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사계곡길

 

경남 산청_지리산 종주산행의 길목

 

대원사는 대원사 그 자체로도 충분하지만 보통은 지리산과 짝을 이뤄 ‘대원사 코스’로 더 알려져 있다. 이 코스는 대원사~유평마을~치밭목대피소~중봉~천왕봉으로 이어지는데 천왕봉까지 가닿는 여러 등산로 중 가장 길어 백무동이나 중산리보단 찾는 이가 많지 않다. 계곡길은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유평마을에서 끝난다. 길을 더 이을 생각이라면 치밭목까지 다녀오는 것도 좋다.

 

글 사진 · 황소영 기자

 

 

진주에서 대원사로 가는 버스는 하루 일곱 대뿐인데 가장 빠른 게 1시간 후였다. 해가 짧은 계절인 데다 돌아올 시간까지 고려하면 마냥 기다릴 수가 없다. 10분 후에 출발하는 중산리행 버스를 탄 다음 덕산에서 내리기로 한다. 야간기차를 타고 지리산을 오갈 때가 떠올랐다. 서울을 떠난 기차는 남쪽의 새벽 속으로 미끄러지듯 스며들곤 했다. 진주에 도착한 산꾼들은 걸어서 터미널로 갔고, 터미널에선 다시 지리산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첫차 시간을 기다리며 들어섰던 해장국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진짜 지리산과 가짜 지리산

진주를 떠난 시외버스는 원지를 지나면서 시내버스가 된다. 단성, 남사, 소리당…. 타고 내리는 승객이 있을 때마다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덕산에 내려 대원주차장(버스 종점)까진 택시를 탄다. 20분 후면 오전을 지나 오후가 될 시간이었다. 흘끔흘끔 차창 밖을 보긴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일정을 어떻게 짜야 하나, 로 복잡해져 있었다. 주차장~대원사~유평마을로 이어진 대원사계곡길은 편도 3.5km, 출발지점으로 돌아와야 하니 왕복 7km이다. 그중 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의 2.2km는 길이 겹친다. 그냥 대원사까지 택시로 갈까? 어차피 같은 길을 되짚어야 하니까 2.2km는 돌아올 때 걸어도 되잖아. 마음속 갈등과는 상관없이 “네, 여기서 내려주세요.” 이미 택시는 운행을 멈추고 손님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을 겸하는 넓은 버스정류장엔 몇 대의 차량만 서 있을 뿐 공간은 계절처럼 을씨년스럽게 비어 있었다. 반달가슴곰 그림 옆에 ‘대원사계곡길’이라고 쓰인 하얀색 글씨가 보인다. ‘자연과 시간이 시작되는 곳’이라 적힌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면 소막골야영장과 대원사계곡길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탐방지원센터는 드라마 홍보장이 되었다. tvN 1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지리산’ 말이다. ‘지리산’은 제작비 300억에 ‘시그널’ ‘킹덤’을 쓴 김은희 작가, ‘미스터션샤인’ ‘태양의 후예’를 연출한 이응복 감독, 전지현 주지훈 성동일 등 출연 배우까지 화려해 방영 전부터 세간의 화제가 된 작품이다.

배경은 제목 그대로 지리산, 주인공은 공단직원인 레인저, 국립공원이 발 벗고 홍보에 나선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실제 지명을 제목으로 쓴 대가는 결코 녹록지 않다. 시청률은 높지만 적어도 지리산깨나 다녔다는 이들에겐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아도 너무 많았기 때문. 피켈로 암벽 오르기, 뒷면에 ‘中峰’이라 적힌 천왕봉 정상석, 반야봉 너머로 지는 일몰을 일출 장면에 쓰기 등등. 극중 공단직원이 수시로 과태료를 끊는 장면, 민원인을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 영웅적 장면 등도 나온다. 심지어 “1시간짜리 아웃도어 광고” “전설의 고향” 식의 비아냥까지 듣고 있으니, 지리산을 제목으로 정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대원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

탐방지원센터 앞에는 “이곳은 지리산국립공원 동쪽 자락에 자리한 대원사계곡입니다”로 시작하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옛사람들의 유람길에서 목마름을 채워주며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슬픔이 서려 있고 지리산 빨치산의 아픈 이야기가 스며있는 역사의 골짜기”라고도 적혔다. 굳이 가락국이나 6·25전쟁까지 거슬러 갈 필요는 없다. 슬픔과 아픔은 1998년에도 있었다. 연합뉴스 기사에 의하면 그해 여름 지리산 폭우로 68명이 사망했고 17명이 실종됐다. 경남, 그러니까 이곳 대원사계곡의 피해가 제일 컸다. 62명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급류에 휩쓸린 이들은 사고지점에서 수십여km 떨어진 바다까지 흘러갔다. 경남일보 최창민 기자의 기록은 더 참혹하다. “누군가가 건져놓은 텐트 안을 살피던 중 미처 수습하지 못한 어린이의 시신을 발견해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다.”

