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치유탐방로

전남 구례_매화향 가득한 산사의 봄

 

그 옛날 산, 특히 지리산깨나 다녔다는 사람치고 화엄사를 모르는 이는 흔치 않다. 성삼재 도로가 개통된 뒤에도 산꾼의 자존심 혹은 통과의례처럼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대형배낭을 메고 이른바 ‘화대종주’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다. 그 옛날 산꾼들은 이제 나이를 먹었고, 신진 산꾼은 생각만큼 늘지 않았다. 화엄사 코스는 그렇게 서서히 잊힌 길이 되어 있었다.

 

글 사진 · 황소영 기자

 

남도만큼 바쁜 봄도 없다. 동백, 매화, 산수유, 벚꽃…. 겨울에도 꽃은 피지만 꽃이 피었다 하여 겨울을 봄이라고 말할 순 없다. 3월은 때때로 “겨울처럼” 춥지만 그렇다고 3월을 겨울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남도 중에서 더 남도엔 이미 2월에 동백이 피었다. 섬진강가의 매화도 2월이면 꽃잎을 연다. 지리산의 봄은 섬진강에서 시작해 계곡을 타고 능선 품으로 소리 없이 진격 중이다.

 

 

화엄사, 홍매의 아름다움

한 정치인은 입장료 받는 절집을 “봉이 김선달”에 비유했다 곤욕을 치뤘다. 적어도 불자가 아닌 산꾼 입장에선 꼬박꼬박 사찰 입장료를 내는 일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런 이유로 이슈의 중심에 선 곳 중 하나가 지리산 천은사였다. 노고단(1507m)에 가려면 천은사 입장료를 내야 했고, 혹여 “산에 가는데 왜 내요?” 따지기라도 하면 “그럼 고소를 하시던가!” 쌍방간에 고성이 오가기 일쑤였다.

군내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직원은 버스 맨 뒤에서부터 앞으로 이동해가며 차례로 돈을 걷었다. 민원이 많아지자 아예 매표소 직원들은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니 돈을 내고도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물론 다 과거의 일이다. 천은사 입장료는 지난 2019년, 30여 년 만에 폐지됐다.

화엄사는 사정이 다르다. 화엄사를 통해 노고단을 오르는 이들은 천은사만큼 많지 않다. 화엄사는 화엄사만으로 충분한 여행명소여서 사람들은 온전히 화엄사를 보기 위해 이 절을 찾는다. 화엄사 점심 공양은 제법 맛있다. 입장료 3500원이 점심값으로 부족할 정도다 (단, 점심 공양은 코로나 현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30여 가지의 사찰음식 강의도 1년에 두 차례 운영 중이다.

3월은 화엄사가 제일 붐빌 때다. 사찰 한쪽에 붉게 핀 매화 덕분이다. 붉은색이어서 홍매지만 붉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매’로도 불리는 꽃. 화엄사를 방문한 <명찰순례>나 <답사여행의 길잡이> 어디에도 이 꽃을 소개하지 않은 걸 보면 홍매가 유명해진 건 길어도 20여 년 전, 아마 누군가의 사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사진 한 컷에 쉽게 매료된다. SNS가 가져온 신풍속도일지도 모르겠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각황전(국보 제67호), 동서오층석탑(보물 제132, 133호), 대웅전(보물 제299호), 또 10년간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최근에 재공개된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 등 국가 지정 문화재를 다수 보유한 사찰이다. 홍매는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 나한전과 삼각점을 이룬 곳에 홀로 피었다. 조선 숙종 때 각황전 중건을 기념해 계파선사가 심은 나무다. 족히 3백 년은 되었을 나무는 젊은 꽃들이 모두 지고 난 후에야 느릿느릿 꽃을 피운다.

화엄사 경내에서 곧장 올라서면 구층암이다. “구층암의 매력은 자연을 닮은 데 있다. 무엇 하나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없다. 요사채의 모과나무 기둥은 단연 자연스러움의 으뜸이다. 모과나무를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가져다 썼다. 천불의 부처가 모셔진 천불보전 앞에 단아한 석등과 배례석, 모과나무가 있다. 복원하지 못하고 듬성듬성 쌓아놓은, 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마저 자연스럽게 보인다.” 구층암 안내판에 적힌 글도 정겹다. 복잡한 한자나 전문용어로 이뤄지지 않았다. 암자까지 가는 길도 오롯하고 예쁘다.

구층암에서 길을 더 이으면 길상암에 닿는다. 길상암에도 홍매가 있다. 동백도 많다. 무엇보다 ‘화엄사 매화’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각황전 홍매보다 백 년 이상 선배다. 이 화엄매는 들매화다. 사람이나 동물이 먹고 버린 씨앗에서 스스로 싹이 터 자란 것으로 추정된단다. “개량종보다 꽃이 작고 듬성듬성 피지만 단아한 기품과 짙은 향기는 개량종이 따라오지 못한다.”고 적혔다. 토종 매화 연구의 학술적 가치도 크다.

