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자전거 순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작사, 안성현 작곡 〈엄마야 누나야〉 중에서

 

지구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곳. 우측 피요르드는 격랑이 일고 있지만 바위는 든든하다.
지구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곳. 우측 피요르드는 격랑이 일고 있지만 바위는 든든하다.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을 떨게 한 하얀 사신들!

핀란드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이리 차이고 저리 치이면서 현명한 대처로 평화와 번영을 이룬 ‘작은 고추가 매운’ 대표적인 강소국(强小國)이었다. 인구 5백5십만 명을 겨우 넘는 작은 나라가 700년 이상 외세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꿋꿋하게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잘 지켜왔다.

러시아는 1812년에 벌어진 조국전쟁(나폴레옹과의 전쟁), 1941년의 대조국전쟁(독소전쟁)에서 프랑스와 독일군에게 손끝과 발끝, 불알조차 얼어붙는 러시아 추위로 군기를 잡았다. 겉보기에 러시아 불곰들은 추위에 최강인 군대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천적이 있었다. 소련은 독일과 비밀리에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후 1939년 핀란드를 침략해 겨울전쟁(1939.11.30~1940.3.13)을 일으켰다. 핀란드는 소련에 비해 장비와 병력 등 모든 것이 절대 열세(탱크 100:1, 전투기 30:1, 병력 4:1)였지만, 이 전쟁에 전 국민이 강철 같은 의지와 불굴의 정신으로 결사항전으로 임했다. 핀란드군은 영하 40℃가 보통인 강추위, 울창한 삼림(국토의 70%), 19만개의 호수 등 자연환경과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고 게릴라 작전을 펼치며 세계 전쟁사상 유례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겨울전쟁의 총사령관은 제정 러시아에서 중장까지 지냈지만 핀란드가 독립하자 귀국한 72세의 노장군 만네르헤임(1867~1951)이었다. 그는 핀란드 내전 당시 백군(白軍)을 지휘해 러시아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는 적군(赤軍)을 물리쳐 핀란드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만네르헤임은 나이답지 않게 번득이는 지혜와 넘치는 아이디어로 세계 최초의 스키부대를 창설하고, 최초로 겨울용 백색 군복을 입혔으며, 적의 허점을 노리는 저격수(Sniper) 작전을 잘 활용했다.

 

겨울전쟁의 두 영웅 중 한 명인 '시모 해위해'는 만네르헤임과 달리 매우 단신이다. 순하고 겸손해 보이지만 소련군들에게는 무서운 '하얀 사신(死神)' 이었다.
겨울전쟁의 두 영웅 중 한 명인 '시모 해위해'는 만네르헤임과 달리 매우 단신이다. 순하고 겸손해 보이지만 소련군들에게는 무서운 '하얀 사신(死神)' 이었다.

 

사냥꾼 출신인 시모 해위해(Simo Hayha, 1905~2002)는 겨울전쟁 100일간 542명을 사살해 전대미문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이 단신(160cm)의 저격수는 망원렌즈도 쓰지 않고 역사상 최다 사살 기록으로, 당시€소련군에게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악몽이자 움직이는 재앙이며, 서늘한 백사병(白死病)이요, ‘하얀 사신(死神)’이었다. 콜라 전투€초기였던 1939년 겨울, 시모 해위해가 속했던 부대는 31명의 병사만으로 4,000명에 달하는 소련군 1개 연대를 상대했다.

자체 개발한 ‘1931년식 수오미 기관단총’은 화력은 약하지만 무거운 소총탄 대신 가벼운 9mm 권총탄을 사용해 속사가 가능했다. 동그란 드럼형 탄창을 개발해 71발이나 장전할 수 있었다. 나중에 소련군은 이를 벤치마킹해 ‘따발총(PPSh-41)을 개발했다. 하얀 설상복을 입고 스키를 타고 적에게 최대한 접근한 후 기관단총을 갈기고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에탄올, 가솔린 등을 섞은 750ml짜리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 45만 개를 대전차무기로 실전에 사용했다.

겨울전쟁에서 소련군 희생자는 12만6,875명이었지만 핀란드군 희생자는 2만2,83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비효율 막가파의 전형으로 ‘까라면 까!’라는 단순한 상명하복 전술만 고집했다. 목표가 정해지면 초토화작전, 대량 물량작전, 무제한 인해전술 같은 제네바 협약에 금지된 전술 전략이 많았다. 참고로 지뢰밭이 나오면 지뢰제거를 하지 않고 ‘돌격 앞으로’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통과하게 했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지만 전사자가 무려 2천4백만 명으로, 부끄러워서 한동안 이 내용을 숨기기도 했다. 핀란드는 스탈린의 잔인 무식 지저분한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국토의 10%를 양도해 주는 조건으로 종전협정을 맺었다.

