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목포 유달산 둘레길

 

무안반도 남단에 자리한 목포는 동쪽에 입암산(121m), 서쪽에 유달산(228m), 북쪽은 양을산(156m)과 지적봉(189m), 남쪽은 영산강 하구와 맞닿은 항구도시로 고하도 눌도 달리도 등 6개의 유인도와 5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고 있다. 나주의 남쪽 포구라 하여 ‘남포’로 불렸다가 ‘맑포’를 거쳐 목포가 되었단 말도 있지만 지형상 목처럼 중요한 역할을 해 ‘목개’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해 목포가 되었단 설이 더 유력하다.

 

바다와 도심 조망이 시원한 목포 유달산
바다와 도심 조망이 시원한 목포 유달산

 

산에 갈 때 등산복(아웃도어 의류)을 안 입은 사람은 거의 없지만 산이 아니어도 등산복 차림을 한 이는 흔히 볼 수 있다. 일상 등산복은 가끔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사실 등산복이나 경등산화만큼 편한 것도 없지 않은가. 유달산을 등산복 풀장착으로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간혹 외지에서 온 이들이 그럴 뿐 목포시민들은 대부분 가벼운 옷차림이다.

 

유달산의 동백꽃
유달산의 동백꽃

 

동백꽃 가득한 유달산둘레길

몇 해 전 이 산을 함께 오른 친구도 그랬다. 등산화에 등산복, 배낭까지 꺼내든 기자와는 달리 휴가를 내고 달려온 친구는 코트 차림이다. “등산복이랑 배낭 없어?” “유달산은 배낭 없이 가도 될 걸?” 구두를 벗고 트렁크에 상시 대기 중인 등산화로 갈아 신으며 여유 있게 웃던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순천 봉화산둘레길도 그렇고, 진주에나길도 그랬다. 배낭에 카메라를 들고 걷는 기자를 동네 사람들은 낯설게 쳐다보곤 하였다.

목포시 서남쪽 유달산은 산행으로도 무리가 없는 높이지만 둘레길은 둘레길대로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목포시 홈페이지가 소개한 대로라면 “다도해의 경관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길”이기도 하다. 어디서 시작하든 출발지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인데 보통 유달산주차장에서 출발해 목포시사~달성사~특정자생식물원~조각공원~어민동산~봉후샘~낙조대~아리랑고개~수자원 뚝방길~학암사~유달산휴게소~유달산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한다. 이 경우 약 6km에 2시간 30분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짧다.

 

군량미로 위장했다는 노적봉과 인근 풍경
군량미로 위장했다는 노적봉과 인근 풍경

 

노적봉 0.3km, 달성공원 0.5km라고 적힌 유달산주차장 이정표에서 걷기를 시작한다. 왼쪽의 노적봉은 이름만 놓고 보면 산중 봉우리 같지만 해발 60m의 바윗덩이다. 이 바위엔 기특한 전설이 있다. 명량대첩 이후 전열을 재정비 중인 조선 수군에겐 군량미가 턱없이 부족했고, 왜적이 쳐들어오면 영락없이 함락될 위기였다. 시름에 빠진 조선군은 노적봉 앞에서 기지를 발휘한다. 이 바위에 볏짚을 덮어 산더미처럼 쌓인 군량미로 위장을 하고, 새벽엔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밥 짓는 쌀뜨물처럼 보이게 한 것. 유달산 앞바다에 진을 치고 수군을 염탐하던 왜적들은 결국 기가 꺾여 물러났고, 덕분에 조선 수군은 위기를 벗어났다는 얘기다.

이정표에서 숲으로 들어선 다음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 걷기로 한다. 숲은 겨울에도, 이른 봄에도 초록이었다. 아직 볕을 못 본 몇 그루의 나무만 메마른 때깔로 그늘져 있었다. 드문드문 겨우 새싹을 틔운 가지가 보였지만 길의 대부분은 초록색으로 물이 들었다. 붉기도 하고 분홍이기도 한 동백은 봄기운 속에서 순수한 빛을 발했다. 달성사 담장 너머 목련은 어두운 밤 켜진 등불처럼 환하게 빛을 뿜었다. 봄의 유달산은 예쁘다.

 

달선각과 목포시내
달선각과 목포시내

 

원점회귀 가능한 짧은 코스

1915년 노대련대사가 창건한 달성사에는 ‘옥정’이란 우물이 있다. 바위 굴 30척을 뚫어 100일만에 샘물이 솟았는데, 부정한 사람이 사용하면 일순간에 물이 사라진다는 신비의 우물이란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불삼존불상과 목조지장보살반가상도 있다. 모두 조선 중기 작품이다. 키를 낮춰 달성사 앞 이정표를 살펴본다. 산을 형상화한 녹색 그림엔 각각 두 개의 화살표가 그려졌다. 도심의 산이라 거미줄처럼 길이 퍼졌는데 그때마다 이 화살표를 길잡이 삼아야 한다.

특정자생식물원과 달성공원을 지난다. 쉬어가기 좋거나 조망이 좋은 곳엔 여지없이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길은 걷기에도 좋고 쉬기에도 좋다. 특별히 모나거나 거칠지도 않다. 이번엔 조각공원이다. 1982년 11월, 우리나라 최초 야외 조각공원으로 개원해 우수한 작품들을 전시해오다 2008년 “자연, 문화, 조각”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선정 교체해 지금에 이른다. 예술성 높은 작품에 더해 야외음악당, 분수, 휴게소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역시 시민과 여행객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조각 작품도 멋있지만 좌측 산줄기를 오가는 해상케이블카가 더 눈에 띄었다. 붉은색 캐빈은 하늘을 떠다니는 동백 같고, 하얀색 캐빈은 봄의 절정에 선 목련처럼 밝았다. 목포까지 왔다면 한 번 타보는 것도 좋다.

