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등반_베트남 후룽 암벽

 

초원과 숲. 암벽과 산을 뒤로하고 오르는 등반가의 모습이 한 폭의 산수화가 따로 없다.
초원과 숲. 암벽과 산을 뒤로하고 오르는 등반가의 모습이 한 폭의 산수화가 따로 없다.

 

“좋은 울음터다. 한바탕 울만하구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好哭場論(호곡장론)’을 말했으니, 광활한 요동벌을 처음 마주쳤을 때였다.

베트남 ‘후룽(Huu Lung) 암벽’을 맞닥뜨린 순간, 카르스트 지형의 노다지 암벽을 보고 세상 가장 행복한 클라이머가 되어 무릎 치며 말하게 된다.

“좋은 놀이터다. 한바탕 놀만하구나!”

그곳은 여전히 개척의 손길을 기다리는 바위가 여기저기 지천에 널려 손짓하는, ‘바위 하는’ 사람들의 천국이었다. 
 

글ㆍ장재용(동아대학교 산악회) 사진ㆍ최규철, Jean Verly

 

후룽 지역 대부분의 코스를 개척한 프랑스인 등반가 Jean Verly의 등반 모습.
후룽 지역 대부분의 코스를 개척한 프랑스인 등반가 Jean Verly의 등반 모습.

 

“지구에서 가장 등반하기 좋은 곳이다. 미개척 암벽이 이렇게 많은 곳은 처음이니, 이 나이에 내 피를 끓게 만드는구나.”

요세미티 대암벽과 아이거북벽, 데날리, 트랑고 타워를 국내 최초로 등반하고 중국에 100개 이상의 암벽 루트를 홀로 개척한 세계 거벽등반의 선구자 주영, 그런 그가 후룽 암벽들을 보는 순간 감탄을 쏟아내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Bad Boy 신드롬을 일으킨 산악계의 거장, 산이 있는 곳이라면 천지를 주유하며 섭렵했던 그조차 한 눈에 반한 암벽이라면 설명이 될까. 호곡장론의 연암이 주영의 몸을 얻어 감탄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동질의 원형인 듯, 한 몸이 되어 내 앞에 있는 기묘한 장면을 나는 보았다.

이제 그와 나는 한 폭의 진경산수화 안으로 들어가 화선지에 없던 클라이머의 화룡점정, 번지는 먹이 되어 나타날 참이다. 

 

올록볼록 솟은 카르스트 지형이 특징인 후룽의 암벽.
올록볼록 솟은 카르스트 지형이 특징인 후룽의 암벽.

 

지금의 정신으로 들어선 베트남 후룽 암벽

거벽을 쓸고 다녔던 미 남가주산악회의 주영 선배가 호치민에 있다니! 그가 이곳에 있다는 지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나를 알든 모르든,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좋든 싫든 버선발로 달려가 덥석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 다시 놀라워라! 내 젊은 시절 영웅이던 Bad boy를 실제로 만난다는 사실에 눈치도 염치도 모두 방구석에 던져 놓고 며칠을 나는 설렜다. 그렇게 만난, 일흔을 바라보는 그는 천진할 정도로 유쾌했다.

스무 살이 훌쩍 넘는 나이 차이에도 나는 왜 그를 친구 같다 생각했는가, 산악인 특유의 무겁고 진지하며 다소 비장하리라 생각했던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확인하는 데는 1분이면 족했다. 그가 들려준 히피적 악동 산악인의 이야기에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에게 선물로 받은 매드락 암벽화에 서명을 부탁했다. ‘재용아, 산에 가자 주영-’ 볼 것 있는가, 곧바로 우리는 작당모의에 들어갔고, 나는 등반계의 전설과 전설의 땅, 하노이 랑선지역의 후룽으로 비행기를 타고 곧장 날아갔다. 비가 내려도 좋고, 멀어도 좋다. 늦으면 또 어떠랴!

주영 선배와 호치민에서 투자자문사를 운영하는 최규철 씨와 나, 셋이 함께했다. 주영 선배는 비행기에서 불편한 중간자리, 후룽으로 가는 승용차에서도 앞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그게 편하다고 말했지만, 후배들에게 조금의 불편함도 주지 않으려는 배려가 몸에 밴 듯했다.

