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자전거 순례

 

그 날이 오면,

학들과 함께 나는 회청색의 어스름 속을 끝없이 날아가리!

 

20년 동안 메마르고 삭막한 고산준령에서 풍찬노숙하며 AK-47(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과 RPG-7(휴대용 대전차 유탄 발사기)을 멘 깡마른 탈레반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Kabul)에 재입성했다. 세계 최강국이었던 소비에트연방, 미국이 폭망하고 허겁지겁 떠났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그들의 신은 죽었는가? 아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강자들이 가난하고 굶주리며 병들어 영양실조에 걸려 휘청거리는 약자들을 향해 총을 쏘고 15억(130만$) 하는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해 불바다로 만들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카불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신의 자비와 사랑과 우정을 구걸치 말라. 신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 젖과 꿀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나라를 주셨다. 너희들만 아끼고 사랑하라고? 닥쳐라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그대들. 역사는 너희들의 뺑소니와 야반도주를 기억할 것이다. 고생 많았다, 서럽도록 잘살아라. Afghan Comrades(아프간 동무들)~!

 

글 사진 · 김규만(굿모닝한의원 원장)

 

안개비를 맞고 스웨덴과 국경으로 보이는 철책을 따라 가고 있는 자전거 순례자.
안개비를 맞고 스웨덴과 국경으로 보이는 철책을 따라 가고 있는 자전거 순례자.

 

자전거를 탄 북방 순례는 죽음의 본능과 남성성을 강조하는  AK-47을 주제로 했다. 이번에는 생의 본능과 여성성으로 넘치는 러시아의 무도회장을 향해 달려본다.

독창적이고 명석했으며 용기 있고 근면했다. 강철 같은 의지에 일관성이 있고 잔혹하며 냉정했다. 그는 겨울잠 자는 불곰을 일깨우고 변화시킬 수 있는 최상의 사람이었다. 이전에 군주가 몸소 해외에 나가 견문을 넓히고 무기제조, 기계공학, 조선공학 등 선진문물을 배우는 모든 현장에 뛰어든 전례가 없었다.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직접 배우고 익히며 경험하고 실천한 것이었다. 그는 근대화를 추구하는데도 독재라는 무기를 휘두르면서 서유럽에서 배운 것을 러시아에 이식하려고 애썼다. 러시아의 후진성을 잘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진 유럽 국가를 모방하고 배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가 막혀있었다. 남쪽 흑해는 오스만튀르크가 봉쇄하고 있고 북쪽 발트해는 스웨덴이 막고 있었다. 그는 흑해와 발트해로 진출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는 누구인가?

 

대서양의 연어를 구하라(Save the Atlantic salomon).
대서양의 연어를 구하라(Save the Atlantic salomon).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극야를 밝힌 무도회

그는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제(The great, Imperator)로 호칭된 표트르1세 대제(Пётр I Великий,€1672~1725)였다! 누군가는 그를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에 비유했다.

그가 가장 먼저 실시한 제도개혁은 수염을 자르는 것이었다. 덕지덕지한 수염을 궁정에서 직접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를 주장하며 짜르의 말을 듣지 않고 탈레반보다 더 갑갑한 수염을 기른 정교회 성직자들이나 귀족들에게 수염세(beard tax)를 1백 루블씩 매겼다. 모스크바에 입성할 때 치렁치렁하고 불편한 러시아 전통의상 대신 일하고 움직이기 편하며, 단정하고 실용적인 프랑스나 독일식 의복을 입으라고 명령하고 러시아식 전통의상을 입으면 벌금을 물렸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독재도 이런 독재가 없었다. 이 같은 조치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을 어긴다고 엄청난 비난과 반대를 했지만 표트르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갔다. 그의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은 우유부단한 외아들 알렉세이마저도 황태자 지위를 박탈하고 채찍질을 해서 잔인하게 죽였다.

1703년 도시건설을 시작한 후 10년 후인 1713년 표트르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했다. 대북방전쟁(1700~1721)이 끝나고 스웨덴과 평화협정을 맺고 발트해 운항권을 얻게 되었다.