 

라다크 레에서 바랄라체라를 넘다. 뒤로 펼쳐진 배경은 마날리로 향하는 길.
라다크 레에서 바랄라체라를 넘다. 뒤로 펼쳐진 배경은 마날리로 향하는 길.

 

#강철 같은 의지와 불굴의 정신이 바로 ‘Sisu!’

겨울전쟁 종전 1년 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과 손을 잡고 ‘계속전쟁’을 하면서 소련에게 잃은 땅을 회복했다. 그러나 대세가 기울자 1944년, 바로 소련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라플란드 전쟁에서 핀란드 내의 독일군 잔당을 소탕해서 소련에게 아부했다. 기껏 수복한 영토를 다시 할양하고 상당한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했지만, 강제병합으로 나라가 없어지거나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독립국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외교에서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준칙을 잘 지킨 것이다.

핀란드는 미국이 제공하는 전후 복구사업인 마셜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도 사양하면서 소련이 주도하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냉전기간 내내 소련을 자극하거나 도발하는 일을 피하고, 서방과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미묘한 중립을 유지하면서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런 기막힌 등거리 외교, 실리적인 정치는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냉전 당시 핀란드가 주변 강대국들을 건드리거나 자극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권과 체제를 유지한 것을 Finlanderation(핀란드화€정책)이라고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칼은 칼집에 들어있을 때 가장 무섭다’는 금언을 생각해 본다.  

핀란드의 특성은 3S로 ‘사우나, 시벨리우스, 시수(Sauna, Sibelius, Sisu)’라고 한다. 사우나는 가장 세계화된 용어이고, 시벨리우스는 민족적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핀란드의 대표적 작곡가다. ‘Sisu’는 핀란드의 ‘정신’ 또는 ‘깡’ 같은 것이다. Sisu는 극기, 용기, 강인함, 근성, 투혼 등을 뜻한다. 대부분 포기할 상황에서도 싸워 이기겠다는 불굴의 투혼을 가리킨다. 겨울전쟁 당시 압도적인 열세였지만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소련과 맞서 싸우고 전술적으로도 승리를 거두었다. 핀란드가 자강불식하면서 중립을 잘 지키고 독립국을 유지한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들에게 면면히 흐르는 불굴의 정신과 깡이 바로 ‘Sisu’다.

 

외딴 집이지만 인적이 있어 좋다.
외딴 집이지만 인적이 있어 좋다.

 

#북쪽을 향해 달린다!

라피(Lappi)들의 수도 로바니에미의 북쪽으로 8km 떨어진 산타클로스 마을에 해가 저물고 있다. 대형 마트에서 필요한 식료품을 사고, 바로 숙소를 검색해 보았다. 오늘은 소고기를 넉넉하게 구입했다. 여기저기 검색하고 통화로 확인해서 최대한 좋은 가격에 편안한 잠자리를 구했다. 호숫가에 독립된 아름다운 작은 집이었다. 정육점에서 사온 고기를 굽고 화려한 만찬을 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우리 모두를 위해 축배를 들자! 안주도 충분하고 술도 충분하다. 사우나도 이용할 수 있다. 모스크바에서 정식 숙박한 후 처음이다.

다음날, 오랜만에 숙면을 취해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각자 슬리핑백을 주머니에 넣고 오랜만에 자전거 라이딩 복장을 갖췄다. 아침 식사를 하고 간식과 물을 채우고 라이딩에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 노란색이 압도하는 자작나무 숲은 내 마음에 서정시가 되어 흘러간다. 아침에 가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북쪽으로 향하다가 널찍한 야영장 부근에서 각자 자전거를 꺼내서 조립했다. 자동차 운전자 한 명을 제외한 총 6명이 라이딩에 나섰다. 시작한 이상 유럽 최북단 노르카프(Nordkapp)까지 달릴 것이다. 로바니에미에서 노르카프까지는 709km쯤으로, 오랫동안 자작나무 숲 사이를 달리면서 서너 번 정도 캠핑을 생각하고 있다.

인간은 너무 외롭고 그리울 때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자전거를 달리는 것은 동중정(動中靜)의 수행이다. 움직임 가운데 고요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정중동이다. 정중동(靜中動)이 참선(參禪)이라면, 동중정(動中靜)은 행선(行禪)이다. 아무튼, 침묵과 고독 속에서 깨달음과 각성은 찾아온다.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북위 66.5도 이북 북극권(Arctic circle)이다. 북극권은 지구의 기울기가 수직방향에서 약 23.5° 기울어져 자전하고 거시적으로 공전하면서 생긴 것이다. <90-23.5=66.5>부터 북극점까지가 북극권이다. 대표적인 특징으로 북극권은 여름에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와 겨울에 해가 뜨지 않는 극야(極夜)가 일어나는 곳이다.