이름처럼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길은 걷기 좋은 숲길이다. 왼쪽 아래엔 계곡, 오른쪽 위엔 대원주차장에서 대원사를 오가는 차도가 있었다. 계곡과 도로, 그 중간에 데크로 이어진 숲길이 있다. 가을은 깊었지만 길을 걷는 이는 많지 않았다. 수량도 적은 데다 상류에서 공사를 하는지 물도 거의 흙탕물에 가깝다. 주차장에선 분명 맑았는데 하늘도 금세 회색으로 물이 들었다.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인적 없는 숲엔 그네의자가 놓였다. 그간의 경험으로 저 의자가 얼마나 편한지 안다. 잠시 앉았다 간다. 흔들흔들, 그네의 각도가 바뀔 때마다 풍경도 조금씩 바뀌었다.

대원주차장에서 1.1km를 올라서면 도로에 닿는다. 도로 옆으로 데크가 있어 걷기에 위험하진 않다. 나중에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갈 땐 아래의 숲길로 가야 한다. 다른 길로 가겠다고 도로를 따라 그냥 내려서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하긴 이 계곡길이 생기기 전까진 이 좁은 도로를 걸어 대원사까지 갔었다. 아니, 대원사에서 유평을 지나 등산로 입구까지 지루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지나는 차가 있으면 손을 들고 태워주십사, 사정을 하던 길이었다.

고도가 낮아서인지 아직 아래의 단풍은 빛깔이 고왔다. 10월 중순에 찾아온 추위로 억새와 단풍은 제 색을 미처 찾기도 전에 냉해를 입었는데 다행히 깜짝추위 속에서도 몇몇 나무는 용케 늦가을 특유의 때깔로 걷는 이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나무도 정신이 없을 것 같다. 여름 같은 가을이었고, 겨울 같은 가을이었다. 가을 같은 가을은 몇 날 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11월 10일엔 지리산 일대에 폭설이 내렸다.

 

 

대원사 지나 유평마을까지

대원사는 공사 중이다. 흐린 하늘과 뚝딱대는 소음 속에서도 샛노란 은행나무만은 오래 살아온 세월만큼 과묵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웅전에 그림자를 드리웠던 커다란 배롱나무는 꽃과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화대종주, 그러니까 화엄사에서 출발해 대원사로 하산하는 종주 땐 너무 힘들어 옆에 두고도 오를 기력이 없었는데 대원사계곡길이라면 당연히 주인공인 대원사를 빼먹어선 안 된다.

우리나라 3대 비구니 참선 수행 도량인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했다. 그 뒤 폐사되었던 것을 조선 숙종 11년(1685) 다시 지어 대원암이라 불렀고, 고종 27년(1890) 보수 중창해 대원사가 되었다. 여순사건 때 빨치산 토벌로 모두 불타 없어진 것을 1955년 법일스님이 재건해 지금에 이른다. 원래는 마을 이름을 따 유평계곡이었던 것이 이 사찰로 인해 대원사계곡이 되었다. 전에는 문이 닫혀 있어 보지 못한 다층석탑(보물 제1112호)이 오늘은 문을 활짝 열고 여행객을 맞는다. 탑 가까이까진 갈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좋다. 높이 5.55m의 이 석탑은 여느 탑과는 달리 색이 붉다. 철분이 많은 화강암으로 만든 까닭이다.

대원사를 나와 방장산교를 건너 데크 숲길로 들어선다. 계곡 쪽으로는 모두 ‘출입금지’ 금줄이 쳐 있다. 대원사부터는 사람이 많다. 전 구간을 다 걸을 수 없는 이들은 대원사에 차를 세우고 왕복 2.6km를 걷는다. 유평마을에 식당가가 밀집해 있으니 적당히 걷다 맛있는 밥으로 배를 채우고 쉬엄쉬엄 내려서기 딱 좋은 거리다. 탁한 물줄기 속에서도 용소는 특유의 초록색으로 빛났다. 대원사계곡에서 가장 크고 예쁜 돌개구멍(포트홀)이다. 돌개구멍은 바위의 작은 구멍에 들어있던 모래나 돌들이 물살이 몰아칠 때마다 믹서처럼 돌아가며 만든 구멍을 말한다. 천천히 걸었는데도 어느새 종점이 코앞이다.

본래 이름은 밤밭골인데 이게 율전이 되고, 율전이 다시 유평이 되었을 것이라는 마을에서 대원사계곡길이 끝난다. 요즘은 보통 차량 통행 가능한 성삼재에서 중산리까지 종주를 하지, 화대종주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음 같아선 고도를 높여 치밭목까지 가고 싶지만 유평에서 왕복 12km 남짓, 대원사부터치면 천왕봉(1,915m)까진 왕복 28km이다. 코로나19로 대피소 숙박이 불가능해 먼 길은 새벽 일찍이 아니고선 다녀올 재간이 없다.

마을 다리를 건너 도로로 간다. 왔던 길 그대로 되짚어도 되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산채비빔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도로를 따라 걷기로 한다. 아래쪽에 비해 위쪽 도로는 걷기가 낫다. 이렇게 걸어야 좀 전에 지나온 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계곡 너머로 조금 전 지났던 데크와 그 길을 오가는 이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가을과 겨울 사이를 오가며 지리산자락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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