참으로 길고 긴 22년에 걸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다치고 죽어갔다. 이렇게 직간접적으로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을까? 죽음의 본능(Thanatos)이 넘칠 때 치유는 삶의 본능(Eros, sex)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표트르는 1718년 스웨덴과 북방 전쟁 중에 남녀가 어울려 자웅(雌雄)을 겨루는 무도회를 러시아에 처음 들여왔다. 표트르의 특명으로 궁중 무도회의 전신인 ‘야회(夜會)’가 열었다. 러시아의 근대화와 계몽에 관심이 많았던 표트르 대제는 무도회를 도입하고, 예카테리나 여제는 발레를 도입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두 사람 다 춤을 매우 잘 췄다고 한다. 큰 키(203cm)에 수염을 깎아 깔끔한 짜르는 상류 지도층을 계몽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도회(舞蹈會, a ball, prom, ballroom)는 서양의 정식 댄스파티(formal dance party)이다. 영어의 ‘ball’은 공식적인 댄스(볼룸댄스, 사교댄스 등)가 열리는 무도회로 라틴어 ‘ballare(춤추다)’에서 유래되었다. 위키사전에 의하면 ‘Dance’는 ‘생명의 욕구’를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 ‘Tanha’에서 온 말이다. 한자어 ‘舞’도 잘못이나 사악함을 털어낸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말 ‘춤’의 어원도 ‘노력’이나 ‘집중’과 관계된 말이라고 한다.

17~18세기에 걸쳐, 궁정 무도회는 유럽의 궁정에서 전례, 의식 등에 따라 개최되었다. 참가자들은€연미복이나€이브닝가운€등을 입고 무도회에 참석했다. 무도회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남녀의 짝짓기 전에 이루어지는 선보기와 비슷하다. 러시아에서 짝짓기 계절은 주로 해가 토끼 꼬리처럼 작아지는 겨울이다. 보통 무도회 시즌은 크리스마스부터 마슬레니차(Масленица, 사순절 직전 立春 전후 러시아 봄맞이 축제)의 마지막 날까지였다. 파티는 꽤 이른 해가 진 저녁 4~5시에 시작되어 대개 10시 정도에 끝났다. 다른 계절에는 드물게,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만 열렸다. 햇볕이 부족한 러시아의 겨울은 춥고 우울하고 지루했다. 짓누르는 죽음의 분위기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겨울에 삶의 본능을 자극하고 꿈틀거리게 하는 무도회는 조화로운 삶이고 세상과 소통하는 삶의 무대가 되었다.

수컷들은 짝짓기 전에 화려한 건강미를 자랑하고 털과 꼬리를 세우고 흔들며 마음에 드는 암컷 주위를 맴돌고 온몸을 비비 꼬며 갖은 애교를 떨고 추파를 던지며 구애를 한다. 암컷들은 그들의 동작과 호소와 때깔을 보고 호응하여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다가 선택하는 것이 무도회의 흐름과 똑같다. 무도회에서는 거칠고 야하며 지나친 접촉과 애정표현은 엄격한 규정과 에티켓으로 가려놓았다. 겉으로 엄격할수록 관능의 은밀함이 농축되고 고상한 형태로 위장되어 에스컬레이팅되기도 한다.

몸이 무겁고 고지식한 귀족들은 그런 유희가 점잖지 못하다고 거부감을 가졌다. 춤을 못 추니 구석에 앉아서 장시간 과식 과음 카드놀이를 하면서 5~6시간 울분을 토하며 보냈다. 운동신경이 없는 불곰들은 춤을 추면서 여인들의 구두코를 밟고 정강이를 부딪치며 박자와 리듬을 잃고 의도치 않은 접촉사고(!)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수컷 불곰들에게는 곤욕이었지만, 암컷 여우들에게는 물 만난 물고기요, 불 만난 불고기였다. 불곰은 쑥스러워 춤을 안 추려 하지만 여우들은 여기저기서 차출되어 온 늘씬한 젊은 청년, 사관생도들과 격조있는 춤을 추면서 빠져들었다. 여인들의 뜨거운 열정이 모인 곳에서는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춤 신청은 항상 불곰이 하지만 춤의 본령에 이르면 여우가 갑이 되고 불곰이 을이 되어 갑을관계가 바뀌었다. 사교계 여왕은 있지만 사교계의 왕자는 없다. 호감을 가진 자웅(雌雄)이 만나면 박자 리듬 스텝이 경쾌하고 정확하지만, 은밀한 곳을 스치는 의도적으로 밖에 안 보이는 접촉사고(?)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무도회를 통해서 원초적인 활력을 느끼고, 에티켓을 배우며, 친교를 나누고 프랑스 같은 서유럽 문명에 관심을 갖고 간접 경험을 하게 되었다. 춤을 못 추면 대화에 낄 수 없었다.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해가 뜨지 않아 춥고 우울하며 지루한 극야(極夜)를 밝히는 무도 화(火)는 사람들에게 큰 활력을 주었다. 19세기 중반까지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춤바람은 회오리바람이 되어 여기저기서 연간 1000회 정도 열리고, 중소 지방 도시에도 춤바람이 거셌다.