공항에서 차로 두 시간을 달려 랑선(Lang son) 지역에 진입하자 카르스트 지형이 펼쳐졌다. 지나는 길 곳곳에 바위에 붙은 클라이머들이 보였다. 알싸한 긴장과 약간의 설렘, 바위에 매달린 나를 상상하자 죽지 않으려 발산되는 아드레날린이 폭풍처럼 나를 휘감았다. 바위에 붙으면 바위만 생각한다. 눈앞의 바위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황홀한 ‘지금의 정신’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위로 향했다. 이곳에는 열 군데가 넘는 바위가 있고, 100개 이상의 루트가 있다. 첫날 우리는 후룽 암벽에서 가장 유명한 ‘Head wall’을 올랐고, 둘째 날은 ‘Dragon wall’을 올랐다. 숙소에서 Head wall까지는 5분, 어프로치는 걸어서 3분. 이보다 좋을 순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숙소에서 바위까지 점심을 배달해 준다. 오로지 바위 오름짓에만 몰두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이 갖춰져 있는 것이다. 
 

Head wall 'Bristol fashion'(6a, 5.10d) 코스를 선등하고 있는 주영 선배
Head wall 'Bristol fashion'(6a, 5.10d) 코스를 선등하고 있는 주영 선배

 

비정상적으로 굵은 전완근을 가진 이들의 천국

Head wall 언저리에 이르자 낯선 이방인이 바위 밑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우리를 반기는 클라이머들, 국적은 다르지만 비정상으로 굵은 전완근을 가진 그들이 이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인사를 마치고 재빨리 로프를 풀고 장비를 전열했다. 주영 선배는 어느새 루트를 확인하고 퀵 드로 세트를 하네스에 걸고 있었다. 바위 앞에서는 보통 장유유서가 뒤바뀌지만, 선배는 경로우대를 강조하며 선등을 자청했다.

괜히 대가가 아니었다. ‘God any Dong’(유럽등급 5b, 미국등급 5.9, 20m, 퀵드로 11개 소요)이라는 코스를 온사이트로 가뿐하게 오르는 67세 청년은 세월을 거꾸로 사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등반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오늘 밥값 다했다. 기세를 몰아 ‘Bistrol fashion’(6a, 5.10d, 18m, 퀵드로 8개 소요) 코스를 올랐다. 미끄러운 듯 날카롭고, 부드러운 듯 거친 석회암 특유의 질감이 신선했다. 오버행 벽에 종유석이 고드름처럼 매달려서 벽과 종유석을 오가며 오르는 석회암 바위 재미가 쏠쏠했다.

최대 3피치까지 등반이 가능한 루트가 있었다. 1피치 코스는 프렌드, 너트 등의 인공등반 장비가 필요 없는 구간이다. 이곳 후룽 지역 대부분의 코스는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81년생 프랑스인 Jean Verly씨가 개척했다. 그는 바위에 미쳐 베트남 전역을 샅샅이 뒤져 찾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 했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노다지 암벽을 보고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12년 전부터 개척을 시작했으나 여전히 미지의 암벽이 널렸다.

그날 이 친구와의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마침 우리가 오른 Head wall에서 개척자 Jean Verly씨가 등반 중이었다. 우리는 바위를 개척해준 그가 고맙고 반가워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등급이 박한 느낌이었다, 홀드가 숨어서 보이질 않는다는 농담과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곳에 가끔 오는 Jean Verly씨의 프랑스 친구 패트릭이라는 사람이 주영 선배의 친구임을 알게 되었다. Jean Verly는 패트릭에게 친한 한국친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Mr. Chu를 아냐’고 물었다. 주영 선배가 ‘내가 바로 Chu’라고 하자, ‘매드락의 Mr. Chu가 당신이냐’고 되물었다. 선배가 허허 웃으시며 ‘그렇다’고 하니 Jean Verly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몰라 뵀다’며 선망어린 눈빛으로 바뀌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급 공손해졌다.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산악계가 좁다는 것을. 그러면서 12년 전 이곳을 발견한 일, 개척하며 어려웠던 일, 볼트 앵커링 방식의 제약 등 개척자 Jean Verly씨는 자신의 보스를 만난 듯 주영 선배 앞에서 브리핑 모드로 전환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 “겨울에 다시 와 남은 바위들을 같이 개척하자”는 등 내가 들어도 든든한 말들이 Jean Verly씨의 등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그의 넓은 어깨를 어루만지며 응원했다.     

