만 프랑이라는 큰 빚을 지게 된다. 그리고 1828년에 파산한 뒤 글쓰기로 돌아온다.

그는 도미니크 교단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입는 캐시미어로 된 후드티 ‘카프초’를 입고 돈을 벌어 빚을 갚기 위한 전투에 임했지만 과소비는 여전했다. 갈색 수도복 위에 두른 하얀 허리끈 등 모자 달린 옷을 ‘카프초’라 하고 카프초를 입은 마테오 제자들을 가리켜 ‘카프친 수도승’이라 불렀다. 그는 집에 틀어박혀 카프초를 입고 하루에 50잔 가량 커피를 마시며 15시간씩 글을 썼다. 그의 인생은 늘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그런데 이골이 난 그는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면 그대로 비상구로 줄행랑치곤 했다. 그 와중에 1830년부터 문단의 인정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831년, 쇼팽과 사귀고 있던 팜므파탈 ‘조르드 상드’를 만났지만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1832년부터는 ‘한스카부인’을 만나고 죽기 전 그녀와 결혼했다.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제>를 읽고 영감을 받아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썼다.

 

18년을 기다려 결혼했고, 결혼한지 5개월 만에 사별한 발자크의 미망인 한스카 부인.
18년을 기다려 결혼했고, 결혼한지 5개월 만에 사별한 발자크의 미망인 한스카 부인.

 

1850년 3월 장장 18년에 걸친 사랑의 결실인 한스카 부인과 결혼을 했지만 병색이 완연했다. 한스카 부인은 그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대작 <인간희극>의 마지막 부분들을 받아 적었다. 1850년 8월 18일, 발자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로맨스를 남긴 채 떠났다. 발자크는 20년 동안 97권이라는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 일반인들은 이런 천재성과 기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스카 부인은 발자크의 유고를 정리해 전집 <인간희극>을 발간하는 데 온 힘을 쏟아 세상에 탄생시켰다. 발자크의 삶은 병적인 노름꾼,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써서 다 갚고 죽은 것, 마지막에 훌륭한 여인(뮤즈)을 만난 것 등 도스토옙스키와 너무 흡사했다.

 

#사랑이 빠진 사상은 메마르다!

한국의 발자크 이병주의 한 달 평균 집필량이 원고지 1000매 정도였다. 소설, 수필, 칼럼, 르포, 독후감 등 장르도 다양했다. 우리시대 보수 지식인 중의 대표적인 한 사람인 남재희는 이병주의 ‘마초이즘(Machoism)’에 푹 빠져 ‘불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책을 볼 수 있는 당대 최고 지성인’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는 윈스턴이란 담배를 즐기고, 마초스러운 ‘위스키’와 ‘꼬냑’을 마셨다.

그의 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에 나온 한문으로 쓰인 방중술을 해석하느라 낑낑거렸던 기억이 난다. 발자크처럼 많은 여인들과 애정행각을 벌인 그는 출중한 방중술로 여인들의 몸과 정신을 압도했다고 한다. 술과 담배와 초월적인 방중술로 여인들을 녹인 마초의 최고봉이었다. 그러나 술과 담배, 여색 그리고 가장 고약한 글쓰기로 몸을 혹사해서인지 의외로 단명했다.

담배냄새보다 더 진한 보이지 않는 마초 냄새가 진동할 때쯤 그는 폐암에 걸려있었다. 작품활동을 계속하려고 속기사를 뽑기 위해 면접을 보던 그 날 각혈을 하다가 기도가 막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명품을 좋아하고, 미식을 즐겼으며, 여인을 사랑했다. 그런 사랑을 정당화하듯 “사랑이 빠진 사상은 메마르고, 사상이 빠진 사랑은 경박하다”라는 말도 남겼다. 수완이 좋아 돈도 잘 벌고 잘 썼다. 그러나 남용과 무절제 속에서도 작가의 기본 정신인 글쓰기에 관해 무서운 집념을 보였다. 그의 소설 <지리산>에서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과 부르주아 지주이자 지식인인 하영근이 두 차례 만난다.