 

달성사 담장 너머의 목련 봉오리.
달성사 담장 너머의 목련 봉오리.

 

무던한 길은 딱 어민동산까지다. 어민동산은 어업인들의 풍어만선을 기원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목포 출신 시인 김지하의 ‘바다’가 새겨진 시비 등이 있는 공원이다. 어민동산 안내판만 있을 뿐 둘레길은 어민동산을 직접 관통하지 않는다. 이 안내판을 기점으로 잠시 경사를 높인 길은 낙조대까지 이어진다. 낙조대에선 케이블카 중간 경유지(스테이션)이 있는 고하도, 목포대교, 암태도, 달리도, 쪽박섬, 또 바다 너머 해남군이 보인다. 고하도는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107일동안 머물면서 전력을 재정비해 노량해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곳이다. 언덕 위 벤치에 앉아 잠시 다리쉼을 하고 옛수원지를 지난다.

길은 잠시 마을을 통과한다. 옥상 빨랫줄에 깃발처럼 걸린 옷들은 느긋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등산객 출입금지’라고 쓰인 안내판 앞에서 둘레길 이정표는 왼쪽 계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을길을 따라 걷는 것도 좋지만 사생활 침해와 소음 공해는 어쩔 수 없다. 가지 말라는 곳은 가지 않는다. 막바지 오르막을 올라서면 오포대(지방문화재 제138호)가 있는 유달산휴게소다. 오포대엔 대포 천자총통이 있다. 불과 사오십 년 전만 해도 오포대를 관리하는 직원이 있었고, 정오가 되면 이 오포대에 올라 화약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게 또 당시에는 좋은 구경거리였다. 여기서 유달산주차장은 겨우 100미터, 어느새 출발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암릉으로 이뤄진 유달산 정상부.
암릉으로 이뤄진 유달산 정상부.

 

유달산 꼭대기 일등바위

둘레길도 2시간, 산행도 2시간, 난이도도 쉬운 편이어서 온 김에 산행과 둘레길을 겸하면 좋다. 산행 코스가 둘레길과 만나므로 산행 후 둘레길로 하산해도 된다. 산행 역시 원점회귀여서 차를 갖고 가도 부담이 없다. 목포 특유의 맛집도 많고, 거리도 예쁘다. 해상케이블카를 타고 고하도에 내리면 해안 산책도 할 수 있다. 그밖에 옥단이길, 입암산둘레길. 양을산둘레길이 더 있다. 목포는 걷기 여행에도 제격인 도시다.

군량미 위장용으로 쓰였던 노적봉을 등지고 계단을 올라선다. 앞선 둘레길에서 주차장으로 하산했던 그 길목이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 노래비가 저 앞에 있다. 주먹패가 등장하는 영화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 ‘목포는 항구다’ 등과는 달리 목포를 주제로 한 노래는 대체로 서글프다. 호남선 종착역 때문일까. 사랑하는 사람은 늘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고 사라지고, 남은 사람은 쓸쓸히 술잔을 기울이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이니 말이다.

 

목포해상케이블카. 타면 좋긴 한데 산에는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목포해상케이블카. 타면 좋긴 한데 산에는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발아래엔 벌써부터 시가지가 펼쳐진다. 풍경이 보이는 곳마다 어김없이 누각이 들어섰다. 달선각과 ‘흰 구름 쉬어가는’ 유선각을 지나면 관운각이다. 해상케이블카가 바로 눈앞에서, 또 머리 위에서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목포 시내 북항스테이션을 출발해 유달산 정상부와 바다 너머 고하도에 이르는 총 길이 3.23km의 케이블카다. 바닥이 투명한 크리스탈 캐빈에선 유달산과 고하도 바다가 마치 드론 영상처럼 내려다보인다.

갈래 길이 많아 헷갈릴 땐 유달산 정상인 ‘일등바위’ 방향을 따라간다. 길은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졌다. 계단을 올라서면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율동바위)다. 고려 시대엔 봉수대가 설치됐을 만큼 사방 조망이 시원한 곳이다. 옛날 옛적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이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세 마리의 학(삼학도)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을 타고 극락세계로 갔다는 전설이 있다. 보리마당에서 물좀 마시고 이등바위로 걸음을 옮긴다. 노적봉에서 일등바위까진 1.3km, 일등바위에서 이등바위까진 0.7km이다.

돌계단을 올라 이등바위에 오른다. 뒤돌아서면 금방 지나온 일등바위와 한때 간이매점이 있었던 소요정이 보인다. 이등바위엔 똥바위가 있다. 다른 이름은 수도바위다. 모양은 같은데 보는 이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별다른 이정표 없는 삼등바위를 지나면 어민동산과 조각공원으로 길이 나뉜다. 두 곳 다 이미 걸어온 유달산둘레길이고, 두 곳 다 출발장소인 주차장으로 길이 닿는다. 이제부턴 산행 끝, 둘레길 시작이다. 익숙한 길 위에서 모처럼 심호흡을 한다. 남쪽의 바람엔 봄의 절정이 실렸다. 흐음, 폐부 깊숙이 봄을 담는다. 배낭 없이 걷기 딱 좋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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