 

순록을 탄 동네 아재들
순록을 탄 동네 아재들

 

#인간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순록

북극권에서 순록을 키우며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라피 또는 샤미족이라 한다. 그들은 순록을 유목하며 사는 코미족, 투바족, 예벤족, 네네츠족, 사모예드족, 축치족 처럼 생활했었다. 그러나 샤미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빠르게 현대화되면서 샤미들의 문화와 정신(Sisu)의 요체인 샤머니즘이 차츰 기독교 십자가의 염력에 바래고 약해져 정체성과 문화가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가장 문명화된 유럽에서 영원한 삶과 천국(Utopia)를 역설하는 교회가 자꾸 없어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삶의 위기와 고달픔과 긴장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같이 다소 이합집산, 변화무쌍, 예측불허한 사회에서는 물 반 고기 반, 오병이어(五餠二魚)를 외치는 교회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샤미족들은 시베리아계 황인종에서 유래되었지만 핀인,€헝가리인,€터키인,€타타르인 들처럼 긴 시간 혼혈이 되면서 외형이 코카소이드 인종으로 동화되었으나 북유럽인들에 비하면 키만 약간 작을 뿐이라고 한다.

순록은 소목(目)-사슴과(科)의 동물이다. 그래서 루돌프 사슴(!)이라는 과감한 오역이 가능했다. 이곳 유라시아 북쪽에 사는€순록은 레인디어(reindeer, 유라시아 순록)라 하고, 북미에 떼 지어 사는 순록은 카리부(Caribou, 북미산 순록)라고 한다. 미국의 등산 장비업체 ‘Caribou’와 이름이 같다.

순록의 발은 여름에는 넓게 변해 부드러워진 툰드라 무른 땅에서 잘 빠지지 않게 하고, 겨울에는 작고 단단해진 발굽으로 눈과 얼음을 깨고 헤집을 수 있게 진화했다. 날카롭고 강한 야전삽 같은 발굽으로 툰드라를 덮은 눈과 얼음을 걷어내고 깨며 이끼와 풀과 먹이를 찾는 놀라운 생존력을 보인다. 이들은 하루 15kg의 이끼를 먹어야 하므로 끓임 없이 움직이며 툰드라를 헤집고 다녀야 한다. 유목에서 소금은 동물들을 이끄는 강력한 무기여서 야크, 양, 염소 등을 유목하는 이들에게 필수품이다. 순록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소금섭취를 의존해 왔다. 그래서 무리를 지으면서 인간을 우두머리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소금은 곧 권력이었다. 인간이 길들여서 ‘길들일 순(馴)’을 붙여 순록(馴鹿)이라 했다. 순록은 쓸개가 없고 되새김질하는 반추동물이라 근본이 순하다.

순록은 아담한 루돌프 사슴이 아니고 거대하다. 체중은 150(90~210)kg, 어깨 높이가 1.5m쯤, 몸길이는 2m 정도 되는 매우 큰 동물이다. 순간 70km/sec로 달리므로 툰드라 지대에서 속도로 이길 자가 없다. 순록은 수컷과 암컷 모두 뿔을 가지고 있다. 뿔 안에 피가 통하고 신진대사가 이루어져 하루에 2cm까지 매우 빠른 속도로 자라므로 온기가 느껴진다. 이러한 성정(性情)이 녹용에 담겨 있다. 짝짓기 시절이 되면 녹용은 각질화 되어 최고의 위세와 성징을 과시하며 경쟁자와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처럼 12월 짝짓기가 끝나면 낙각(落角)이 되어 떨어진다.

암컷 순록은 낙각이 안 되므로 겨울이 오면 작고 멋진 뿔을 자랑하며 썰매를 끄는 알바를 한다. 사슴과 동물은 매년 새로운 뿔이 소생해 자라는 유일한 포유류다. 순록은 6개월 극야(極夜)의 어두운 환경에 적응해 시각(視覺)을 진화시켰다. 가시광선 밖 적외선 영역의 파장까지 볼 수 있고, 안구 내 반사판의 단백질 구조가 겨울에 더 촘촘해져 빛을€더 잘 볼 수 있게 해서 야간운전을 가능하게 했다.

눈 덮인 설원의 아름다움 이면에는 뼈를 후벼 파는 시리고 아린 추위가 공존해 있었다. 의식주가 어렵던 시절 사람들은 동물의 본능처럼 강인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웠다. 혹독한 자연환경이 핀란드인들의 불굴의 정신과 투혼을 만들었다. 그들은 아홉 마리 순록이 끄는, 하늘을 날고 야간운전이 가능한 썰매를 준비해두고 터키 출신인 산타할아버지를 스카우트해 왔다.  

 

자작나무 숲에서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 소나무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자작나무 숲에서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 소나무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자작나무숲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꿈을 키웠다!