시대적으로도 춤을 통해서 전쟁의 상처와 죽음, 공포와 두려움, 잔인한 황제와 위정자들의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외상후스트레스장해(PTSD) 등을 일부 치유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작나무와 침엽수림이 어우러진 곳에 자리한 작은 집.
자작나무와 침엽수림이 어우러진 곳에 자리한 작은 집.

 

엄격한 규정과 에티켓으로 가려진 관능의 은밀함

페테르부르크의 궁정무도회에는 황제의 가족 친지, 궁정 관료, 유명한 외국 인사들이 참석했다. 초대받으면 중병이나 상을 당한 경우를 제외하고 반드시 참석해야 했으니 귀족들에게 궁정무도회는 오락보다 의무에 가까웠으리라. 딸들이 있는 귀족들은 아내와 딸을 모두 데리고 궁정무도회에 참석해야 했으므로 늘 ‘남자’가 모자랐다. 그래서 가까운 근위병 장교들이 돌아가면서 춤 파트너 역할을 하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일반무도회는 궁정무도회와 달리 자유롭고 강제성이 없었다. 경제적 여유, 비즈니스나 로비 등 특정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여는 사교적 요소가 많은 무도회를 말한다. 무도회에도 엄격한 규정과 에티켓으로 가려져 있어 그 뒤에 잘 숨기만하면 은밀한 관계를 즐기며 인륜지대사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소해도 재수 없게 눈에 띄면 경쟁자 수컷들로부터 심한 비난과 질책뿐 아니라 결투신청도 받을 수도 있었다. 시인 뿌쉬낀도 무도회에서 사소한 일로 결투신청을 했다.

춤을 잘 추는 것은 동성으로부터 부러움, 이성으로부터 인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춤을 잘 추고 예의 바르면 남녀 공히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어 러시아의 귀족 가문 아이들은 5~6살 이른 나이에 춤과 사교계 에티켓을 배웠다. 한 동안 한국에서는 물찬제비들이 지방근무, 해외근무 등으로 장기 외유 중인 남편을 둔 순진한 여인들을 꼬드겨서 꿩 먹고 알도 먹는 못된 짓을 해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무도회는 다양한 규정이 있다. 초대장은 7~10일 전에 보내 여성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여성들은 자신에게 춤을 신청한 남성들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갖고 있어 똑같은 춤을 두 사람과 추는 결례를 피했다. 복장 규정으로 남성들은 연미복, 턱시도, 양복을 입어야 하고, 군 장교들은 제복을 입었다. 여성들의 무도회 드레스는 비쌌지만 시즌에 한두 번 이상 입지 않았다. 그래서 무도회 출입이 잦은 여성들은 티가 안 나게 고쳐 입기도 했다. 가면무도회같이 콘셉트가 있는 무도회에는 정해진 스타일의 옷을 입고 와야 하고, 사교계에 막 데뷔하는 처녀들은 흰색이나 부드러운 파스텔 톤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는 최소화하며 머리도 소박하게 꾸몄다. 부인들은 무슨 색의 옷도 입을 수 있고 화려한 장신구도 할 수 있었다. 남녀 모두 장갑을 껴야 했다.

귀족들의 무도회는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촛대에 꽂힌 수많은 밀랍초로 환히 밝혀진 거대한 홀에서 오케스트라 연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화려하고 점잖은 복장의 호스티스, 엄마를 따라 사교계에 온 처녀들, 정신이 아찔한 미모를 한 사교계의 여왕,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한 돈 많은 귀부인, 꽃미남 꽃미녀, 날날이 날순이, 사관생도 근위대장교 등 모든 분위기가 가슴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모든 전례 의식 형식은 참석한 이들의 마음을 집중하고 고양했다. 홀 중앙이 춤추는 공간이고 갓 쪽 윗단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어 춤추다 지치면 쉬거나 담소를 하고 카드놀이를 하기도 했다.