약초꾼으로 변장한 이현상은 “조선 땅덩어리와 온 백성들이 왜놈들의 압제에 시달리는데 하선생 부녀는 이 울창한 숲속에서 말을 타고 세상살이를 즐기시는군요” 라며 일장 훈시를 한다. 하영근은 “나폴레옹 군대의 포성을 들으면서도 괴테는 시를 썼다고 합니다”라는 말로 답했다.

 

길을 달리다 보면 이런 지구의 주름과 만날 때가 있다.
길을 달리다 보면 이런 지구의 주름과 만날 때가 있다.

 

#핀란드와 우리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핀란드는 주변 강국 스웨덴과 러시아에 끼어 압박을 받고 투쟁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지정학적으로 600년간 스웨덴의 일부로, 100년간 러시아의 속령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보냈다. 2차 대전 당시 소련과의 전쟁인 ‘겨울전쟁’은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단단한 다윗과 어수룩한 바보 골리앗과의 싸움’€이었다. 핀란드는 우리만큼 혹은 그 이상 수많은 외침과 지배를 받은 것 같아서 동병상련이 느껴진다. 그들은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고생했지만, 우리도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여 있다.

핀란드는 너무 멀어서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득한 신화 시절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자작나무(만주, 한반도 기원) 벨트로 이어지는 인연은 과학적이다. 지금은 다 동화되어 잘 알 수 없지만 그들 조상은 우랄 산맥 지역인 동쪽에서 온 것으로 알려졌다. 얼굴 관상도 여타의 유럽인과 달리 광대뼈가 약간 나오고 얼굴이 전체적으로 둥그런 모습이다. 문화의 가장 결정체인 핀란드어는 주변 인도·유럽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뿌리다. 소수 학설이기는 하나 핀란드어는 한국어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에 속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핀란드의 정신을 압도하는 ‘Sisu’는 우리의 ‘깡과 악’과 너무 비슷하다.

 

북쪽 길은 자작나무와 소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와 친구하며 지나간다.
북쪽 길은 자작나무와 소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와 친구하며 지나간다.

 

가랑비가 내리지만 우리의 바이크는 가야한다!
가랑비가 내리지만 우리의 바이크는 가야한다!

 

#핀란드의 <칼레발라>와 우리의 <단군신화>

로바니에미에서 소단퀼레를 경우하여 이발로를 거쳐 호수의 도시 이나리에 이른다. 아름다운 이나리호(핀란드 3위 호수, 1,043km2)는 라플란드의 북극권 도로(Arctic Road) 변에 있다. 살아 있는 사미족의 문화를 볼 수 있는 사멜라이스 야외박물관(Saamelais museo)은 사미족의 공예품, 순록농장, 고기잡이 전통 등을 볼 수 있다.

호수 가운데의 아름다운 우코(Ukko)섬은 이나리 어부들의 제례장소로 유명하다. 우코(Ukko)는 <칼레발라>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숭배하는 핀란드 신화의 최고신이다. 오른 손에 번개가 들려있어 ‘번개의 신’이라고도 한다. 일마타르(Ilmatar)는 ‘공기의 정령’으로, 바람과 파도와 폭풍우 치는 바다로 내려와 아이를 잉태하고 ‘하늘과 땅, 해와 달’을 모두 창조한 창조신으로, 칼레발라의 최고 주인공 베이네뫼이넨을 낳았다. 혼돈으로부터 세계가 탄생한 창세신화는 노래처럼 시처럼 시작된다. ‘이 세상에 원시 바다가 있고 그 위를 떠다니는 아주 오랫동안 순결을 지켜온 공기의 정령 일마타르가 물 위로 내려가 물의 어머니가 된다’, ‘파도 위에서 미친 듯이 떠밀리던 일마타르는 갑자기 태기를 느끼고 잉태하지만 7백 년 동안 출산을 못한다’, ‘하얀 오리가 날아와 임신한 그녀의 무릎에 알을 낳는다. 알이 바다로 떨어져 깨지면서 껍질은 하늘과 땅, 노른자는 태양, 흰자는 달이 되었다. 그녀가 몸을 비틀자 물고기와 숲과 바위 등이 생겼다’.

