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레고의 전설 디보나를 오르다!

 

팔자레고의 전설 디보나를 오르다!

 

글 사진 · 임덕용(꿈속의 알프스 등산학교)
 

미녀 클라이머 엘레우노라가 여유 있게 마지막 정상 슬랩을 오른다.
미녀 클라이머 엘레우노라가 여유 있게 마지막 정상 슬랩을 오른다.

 

150년 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

1871년 6월 1일 조선과 미국이 벌인 전투를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한다. 당시 미군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에 쳐들어왔다. 미군은 조선의 주요 수로였던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고, 조선의 거부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탐침을 하자 교전이 일어났다.

3일간의 교전 결과 조선은 광성보를 빼앗겼고, 어재연을 비롯한 수비 병력 대다수가 사망했다. 미 해군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했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으며,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당시 조선은 외국과의 접촉 범위가 가장 좁았던 시대였다. 조선은 사대(事大)와 선린(善隣)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과 일본 등 매우 제한적인 국가들과 외교를 유지했다. 이러한 외교는 중국을 중심에 두는 상하 관계로서 인식되어,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는 한편 일본 유구(琉球, 류큐), 섬라(暹羅, 태국) 등에 대해서는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으로 대했다.

이 때문에 17세기 이후 서양의 존재가 조선에 알려져 있었으나, 조선은 이들을 대등한 외교의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 정조의 신해박해 이후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여러 차례 박해를 가했고, 외국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바로 150년 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초대 코르티나 가이드들이 멋진 정장을 입고 기념 촬영을 했다.
초대 코르티나 가이드들이 멋진 정장을 입고 기념 촬영을 했다.
코르티나 초대 가이드인 안젤로 디보나는 당시 최고의 가이드이자 최고의 멋쟁이였다.
코르티나 초대 가이드인 안젤로 디보나는 당시 최고의 가이드이자 최고의 멋쟁이였다.

 

코르티나의 첫 알파인 가이드

150년 전 코르티나의 가장 대표적인 가이드를 말한다면, 안젤로 디보나(Angelo Dibona, 1879~1956)이다. 유명 조각가가 시내 중심지인 성당 아래에 그의 동상을 만들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디보나는 첫 공인 알파인 가이드는 물론 1911년 코르티나의 첫 스키 강사가 되었으며, 50년 동안 줄리안 알프스에서 몽블랑, 프랑스 도피네에 이르기까지 알프스 전역에 걸쳐 놀랍고 새로운 등반사를 써 내려갔다.

그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및 슬로베니아의 알프스 고산을 등반했다. 심지어 영국의 암·빙벽에 약 70개의 루트를 개척했다. 또한, 그는 1차 세계 대전 중 벌어진 산악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산악인이었다. 디보나가 남긴 전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당시 그가 초등한 수십 개의 루트 중 사용한 하켄이 단 15개였다는 사실이다. 하켄보다는 자연의 암각을 이용해서 당시에 이미 클린 클라이밍을 추구했던 셈이다.

해발 1,000m가 넘는 알프스의 6대 북벽 중 하나인 치베타(Civetta)에 첫 번째 6급 난이도의 등반이 탄생했을 때에도 그가 있었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던 묵직한 등반가였으며, 앞으로도 등산 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남을 것이다. 토파나 로제스에는 그의 이름을 헌사 받은 디보나 산장(Rifugio Dibona)이 있다.

 

멀리 소라피스 산군이 보이는 마지막 피치에서 다같이 기념 촬영을 했다.
멀리 소라피스 산군이 보이는 마지막 피치에서 다같이 기념 촬영을 했다.
좁은 침니 구간을 외곽 디에드로로 오르는 엘레우노라.
좁은 침니 구간을 외곽 디에드로로 오르는 엘레우노라.

 

웃음꽃 만개한 팔자레고 등반

최소 18~24피치의 600~800m가 넘는 벽을 오르려면 적어도 10~12시간의 등반을 해야 하고, 날씨가 아주 좋아야 한다. 그러나 120년 전 초등된 2개의 루트를 오르기에는 날이 안정되지 못했다. 3,000m가 넘는 거벽에선 언제 어디에서 안개가 끼어 등반 루트를 찾기 힘들게 하고 천둥 번개가 내리칠지 모른다. 첫날 우리는 디보나가 만든 대표적인 루트인 팔자레고 고개로 갔다.