 

물안개가 감싼 신비로운 카르스트의 진경으로 향하는 등반가.
물안개가 감싼 신비로운 카르스트의 진경으로 향하는 등반가.

 

감탄을 자아내는 카르스트의 진경

저녁이 됐다. Mao’s House에 여기저기서 등반하던 클라이머가 모두 모였다. 네덜란드, 베트남, 호주, 싱가폴, 일본까지 국적도 다양했다. 이 숙소의 좋은 점은 저녁을 따로 먹을 수 없다는 점인데, 주인아주머니가 해주는 저녁을 한시에 지정된 장소에서 모두 모여 함께 먹어야 한다. 모든 산악인이 함께 저녁을 먹으며 통성명이 시작되고 이야기꽃이 피어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이러니 술이 빠질 수 없다. 전 세계 젊은 클라이머들이 K-POP 노래를 열창하며 하나가 되었다.

 

Mao's house에서 저녁을 함께 한 뒤 모인 등반가들.
Mao's house에서 저녁을 함께 한 뒤 모인 등반가들.

 

주영 선배의 기막힌 기타 연주가 어우러져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베트남 두 여성 클라이머의 댄스까지 곁들여져 내일은 없다며 놀아재꼈다. 그 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등반 이야기를 하다가 사람들이 주영 선배의 정체를 알게 됐다. 기념사진 세례를 받고 요세미티 낭인일 적 생활을 멋들어지게 꺼냈는데, 살아있는 역사가 말하는 역사를 사람들은 배꼽을 잡아가며 들었다. 롭, 가츠야, 옌, 케이시는 웃다가 지쳐 잠들었고, 마지막 남은 한국 3인방은 끝까지 맥주를 들고 전완근 운동에 심취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으니까!

다음날 아침, 나는 후룽에서 진경을 보았다. 아침나절 물안개가 카르스트 지형으로 우뚝 솟은 산과 산 사이를 휘돌았다. 어제 내린 비로 호수가 불어 담담히 고인 모습이 늠름했다. 아침, 맑은 숲 안에서 숨을 토한 뒤 입을 벌렸다. ‘늑골 새새가 들뜨고 벌어지는 느낌이 들 만큼’ 공기를 깊이 들어 마셨다. ‘쓰읍-’ 지구가 주는 선물이다.

전날 등반했던 후룽 암벽지구의 Head Wall 구석구석을 돌며 바위를 올랐다. 간간히 내리는 빗줄기에도 비 한 방울 눌러 붙지 않는 마른 석회암을 올랐다. 말이 달리는 넓은 초원을 양손을 휘저으며 걸었고, 몸을 비비며 바위와 바위 사이를 기어올랐다. 줄을 타고 오르며 저 멀리 있는 마을을 봤더랬다. 욱신 쑤시는 몸을 일으켜 어제 오른 바위를 바라봤다. 진경산수화 같은 풍광, 바람이 한 줄기 지나갔고 머리가 엉클어졌다가 가라앉았다. 살아 여기 있는 것이 기막힌 우연 같았다. 잘 살거나 못 사는 건 중요하지 않다. 명리나 실리도 산만큼 못하다. 살아있어 좋은 것이다. 한가한 아침이 얼마 만이었는지!

누군가 자신의 명리와도 바꾸고 싶은 것이 진경을 보는 한가함이라 했다. 문사(文思)가 부족해 이 아름다움을 놓고 해석하지 못하는 중에 문득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읊었던 시가 떠올랐다. 연암은 중국 연경에 다다라 이 시를 썼다. 아마도 후룽과 같이 올록볼록 솟은 카르스트 지형과 산허리에 둘러진 구름을 보고 감탄하며 쓰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말을 탄 채 촉도난을 읊었더니만

오늘 아침 이내 몸은 진관에 드네

저녁 구름 푸르스름 어부수를 막았고

아침 숲은 시뻘겋게 조서산을 이었네

글자를 배운 것이 평생 후회로구나

명리를 줄 터이니 한가한 몸 못 바꿀까     

-<열하일기>, ‘길에서’ (路上) 일부, 연암 박지원

 

대가의 확보를 받으며 Dragon wall의 Metallica(6a, 5.10d) 코스를 오르는 글쓴이.
대가의 확보를 받으며 Dragon wall의 Metallica(6a, 5.10d) 코스를 오르는 글쓴이.

