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로의 백패킹 연가⑦ _ 요세미티 국립공원

 

요세미티의 가을은 겨울을 만나고


글 사진 · 방승호(베이 산악회), 이병로 미국 주재기자 
 

베이 산악회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인 산악회다. 지난 가을, 베이 산악회 회원들은 요세미티 국립공원(Yosemite National Park)의 여러 트레일에서 백패킹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인기척에 놀라 게구멍으로 숨은 게들마냥 설렘에 들떠 부산하던 산악회 사람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요세미티에 범이라도 내려온 것인지. 백패킹 출발을 며칠 앞두고, 결국 행사는 무산이 된 형국이다. 

알고 보니, 그 원인은 범이 아니라, 급작스러운 일기 변화가 요인이란다. 주말 내내 눈폭풍이 요세미티를 강타하고 기온이 영하 7도 밑으로 떨어진다는 일기예보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폭설을 무릅쓰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필자들이다. 요세미티를 관통하는 120번 도로가 통제된다고 하여 비교적 안전한 리틀 요세미티에 베이스캠프를 치기로 한다. 의기투합한 다섯 명의 불굴의 용사가 요세미티로 향한다.

“가자 가자! 어디 첫눈 한번 씨게 맞아 보입시다.”

 

 

만추의 요세미티에서 부르는 노래

요세미티 밸리! 세계 각국에서 비행기 타고 찾아오는 유명한 국립공원이다. 나야 뭐, 샌프란시스코 베이의 집에서 세 시간 남짓 운전하면 당일에도 다녀가는 입장이니 이런 복도 없다. 오늘은 늦가을을 즐기고 첫눈을 맞이하기 위해 해피 아일스(Happy isles) 들머리에서 출발해서 8km 정도 올라 하프돔(Half Dome) 아래 계곡에 자리한 리틀 요세미티 밸리 캠프장(Little Yosemite Valley Campground, 이하 LYV 캠프장)으로 갈 것이다. 산행 고도는 약 800m다.

오늘의 산동무 베카와 만추에 접어든 산길로 들어섰다. 캘리포니아의 단풍은 볼품이 없지만 지금 올라가는 구간의 분위기는 그럴듯하다. 적막한 산길에 금빛 아스펜 잎사귀가 가을을 속삭이는 듯하다. 이윽고 오르막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존 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 이하 JMT)이다. 여기로부터 JMT의 남쪽 종점인 휘트니산까지 약 340km다. 작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구간별로 잘라서 다니고 있는데 내년에는 완주할 수 있으리라. 

이 지점부터 클락 포인트(Clark point)까지는 스위치백(Switchback, 지그재그)로 올라야 한다. 13kg 배낭을 지고 오르니 몸이 금방 후끈해지지만 가을 산행은 덥지 않아서 좋다. 눈앞의 절벽은 하늘을 찌르고 맞은편 봉우리는 시선을 가로막는다. 발길은 언덕을 넘어 탁 트인 정원 같은 클락 포인트로 안내했다. 정면에는 리버티 캡(Liberty Cap)이 우뚝 서 있고, 그 뒤에는 요세미티의 상징인 하프돔의 뒤통수가 뒷배를 서고, 오른쪽으로 네바다 폭포(Nevada Fall)가 예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어쩜 이렇게 멋진 구도를 연출할까?’ 

절벽 사잇길을 지나 네바다 폭포 위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며 땀을 식힌다. 크게 심호흡하며 주변의 가을 정취도 깊게 들여 마셔본다. 목적지가 눈앞이고 마음은 느긋한지라 급할 것 없는 발걸음은 요세미티의 가을을 한껏 누리고 있다. 시나브로 가을에 취한 것인지, 노래들이 절로 튀어나온다. 스르렁 스르렁 흥부가 박을 타듯 네바다 폭포를 미끄러지듯 지나고, 이내 미스트 트레일(Mist trail) 삼거리를 지나 살짝 오르막을 넘어간다.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에 발걸음이 여전히 즐거운 듯 배낭의 무게도 잊고 부지불식간에 LYV 캠프장에 도착한다.

“아니, 날씨가 이리 청명하고 좋은데, 눈폭풍이 오기는 한단 말이요?”  

 

 

위스키를 가지러 간 남자

“자, 어서들 오세요. 시장하시죠? 여기 스테이크도 짊어지고 왔어요.”

“아, 백패킹에서 이런 건 반칙인데…….”

부랴부랴 숙영준비부터 하고 모닥불에 모여 앉으니, 먼저 도착한 이 선생과 바다·둘리 부부가 갖가지 맛있는 먹거리를 꺼낸다. “방 선생님, 거시기 음용류 좀 알아서 가지고 오셨겠죠?” 스테이크를 짊어지고 온 이 선생이 풍류를 돋을 도수 높은 음료를 얼른 풀어 놓으라 채근한다.

에고, 근데 이걸 어쩌나. 가을 정취에 취해 중요한 녀석을 깜박 두고 온 것이다. 그런데 절박하면 통한다 했던가? 두드리면 열린다 했던가? 하늘은 스스로 구하는 자를 구한다 했던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바다·둘리 부부가 산 아래 주차해 둔 차에 선물용 위스키가 있다는 희소식을 전한다.

“아니 그럼 어서 모셔와야지요!” 