평소 등반을 함께 하는 산 그림 화가 에른스트 뮐러와 이번에 동행할 코르티나의 미녀 클라이머를 수배했다. 난이도 7a를 온사이트로 등반하는 엘레우노라 꼴리(Eleonora Colli)는 미인이었기에, 입이 헤 벌어진 노친 뮐러의 입이 눈에 띄었다. 농담을 잘하는 71세의 뮐러가 7살이 되어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등반 내내 폭소가 터졌다. 120년 전의 디보나를 만난다는 고상한 생각은 웃음으로 모두 날아가 버렸다.

코르티나의 가이드인 까를로 꼬지(Carlo Cosi)가 도우미로 나서 등반을 리드했다. 키가 크고 미남인데다 시원스럽게 등반하는 그를 따라 주차장에서 20분 정도 올라가니 인기가 많은 디보나 루트에는 이미 두 팀이 오르거나 등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유 있게 사진을 촬영하기에는 이미 우리 앞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려 있었고, 위에서 낙석이라도 발생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이드 까를로가 물어왔다.

“내가 등반하는 식으로 해도 되나요?”

폴란드와 체코에서 온 무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까를로는 디보나 루트에서 약 20m 오른편으로 가더니 60m 로프 3동을 메고 루트가 없는 곳으로 7~8m마다 후렌드를 설치하며 시원하게 올라갔다. 60m 로프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 3~4개의 후렌드를 설치하고 2번을 더 오르니 먼저 등반을 시작한 폴란드와 체코팀 바로 위의 확보 점에서 등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루트 찾기가 쉽지 않은 타국 등반대들이 오히려 반가워했다. 여름휴가로 등반 온 이국의 클라이머들에게 우리 옆의 다른 확보점을 알려주고 위에서 사진을 찍어 주니, 고맙다며 사진도 보내 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한국의 <사람과 산>에 기사화 한다고 하니 매우 좋아하며 우리에게 선등을 흔쾌하게 부탁했다. 각 마디를 루트 파인딩도 안 하고 따라 올라올 수 있으니 그들도 편할 것이었다.

 

까를로가 다음 피치 선등을 해야 하는 엘레우노라에게 루트를 설명하고 있다.
까를로가 다음 피치 선등을 해야 하는 엘레우노라에게 루트를 설명하고 있다.
긴 팔다리로 시원한 동작을 구사하며 벽을 오르는 엘레우노라.
긴 팔다리로 시원한 동작을 구사하며 벽을 오르는 엘레우노라.

 

120년 전 디보나를 만나다

영어와 독어가 유창한 엘레우노라는 독일 관광성에서 2년간 일하다가 지금은 고향인 코르티나 관광성에서 독일어권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코르티나 관광성에는 엘로우노라처럼 스키, 크로스컨트리, 스노우보드와 클라이밍에 매우 능한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이전에 그들을 코르티나 가이드 협회 창립 150주년 행사장에서 만나 인사를 했었다. 그중에 가장 미녀였던 그녀가 오늘 등반의 공주가 되어 1명의 백기사와 1명의 청기사 그리고 1명의 황기사와 함께 등반하니 등반 분위기가 화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등반을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코르티나 출신의 미녀가 같이해서만은 아니다. 디보나 루트를 오르면서 그 오래전에 이 루트를 어떻게 찾으며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계속 생겼다. 묵묵하게 벽 하나하나를 초등하고 싱겁게 웃으며 파이프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디보나, 그를 처음 만난 영국의 어느 여자 귀족이 남긴 글이 생각났다.

“…활발한 정열의 눈과 검은 머리의 40대 산골 마을 주민, 맵시 있는 섀미가죽 옷을 입은 날카로운 사냥꾼,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 군인, 산림 관리인이자 지역 도로 검사원. 밝고 열정적인 남자, 갈색 머리 검은 피부, 솔직하고 단단한 얼굴, 말은 많이 없지만 개방적이고 발랄한 매너가 딱 마음에 들었다.” 

 

정상에서 완등의 기쁨을 나누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일행.
정상에서 완등의 기쁨을 나누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일행.
멀리 정상 뒤로 아르라이와 크로다 롯시가 보인다.
멀리 정상 뒤로 아르라이와 크로다 롯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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