파티를 주최한 호스트가 기승전결 춤 순서를 관장했다. 초기 야회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금관악기 위주였으나 나중에는 현악기로 바뀌고 춤의 경향도 시대에 따라 바뀌어 갔다. 무도회는 웅장한 폴로네즈(Polonaise)로 시작했다. 무도회를 주최한 호스트와 호스티스가 중요한 손님들과 함께 폴로네이즈를 추었다. 그 다음 순서는 왈츠(Waltz), 헝가리 댄스(Hungary dance), 크라카뱌크(krakowiak, 폴란드 춤), 파스데카르트레(Pas de Quartre), 카드리유(Quadrille)이고 가장 하이라이트인 마주르카(Mazurka)는 저녁 만찬 직전에 춘다. 남성은 맘에 드는 여성을 만찬 식탁으로 안내해서 감언이설로 밀당을 하거나 서로의 마음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만찬 후에 가장 대담한 코틸리온(Cotillion, Quadrille의 일종)과 러시아 춤이 진행됐다. 마지막으로 주최자인 호스트의 신호에 따라 오케스트라 음악이 멈추면 무도회가 끝나고 뿔뿔이 흩어져 집에 가거나 아무도 모르게 애프터(After)를 가질 수도 있었다.

흥진비래, 19세기 말부터 무도회의 열기가 식기 시작했다. 제정 러시아 최후의 성대한 가장무도회가 1903년 에르미타주에서 열렸다. 니콜라이2세는 로마노프 왕조의 14번째€군주로€1917년€2월 혁명으로 퇴위하고 볼셰비키들에 의해 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총살당했다. 제국의 무도회는 이제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무도회를 볼셰비키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바다로 통하는 운하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다로 통하는 운하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수컷과 암컷 중 성 선택의 주도권은?

포유류 세계에서 수컷은 짝짓기가 끝나면 떠나지만, 암컷은 임신하고 모진 산고를 겪으면서 출산해야 하며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젖을 뗄 때까지 양육의 고달픔을 떠안아야 한다. 동물의 성 선택은 후손을 남길 때 노력과 수고와 역할을 많이 하는 쪽에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수컷의 정자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씩 만들어지지만, 난자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어렵게 하나 만들어진다. 수컷의 정자는 매일 만들어져 쉽게 남용하고 써도 되므로 껄떡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암컷은 이것저것 다 따지면서 선택을 신중히 해야 한다. 어떤 수컷을 만나야 건강한 새끼, 똑똑한 새끼가 태어날지, 새끼가 배를 굶지 않을지,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 등을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계산한다. 대부분 이렇게 노력과 수고와 역할이 많은 암컷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수컷은 화려할수록 간택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공작, 칠면조, 원앙, 꿩, 플라밍고 등을 보아도 암컷은 초라하지만 수컷은 화려하고 자태가 곱다. 무도계의 기린아 제비의 경우도 꼬리의 길이와 좌우대칭이 중요한 선택 조건이라고 한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곤충을 잡아먹는 제비에게 정교하고 미세한 비행 능력에 좌우대칭의 긴 꼬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암컷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수컷은 외모가 화려해야 적자생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도회는 어떠할까? 사춘기 청장년기 남성들은 여성에게 선택받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난리를 친다. 남성들은 매일 생산되는 정자들이 아우성을 쳐서 여기저기 들이대지만, 일정한 기간(28일)이 되어야 겨우 하나의 난자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은 이것저것 다 가리면서 계산기를 두드려서 선택한다. 여성들은 동물의 세계의 초라한 암컷에 머물지 않고 아름답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매력적이고 관능 넘치는 춤을 추면서 자신을 과시하면 수컷들은 안달하고 몸을 비비 꼬며 간장게장을 녹이고 침을 흘린다.

프러포즈할 때 남자가 무릎을 꿇고 여성에게 꽃다발이나 반지를 내밀면서 결혼해 달라고 구애하는 모습은 성 선택 주도권이 여성에게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프러포즈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마음에 생긴 병이 소위 말하는 상사병(相思病)이란 전설이다.

 

러시아의 광개토왕이자 세종대왕과 같은 표토르 대제.
러시아의 광개토왕이자 세종대왕과 같은 표토르 대제.