 

후회 없이 오르고 남김없이 산다

둘째 날 등반을 이어갔다. 대상지는 Dragon wall이었다. 물소가 느리게 풀을 뜯고 염소가 작은 워낭을 흔들며 노는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을 가로질러 5분쯤 걸어가자 멋진 동굴과 함께 잘생긴 바위가 떡하고 나타나는데, 한 마리의 스테고사우루스처럼 늠름했다. 여기서도 경로우대는 불변의 법칙이다. 주영 선배가 먼저 ‘Bi-dihedral’(5b, 5.9, 15m) 코스를 사뿐 사뿐 걸어갔다 온다. 두 번째로 오른 ‘Viet times’(5c, 5.10b, 15m), 홀드가 큼직큼직하니 당기는 맛이 좋다. 약간의 오버행으로 기울어졌지만 홀드가 좋아 모션이 크고, 완력을 쓰며 오르는 재미가 있다.

바로 옆 Metallica(6a, 5.10d, 18m)를 오르려던 순간 저 멀리서 Mao’s House의 주인, Mao 아저씨가 초원 한 중간에서 노래를 부르며 점심 배달을 왔다. Mao 아저씨가 오니 동네 사람들도 죄다 모였다. 모두가 ‘저기를 왜 올라가나?’ 하는 의아한 눈빛과 이방인을 보는 신기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점심을 후다닥 먹고, 관중들의 측은한 눈빛을 응원삼아 Metallica를 올랐다. 주영 선배는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은 멋진 코스라며 “재용아, 니가 있어 이렇게 멋진 곳에 올 수 있었다”고 내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고마움은 오히려 내가 훨씬 컸다. 그나저나 이 멋진 등반도 이제 끝나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 가눌 길이 없었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산악인을 옆에 두고 그가 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산은 마침내 출렁이는 바다에 닿았고, 제 살을 깎아내는 파도조차 끌어안으며 유장했던 삶을 조곤조곤 얘기하는 산이었다. 그의 삶과 나의 삶이 엄연히 다르지만, 그의 인생 곡절과 강물같이 흘러 바다에 닿은 깊고도 넓었던 여정을 따라가 보는 것도, 흉내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닮으려면 그의 흉터까지 닮아야 한다 하지 않던가. 누구도 모를 일이다. 실패도 호사다. 다만, 불행으로 돌진하며 삶은 더 단단해지고 누구도 닮지 않은 내 제국이 번듯하게 세워질 것이다. 그것이 삶을 남김없이 다 쓰고 가는 것이라 믿는다.

 

Dragon wall을 떠나며. 다시 튼튼해진 전완근으로 삶을 움켜쥐리라.
Dragon wall을 떠나며. 다시 튼튼해진 전완근으로 삶을 움켜쥐리라.

 

석회암 바위가 날카로웠던 모양이다. 정신없이 오를 때는 몰랐는데, 집에 도착하니 그제야 여기저기서 상처가 아우성이었다. 곳곳에 피딱지가 너덜너덜한데도 얼굴은 연신 미소가 지어졌다. 내발은 착 달라붙었던 암벽화를 잊지 못하는지 펑퍼짐한 운동화가 어색했다. 발조차 잊지 못하는 바위라니. 1박2일의 꿈같은 등반으로 이제 얼마간은 어떤 스트레스에도 거뜬할 터였다. 다시 튼튼해진 전완근으로 삶을 움켜쥐리라.

후룽 일정 전체를 가이드하고 통역, 촬영까지 궂은일을 도맡아 해 준 최규철 씨에게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바위가 없어 무료했던 호치민 생활을 마무리할까 하려던 찰나, 하늘에서 선녀처럼 내려와 클라이머 본능을 깨워준 주영 선배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덧붙여, 7월 초 동아대학교산악회, 내 악우들이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은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미답봉을 향해 장도에 나선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갈 때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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