 

 

화엄사에서 연기암까지

화엄사와 카페 ‘다향’ 사이에 이정표 하나가 섰다. 천왕봉 32.5km, 노고단고개 7km, 고동색 게이트 쪽으로 팔을 뻗은 나무판에 적힌 숫자다. 연기암 방향은 두 군데다. 노고단 쪽은 2km, 오른쪽 카페 방향은 3.9km. 숲길인 노고단 쪽으로 올랐다가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약 6km, ‘치유탐방로’라는 이름처럼 힘들지 않고, 길지도 않고, 계곡 물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 몸도 마음도 위로 받는 길이다. 코스가 짧으니 3월에 왔다면 반드시 화엄사와 구층암까지를 돌아보는 게 좋다. 그래야만 완성되는 봄의 길이다.

구례군 문화해설사 임세웅 씨는 이 길의 이름을 ‘벽암대사길’로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화엄사는 승병 대장으로 활동한 벽암대사 각성(1575~1660)에 의해 재건됐다. 벽암은 남한산성 공사에도 참여해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다. 임씨의 설명대로라면 “조선 인조(1630년) 때 벽암선사께서 임진란으로 폐허가 된 화엄사의 터를 더듬어 노고단까지 올라간 길이며, 8원81암자가 흔적도 없이 30년간 폐허가 된 것에 대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에 젖었던 길”이다.

연기암까지만 가는 길은 부담이 적다. 동백과 대숲, 참나무가 빼곡하다. 4월 초순까진 성삼재행 버스가 다니지 않아 (적설량이 많으면 택시 운행도 중단) 겨울엔 노고단으로 향하는 대형 배낭꾼들이 곧잘 보이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은 코로나19로 대피소 숙박이 금지됐고, 덩달아 박배낭을 멘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어졌지만 말이다. 

볕이 드는 나무 아래 앉아 주섬주섬 간식을 먹는 이들도 있다. 화엄사에서 물을 마셨거나 (경내에도 카페가 있다) 다향에서 차를 마셨다면 연기암까지 가 닿는 40여 분간 딱히 무언갈 먹지 않아도 상관없다. 연기암 직전에 또 카페가 있고, 연기암에 샘물도 있어 더더욱 배낭 멘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길을 걷는 대부분은 노고단에 갈 생각이 없다. 봄이 오는 계곡을 사브작사브작 따라 걸을 뿐.

젊은 아가씨, 그렇게 보이는 여자가 계곡 너머 바위에 앉았다. 책을 읽고 있을까? “스마트폰 보겠지!” 일행의 말에 분위기가 깨진다. 멀어서 정확히 보이진 않지만 아직은 서늘한 계곡가, 저이는 왜 차가운 돌 위에 엉덩이를 붙인 채 숙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을까. 배낭을 멘 사람도 더러 보인다. 차림새로 보아 노고단까지 갈 기세다. 누군가에게 이 길은 또 다른 목표가 되기도 한다.

다리를 건너면 계곡은 멀어지고 산은 가까워진다. 잠시 오르막을 올라서면 차도 다닐 수 있는 시멘트 도로다. 왼쪽으로 카페가 보인다. 연기암은 그 뒤에 있다. 한 여인이 금빛으로 도색 된 부처님 손바닥에 이마를 대고 소원을 빈다. 발아래 섬진강이 흐른다. 셔터를 누르지만 S자 굴곡을 담기가 쉽지 않다. 그저 누군가의 소원을 뒤로 한 채 바다로 떠나는 섬진강을 바라본다.

연기암을 등지고 임도 쪽으로 방향을 틀면 이정표가 나온다. 갈림길에서 노고단까진 5km. 앞서 설명한 것처럼 화엄사 코스는 성삼재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노고단으로 오르는 가장 대중적 길목이었다. 주능선 종주의 출발점은 화엄사였고, 많은 종주꾼들이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배낭을 메고 이 길을 올랐다. 코가 땅에 닿을 만큼 힘들다는 코재를 지나 임도(무넹기)에 서면 일순간 딴 세상이다. 땀을 뻘뻘 흘리고 선 산꾼을 슬리퍼에 구두 차림의 탐방객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기도 했다. 요즘이야 덜하지만.

도로가 뚫리면서 화엄사 코스를 찾는 이는 줄었다. 그렇게 서서히 기억 너머로 사라진 길이다. 하지만 화엄사 코스의 진면목은 이제부터다. 불현듯 길을 이어 노고단까지 걷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무식하리만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올랐던 길, 전남 구례 화엄사로 올라 경남 산청 대원사로 하산했던 화대종주의 기억, 그해 겨울 가죽점퍼 차림으로 올랐던 어린 학생과 양은냄비를 배낭 밖에 달고 걸었던 젊은 커플의 소박한 그림자가 저 숲 깊고 어둑한 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솟아올랐다 사라진다.

부러 오르지 않는 한 이제 종주꾼들도 화엄사를 거치지 않는다. 길은 그렇게 잊히지만 그 길을 걸었던 젊은 날의 추억은 좀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조만간 저 길을 올라야겠다. 헉헉, 거친 숨을 토해내는 20여 년 전의 그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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