여름은 낮이 길고, 겨울은 밤이 긴 이 지역에서는 극양수(極陽樹)라고 불리는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이들은 키도 커서 평균 20m에 달한다. 성장 생육기가 아주 긴 여름 백야(白夜)에는 긴 시간 광합성과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밤이 긴 겨울 극야(極夜)에는 모든 지상부의 수분과 영양분을 뿌리 아래로 내려 버리고 영하 20~30도에서 침묵의 동안거(冬安居)를 치르는 것이 자작나무다.

쭉쭉 뻗어 오른 하얀 자작나무의 시원한 몸매를 보면 기분이 좋다. 5월에 연두색 잎조차 상큼하다. 짙고 무성한 여름이 지나고 늦은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든 잎이 마지막으로 아름답게 세상과 대면하다가 아래서부터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결자해지, 회자정리하면서 모든 가식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온 몸을 드러낸다. 추위에 최고 강한 자작나무는 겨울이 되면 되레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설경 속에서도 자작나무는 경이롭고 신비한 빛을 발한다. 그래서 한국의 북쪽 샤먼(Shaman, 巫堂)들은 자작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았다.

동학농민혁명 봉기 당시 흰옷을 입은 백성들은 사또와 아전 같은 탐관오리들의 불의에 항거하며 죽창과 쇠스랑을 들고 나섰다. 봉기를 앞두고 죽창을 든 흰옷 입은 농민들이 서 있으면 하얀 산 같고, 앉아 있으면 대나무 산 같다고 해서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나왔다. 쭉쭉 뻗은 대나무 죽창은 세상을 바꾸는 분노와 응징과 혁명을 상징했다.

하늘로만 솟구친 하얀 자작나무 숲도 군락을 이루면서 산처럼 늠름해졌다. 그래서 쭉쭉 뻗은 자작나무는 하늘과 소통했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말처럼 추위가 오면 가장 마지막까지 돋보이는 것이 자작나무다. 자작나무는 햇빛을 좋아하고 산불이나 산사태 등으로 빈 땅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가 순식간에 숲을 만들어 빠른 속도로 자란다. 구한말 일제의 압제를 피해서 만주와 간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던 흰옷 입은 백성들의 마을이 연상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후 적백내전 당시 매서운 추위 속에서 수천수만의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들, 볼세비키와 멘세비키들은 정확한 영문도 모른 채 서로에게 증오와 저주, 폭력과 학살을 가했다. 이들은 서로를 피해서 자작나무숲에 숨어 상처를 치유하고 꿈을 키우며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자작나무는 이들의 한과 원망, 증오와 사랑, 꿈과 희망을 다 들어주려는 듯 다시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엔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박기동, 부용산 I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엔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박기동, 부용산 I

 

#지리산을 철쭉으로 물들였던 빨치산의 노래!

2월엔 매화, 4월이 되면 철쭉과 진달래, 6월이면 찔레꽃이 핀다.

<부용산>의 시인 박기동(1917~2004)은 주먹과 꼬막, 소설 <태백산맥>으로 유명한 떼다리[벌교(筏橋)] 출신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당대 인텔리였다. 그에게는 ‘박영애’라는 24살 된 어여쁜 여동생이 있었는데, 결혼하자마자 폐결핵을 앓다가 죽었다. 부용산 중턱에 죽은 누이를 묻고 내려오다 그녀를 회상하며 박기동이 쓴 시가 <부용산>이다.

박기동이 근무하던 목포 항도여중(6년제, 현 목포여고)에는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안성현(1920~2006)이라는 음악선생이 있었다. 안성현의 15살 누이 안순자도 폐결핵으로 죽었다. 공교롭게 두 동생들은 1947년 같은 해에 폐결핵으로 오라비들 곁을 떠났다. 연이어 1948년 총명하고 어여쁜 16살 여제자 김경희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이런 사정으로 가슴 저미는 박기동의 시 <부용산>과 안성현의 애달픈 곡조가 만나 폐결핵으로 죽은 두 누이와 한 제자를 그리는 제망매가(祭亡妹歌)가 나왔다.

노래 <부용산>은 1948년 항도여중 학예회에서 발표되어 유명해졌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이, <부용산>은 날개를 달고 목포를 떠나 전라도 각지로 퍼져나가다가 지리산으로도 올라갔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산으로 올라간 산사람, 빨치산, 남부군들도 언제부턴가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에 의하면 “산으로 간 빨치산들이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생활을 하면서 떠나온 고향마을과 가족들 생각에 애절한 마음으로 <부용산>을 불렀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남부군의 일원이었던 어떤 분은 자신의 처지가 애처롭고 비참하게 죽어간 동지들이 불쌍해서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라는 구절에 이르러 사무쳐 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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