 

소련의 아프간전쟁

러시아가 프랑스 나폴레옹과 벌인 <조국전쟁(1812.6.24~1815.1.5)>에 승리하여 파리로 진군 점령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을 엘바섬으로 유배 보냈다. 그때 가장 큰 전투인 ‘보로디노 전투’를 지휘한 장군이 쿠투조프 원수였다. 러시아는 히틀러 독일과 벌인 독소전쟁인 <대조국전쟁(1941.6.22~1945.5.9)>으로 베를린으로 진군해 점령하였다. 그때의 장군이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였다. 러시아제국과 소련의 운명을 결정하는 큰 전쟁에 모두 승리해 러시아는 승전국으로 널리 위상을 펼쳤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전술은 인해(人海)전술과 청야(淸野)전술이었다. 이런 전술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소모적인 전술이라 제네바 협약€위반이자 전쟁범죄로 규정해 놓았다. 러시아는 전쟁만하면 상대보다 훨씬 더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주코프는 지뢰밭 통과에 돌격을 외쳐 인해전술로 지나간 것을 자랑질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러시아에는 섬세한 인간존중이나 배려 같은 것이 없었다. 질과 양은 상대적이어서 양이 너무 크면 질이 떨어진다는 질량상대성법칙(質量相對性法則) 그대로 무식하고 야만스러웠다.

표트르 대제는 발트해 운항과 항구를 얻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롭게 수도까지 건설했다. 이제 남쪽 흑해 운항과 항구를 확보해야 한다. 예까떼리나 여제도 자신의 애첩(!)인 포템킨을 시켜 1783년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를 확보하고 도시를 세웠다. 그녀의 막네 손자인 고약한 니콜라이1세(1796~1855)는 러시아의 흑해진출을 필사적으로 막는 연합군들과 싸운 크림전쟁(1853~1856) 중에 죽었다. 러시아는 남진정책으로 인도양으로 나가는 통로인€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지만, 당시 전세계 제해권(制海權)을 갖고 있던 영국이 막아 격돌한 것이 그레이트 게임이었다. 대영제국은 3차에 걸친 영-아프간 전쟁을 치러 일시적으로 아프간을 점령했지만 아프간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1919년 아프간 독립을 허용했다.

 

바다를 닮은 네바강.
바다를 닮은 네바강.

 

소련은 냉전 시기인 1979년 12월 당시 소련의 아프간 정권에 저항하는 이슬람 무장세력인 무자헤딘(전사)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침공해 소­아프간전쟁(Soviet­Afghan War, 1979년 12월~1989년 2월)을 일으켰다. 그러나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으려는 미국과 여러 가지 복잡한 이해관계가 있는 세력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소련의 전망은 어두웠다. 기독교국가, 이슬람국가 등이 반군인 무자헤딘을 지원해 소련의 아프간 정권을 공격했다. 이 전쟁은 소련의 붕괴에 크게 기여해서 ‘불곰 덫(The Bear Trap)’이라 하고 베트남전쟁에서 망해 도망간 얼빠진 얼간이 미국에 빗대 ‘소련판€베트남 전쟁’이라고 비웃었다.

사악한 모사꾼 집단 CIA가 끼어서 약 10년 동안 90억$를 들여 반군을 육성하고 지원했다. 이때 알카에다를 이끌던 오사마 빈 라덴이 여기에 있었다. 미국은 소련이 철수하자 바로 이들을 버리고 용도폐기했다. 심한 배신감을 느낀 빈 라덴은 강한 반미로 돌아서서 알카에다를 시켜 10cm 조금 넘는 커터(Cutter)칼로 하이재킹한 후 그 비행기로 뉴욕 무역센터빌딩을 들이받아 911테러를 일으켰다. 미국은 부정할지 모르지만 커터칼 하나에 무너졌다. 이것이 바로 미-아프간전쟁(2001~2021. 9. 11)의 도화선이었다. 거대한 미국은 믿을 수 없이 경박하고 참으로 어리석었다. 정의와 공정, 우정과 의리, 믿음과 신의가 없었다. 속지마라 소련은 10년, 믿지마라 미국은 20년간 천문학적인 돈을 써서 수백만 명의 젊은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죽게 하고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천하에 몹쓸 짓을 하고 떠났다.

그들이 떠난 땅에 무제한 폭격으로 피폐해져 상처뿐인 산하(山河)와 죽은 원혼()들은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그들을 위한 위령제가 절실한 계절이다.  

 

침엽수림대를 통과하고 있는 자전거 순례자.
침엽수림대를 통과하고 있는 자전거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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