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숲길

 

신의 , 난드르 들판

 

글 사진 · 이승태 편집위원

 

가시오름 남서쪽의 일과리 들판과 바다. 최고 작가의 팔레트가 이처럼 예쁠까!
가시오름 남서쪽의 일과리 들판과 바다. 최고 작가의 팔레트가 이처럼 예쁠까!

 

제주의 서남쪽, 그러니까 서귀포시 대정읍과 안덕면, 제주시 한경면은 제주도의 어느 지역보다 광활한 평지를 품었다. 알뜨르비행장 일대와 차귀도를 마주한 고산평야 등이 대표적이다. 이 땅은 마늘과 양파, 브로콜리, 당근, 감자 등 청정하고 싱싱한 제주 농산물 생산지로 유명한 곡창지대다. 이 너른 평야 곳곳에도 단산과 송악산, 모슬봉, 녹남봉, 당산봉 등 크고 작은 오름이 분포한다. 주변이 다 평평하다보니 더욱 도드라지는 오름들이다. 이 중 대정읍 서쪽의 가시오름은 옛날에 가시나무가 많아서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시나무 종류를 거의 찾을 수 없다. 한자로는 가시악(加時岳), 가시악(加是岳) 등으로 표기한다. 해발고도가 106.5m, 오름 자체의 높이가 77m에 불과하지만 사방으로 평야가 펼쳐져 유아독존의 느낌을 준다.

 

가시오름과 모슬봉, 산방산. 질리지 않는 제주 풍광이다.
가시오름과 모슬봉, 산방산. 질리지 않는 제주 풍광이다.

 

도로에서 바로 시작되는 탐방로

가시오름은 얼핏 보면 원추형 같지만 남서록에 귤밭이 들어선 얕은 말굽형 굼부리를 품었다. 넓고 평평한 정상부도 둥글넓적한 모양의 굼부리가 아닐까 싶은데, 김종철 선생의 책이나 제주도에서 발간한 오름 책자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정상부 초지 한쪽엔 아주 작지만 오목한 습지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의 남쪽바다를 바라보며 솟은 오름이 대게 그렇듯 가시오름에도 일제진지동굴이 구축되었다.

오름 사방이 온통 평야지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이 들판의 이름은 ‘난드르’다.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넓은 들판을 일컫는 ‘난들’의 제주어다. 난드르엔 맑은 물이 샘솟는 샘이 많아서 까마득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오름 남서쪽의 밭 한가운데에 당시의 흔적인 고인돌(일과리지석묘)이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오름에 산담이 거의 없다. 주변이 평야지대고, 산이라고는 가시오름 하나인데, 오름 전체에 겨우 예닐곱 개의 무덤이 확인될 뿐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이곳이 흉지(凶地)고 모슬봉은 명당이었을까? 동남쪽 들판의 밭뙈기마다 산담이 들어섰고, 직선거리로 1.7km 떨어진 모슬봉은 아예 오름 자체가 공동묘지에 다름 아니다.

오름의 동북쪽을 스쳐 지나는 1120번 지방도(대한로)에서 바로 탐방로가 시작된다. 시작지점 도로 옆에는 승용차 한두 대쯤 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북동쪽 사면을 가로질러 곧장 정상까지 가는 이 길은 낡은 나무계단과 초지가 번갈아 나타난다. 주변은 물론, 탐방로에도 풀이 많다. 관리기관에서 풀베기를 하지만 때를 잘못 맞추면 수풀을 헤치느라 고생인 코스다. 중간에 좌우로 길이 몇 번 갈리기도 하지만 무시하고 직진하면 된다. 

 

정상의 사각정자와 운동시설. 그늘이 부족한 게 흠이다.
정상의 사각정자와 운동시설. 그늘이 부족한 게 흠이다.

 

한갓진 수렛길로 하산

정상은 꽤 넓은 초지대로, 띠가 무성하다. 사료용으로 부러 가꾸는 듯, 반쯤은 베어갔다. 북쪽엔 산불감시초소가, 남쪽엔 사각정자가 서 있고, 정자 앞으로는 벤치와 운동시설도 보인다. 그러나 운동기구 곳곳에 올라온 녹을 보니 이용하는 이는 드문 듯하다.

난드르에서 홀로 우뚝한 오름이어서 정상에서는 바람이 시원하고, 사방으로 조망도 빼어나다. 동남쪽으로 한라산을 닮은 모슬봉이 잘 차린 밥상에 덮어둔 보자기 마냥 부드럽게 솟았고, 그 뒤로 바굼지오름과 산방산, 군산이 해안선을 따라 멋진 자태를 뽐낸다. 가시오름에서는 무엇보다 난드르 들판이 풍광의 주인공이다. 초록빛깔이 이리도 다채로웠나 싶을 정도로 밭뙈기마다 조금씩 톤이 다른 초록 작물로 채워졌다. 어느 화가의 팔레트가 이처럼 예쁠까! 아니, 이 자체가 그대로 명작 중 명작임에 틀림없다. 보고 또 봐도 행복한 ‘난드르’다.

초지대 한쪽은 억새가 무성하다. 띠보다 키가 더 커서 눈에 띄는 억새지대 중간엔 살짝 내려앉은 습지대가 있다. 둘레로 보이는 풀이 물가를 좋아하는 것들이다. 굼부리의 흔적일까 하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내려설 때는 산불감시초소 앞에서 시작되는 비포장 수렛길을 따르는 편이 좋다. 이 길은 서·남·동쪽사면을 거치며 오름 중턱을 한 바퀴 돈 후 북동쪽에서 탐방로를 만나 출발지로 이어진다. 완만하게 굽어 돌기에 힘들지 않고, 길섶으로 억새와 수크령, 볼레낭 등이 나타나 눈도 즐겁다. 중간에 벤치가 나오고, 그늘도 적당하다. 오름이 높지 않고 탐방로도 복잡한 게 아니어서 1시간쯤이면 넉넉히 오르내린다. 

 

INFO

교통 주변을 오가는 버스가 없다. 승용차로 접근해야하고, 내비게이션에 ‘가시오름’을 입력하면 된다.

주변 볼거리 추사유배지와 제주 추사관 시(詩)·서(書)·화(畵) 분야에서 독특하고 빼어난 업적을 남 긴 조선 시대의 대 표 학자이자 예술 가인 추사 김정희 (1786~1856)가 9년 쯤의 제주 유배기간 에 머물렀던 곳이 다. 강도순의 집이 던 이곳에서 지내면 서 추사는 제주 유 생들에게 학문과 서 예를 가르쳤고, 제 주에 차 문화를 소개했다. 또 이곳에서 그의 서화 중 최고 명 작으로 꼽히는 를 남겼다. 적거지 앞, 세한도를 본떠 서 완공한 추사관에서 추사와 관련한 다양한 역사 자료를 볼 수 있다.

맛집 모슬포항의 ‘제주인의 밥상(064- 792-3799)’은 서귀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로 요리한 뱅어상차림, 우럭정식, 문어라면 등 이 맛있다. 독특하고 신선한 맛의 흑돼지샤브샤브도 인기다.

 

가시오름 안내도
가시오름 안내도

 

저작권자 © 사람과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