이렇게 천지창조가 되었다. 어머니 자궁에 있던 아이는 스스로 자궁을 빠져나와 바다를 헤엄쳐 땅에 올라왔다. 그는 <칼레발라>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베이네뫼이넨으로, 마법사이자 음유시인이며 하프 형태의 핀란드 악기 칸텔레의 명인이었다. 그는 혼돈 속에서 하나하나 질서를 찾고 만들면서 칼레발라를 건설했다. 여기까지가 <칼레발라>의 천지창조 이야기다.

 

핀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이나리 호수. 이 호수엔 핀란드 신화에서 최고신으로 기리는 신의 이름을 딴 우코(Ukko)섬이 있다.
핀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이나리 호수. 이 호수엔 핀란드 신화에서 최고신으로 기리는 신의 이름을 딴 우코(Ukko)섬이 있다.

 

#천지창조의 대서사시, 칼레발라

신화의 주요한 등장인물은 노래와 음악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베이네뫼이넨, ‘하늘의 눈꺼풀’을 만들고 삼포(Sampo, 마술 맷돌)를 만든 신비로운 대장장이 일마리넨(Ilmarinen), 역사상 최초의 바람둥이자 난봉꾼인 레민케이넨(Lemminkainen) 세 사람이 북방 포욜라의 마녀여왕 로우히의 딸에게 구혼하러 가는 모험담이다. 이들은 왜 야만스러운 북방 포욜라에 가서 처녀를 얻으려 했을까? 그 당시 유사 형질이 대부분인 씨족 간의 근친교배, 동종교배(Inbreeding system)를 하면 부모의 단점만을 가진 열성인 2세가 태어나기 쉽다. 오랫동안 지속되면 열성 유전자로 기형아, 유전병을 앓는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몽골말을 제주도에서 수백 년 동종교배를 계속한 결과 조랑말로 퇴화된 것과 같다.

멀리 포욜라로 가서 이질적인 형질간의 교배를 하는 잡종교배, 이종교배(Outbreeding system)를 하면 부모의 장점만을 가진 우성인 2세가 태어날 가능성이 많다. 에스키모나 유목민들이 손님을 환대하고 심지어 부인과 동침하게 하는 것은 새롭고 신선한 유전자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유태인들은 이종교배해서 잡종강세(Heterosis)가 나타나 우수한 인재들이 많다.  

대장장이 일마리넨은 밀가루 소금 황금이 나오는 마술 맷돌인 삼포를 만들어 포욜라의 로우히 마녀여왕에게 선물하고 ‘무지개처녀’와 결혼에 성공해 한 동안 포욜라는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호사다마! ‘무지개처녀’가 빵에 돌을 넣어 일마리넨의 노예 쿨레르보를 도발하자 격노한 그가 들짐승을 풀어 갈가리 찢겨 죽게 한다. ‘무지개처녀’가 죽자 이들의 관심은 마술 맷돌(삼포)에 집중되었다.  

칼레발라의 베이네뫼이넨과 포욜라의 마녀여왕 로우히가 싸우다 맷돌이 바다에 빠져버리자 세상의 풍요는 사라졌다. 그녀는 보복으로 각종 역병을 돌게 하고 곰과 늑대 등을 몰고와 칼레발라를 침략했다. 현자 베이네뫼이넨은 병자들을 사우나에 들어가게 하고 사냥꾼들로 하여금 방어하게 했으며, 빼앗긴 해와 달을 도로 찾고, 자신의 미래 후계자를 정했다.