위스키의 존재를 듣자마자 이 선생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포터를 자청하며 일어선다. “맨몸으로 다녀와도 왕복 대 여섯 시간 거리입니다. 빗줄기도 굵어지고 있어요!” 일행들이 한목소리로 말려보지만 이 선생은 어느새 행랑에 초코바 한 개와 랜턴만 챙기고는 서둘러 출발한다. 마치 이몽룡의 어사출또 명을 받은 포졸마냥 총총 걸음을 내딛더니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다. 

을씨년스런 가을비를 가르며 내려갔던 이 선생은 눈사람이 되어 올라왔다. 4시간 반 만에 돌아온 이 선생의 행랑에는 묵직한 그것이 들어있었다. 한때는 오크통에서 잠시 살았다는 그 묘약 덕에 (사실은 이 선생의 그 열정 덕에) 우리는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 풍성한 저녁 만찬을 즐기며 늦은 밤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폭설이 몰아닥쳐오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금빛 박수로 채운 하얀 밤

이튿날, 아침부터 잿빛으로 잔뜩 찌푸리고 있는 하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폭설이 예보되어 바다·둘리 부부는 행장을 꾸려 아침 일찍 하산한다. 두 사람의 빈자리와 잿빛 날씨로 인해 LYV 캠프장에도 고요함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듯하다. 이 선생과 베카, 그리고 필자까지 남은 세 사람은 클라우즈 레스트(Clouds Rest)로 마실 산행을 진행하기로 한다. 

들머리를 지나 클라우즈 레스트에 반쯤 당도했을 무렵 구름이 짙어지더니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바람이 격해지고 기온이 뚝 떨어진다. 중지를 모아 하산을 결정하고, 관광객 모드로 전환하여 경치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다. 일찌감치 내려와서 베이스캠프에 장작 준비를 마치고 빈둥빈둥 느림을 즐긴다.

“요세미티 산중에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다니, 산중의 특급 호텔이 따로 없네요.” 

지칠 줄 모르던 우리의 담소가 수그러들 무렵, 먹통이었던 핸드폰의 신호가 잡힌다. 핸드폰으로 유튜브 음악을 듣다가 분위기를 제대로 잡아서 노래방을 틀어 이 선생과 주거니 받거니 노래 배틀을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빗줄기는 어느새 하얀 눈으로 바뀌고 모닥불은 타닥타닥 금빛 손바닥으로 박수를 치고 있다. 

눈에 말아먹는 라면은 동네 중국집 짬뽕보다 얼큰했고 위스키는 혀를 휘감고 내려갔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킨 듯, LYV 캠프장엔 모닥불 소리만이 정적을 가를 뿐이었다. 눈 내리는 LYV 마을에 유일하게 입주한 우리 일행은 각자의 텐트로 들어가 샤르락 샤르략 눈 내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하얀 밤을 맞이했다.

 

 

주거니 받거니 요세미티 연가

“빨리 나와 보세요!”

“워메~ 이것이 뭔 세상이란 말인가?”

흥분에 들뜬 베카의 목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꼬물꼬물 텐트에서 나왔다. 세상에, 십수 년을 산에 다녔어도 이런 폭설을 산에서 맞이하기는 처음이다. 여전히 눈발은 송알송알 그 굵기가 알차고, 연신 내리는 눈발을 맞으며 일행들은 깡총깡총 강아지처럼 뛰어다닌다.  

“에헤라 상사디여, 얼씨구~ 절씨구~” 순백의 풍광에 취해 사설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그저 지난밤 이 선생이 산 아래서 갖고 올라온 산토리 위스키 두 잔을 먹었을 뿐인데, ‘술 먹고 뻗어 자다가 산에서 내려와 보니 20년이 흘렀다’라는 풍문으로 떠도는 그 설화가 하룻밤 사이에 현실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순간, 이 선생이 풍류를 핑계로 훅 들어온다.

“방 선생님, 이 풍경에 시 한 수 짓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요세미티 연가를 주제로 한번 가보시지요.”

“좋지요. 풍류 한번 타 봅시다. 다만, 평측법, 운율 일절 무시하고 한마당 갑니다.”

 

秋上山金醉 (만추상선금엽취) / 만추에 산에 올라 금빛 잎새에 취하고

金火上空黑暗醉 (금화상공흑암취) / 금색 모닥불 오르는 공중 흑암에 취하고

黑天下雪白色醉 (흑천하설백설취) / 까만 밤 나리는 눈 그 백색에 취하고

白地下仙霞景醉 (백지하선하경취) / 하얗게 땅에 내린 신선의 몽환경에 취하다.     

 

“조오타!” 이 선생 답한다. “저도 그럼 화답으로 흉내 내어 한마당 갑니다.”      

 

秋欲擒金葉 (추욕금금엽) / 가을의 바람은 금빛 잎새를 묶어두는 것이거늘

日夜一樽酒 (일야일준주) / 한 밤 함께 나눈 술에

今秋白雪醉 (금추백설취) / 이 가을이 하얀 눈에 취하니

今冬看又來 (금동간우래) / 이 겨울이 또 다시 찾아옴을 보누나

 

이렇게 이 선생과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글도 나누었으니, 요세미티 산중 연가는 노오란 빛과 하얀 눈빛이었다. 첫눈 내린 11월의 어느 날, 요세미티의 가을은 겨울을 만나고, 우리는 하루 사이에 가을도 만나고 겨울도 만났으니, 함께 나눈 이 벅차고 진한 감동은 추억의 책갈피로 남아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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