처녀인 마르야타(Marjatta)가 낳은 아들과 ‘지혜 대결’을 하지만 베이네뫼이넨이 지고 만다. 베이네뫼이넨은 그에게 세례를 주고 왕으로 추대한다. ‘처녀 엄마인 마르야타와 그녀의 아들’은 ‘마리아와 예수’를 상징한다. 이교도인 베이네뫼이넨은 칸텔레와 노래를 남겨두고 떠난다. 베이네뫼이넨은 이제 더 이상 칼레발라의 지배자가 아님을 암시하고 지상의 인간들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란 말만 남기고 신화 속으로 사라졌다. 칼레발라는 천지의 창조부터 핀우그르 민족의 형성까지 고대사를 아주 웅장하고 멋지게 풀어나간 서사시다.

<칼레발라>가 핀란드인들의 정신을 지배하듯이 <단군신화>의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재세이화(在世理化, 세상에 있으며 다스려 교화한다), 이도여치(以道與治, 도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광명이세(光明理世,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등도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신화는 모든 문화의 원형질이고 원류와 같다.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한 것이다.

 

망개떡은 잘 쉬지 않는다. 원산지는 망개라 부르는 경상도다.
망개떡은 잘 쉬지 않는다. 원산지는 망개라 부르는 경상도다.

 

#잊혀진 빨치산들

빨치산에는 전쟁 전부터 좌익활동을 했던 속칭 구(舊)빨치, 낙동강 전선에서 낙오한 인민군들과 북한 지배 하에서 공산당에 동조한 신(新)빨치가 있다. 빨치산 부대도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에서 직접 파견한 이현상의 ‘독립 제4지대’, 지역별로 조직된 ‘도당 유격대’가 있다.

1948년 발생한 제주4·3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동 명령을 거부한 여수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에 의해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후에 잔여 부대원들이 지리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정규군 형식을 갖춘 빨치산이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제주도를 통해서 지리산으로 굴러왔다.

 

산죽, 조릿대 숲은 빨치산들의 보금자리였고 훌륭한 불쏘시개였다.
산죽, 조릿대 숲은 빨치산들의 보금자리였고 훌륭한 불쏘시개였다.

 

빨치산이 되면 제일 먼저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숟가락을 당증(!)으로 받는다고 한다. 빨치산들은 지리산에서 사계를 보낼 수 있게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수많은 ‘트’(아지트, 은신처)와 ‘비트’(비밀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들은 ‘트’에 숨어 눈과 비바람을 피하고 토벌대의 눈을 피하며 낮에는 잠을 자고 주로 밤에 활동했다. 낮에는 무기보수, 시설보수, 환자 치료 등을 하면서 지냈다. 우천시 옷이 젖으면 저체온증으로 극히 위험하므로 일단 이동을 줄이고 비를 피할 자신들의 ‘트’로 들어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추운 겨울이나 농번기에는 전쟁을 피했다. 전쟁은 날이 좀 풀리는 3월이 되어서 시작했다. 그래서 3월을 ‘March’라고 한다.

 

열매는 어떤 동물이든 먹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청미래덩굴 열매를 명감 또는 망개라고 한다.
열매는 어떤 동물이든 먹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청미래덩굴 열매를 명감 또는 망개라고 한다.

 

무성한 털과 두터운 피부가 없는 인간에게 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위를 피하고 음식을 익히는 불일 것이다. 적과의 전투에서 자신을 지키고, 필요한 도구를 만들며, 퇴화된 이빨을 보완해줄 칼이 두 번째라고 생각한다. 빨치산은 불을 피우되 연기가 안 나게 피워야 했다. 그들은 싸리나무, 청미래덩굴(맹감나무, 망개나무), 산죽 등 수분이 적은 나무를 태워서 연기를 줄였다. 그래서 빨치산이 되려면  ‘능선, 연기, 소리를 피하라는 3금 철칙’,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얼어 죽을 3대 각오’를 해야 한단다. 
 

어혈의 눈동자 빨간 영실들이야텃새들에게 나눠주며얘야, 막내야끝내 용서받지 못할차마 용서할 수 없는 내가 왔다죽어서야 마흔 번해마다 봄이면 찔레꽃을 피웠으니얘야, 불온한 막내야혁명은 분노의 가시가 아니라용서의 하얀 꽃이더라.

-이원규 <찔레꽃>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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