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자전거 순례

 

죽음을 부르는 매혹적이면서 가장 잔인한 AK-47 

 

글 사진 · 김규만(굿모닝한의원 원장)

 

러시아는 넓고, 춥고, 배고픈 땅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볼세비키(다수)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허기와 고통과 억압을 잠시 달래주는 것이 보드카다. 승자독식(勝者獨食)한 멘세비키(소수)들의 오랜 차별과 착취에 저항하는 상징이 AK-47 자동소총이었다. 그들은 AK-47의 카피라이트(copy right) 대신 카피레프트(copy left)를 허용하며 혁명 상품의 사은품처럼 AK-47을 뿌렸다. 정품과 불법 복제품들이 활개를 치면서 2억정이 넘는 살인병기가 생산되었다. AK-47은 “나는 살지만 너는 죽어야 한다”는 불평등이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는 평등을 만든다는 모순(矛盾)을 향해 발사되는 것일까? 모든 총은 당기는 자가 갑(甲)이다.

 

 

# 핵무기와 같이 ‘대량살상무기’인 AK-47
가을은 숙살(肅殺)의 계절로 자연의 대부분이 시들고 메마르고 떨어지고 죽고 남은 열매만 미래를 준비한다. 숙살되고 조금 남은 열매를 보고 결실(結實)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봄(spring,↑)을 필두로 여름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려가고 떨어지는 가을(fall,↓)이 오면 우수 비애가 한 줄기 바람처럼 흘러가며 서서히 겨울이 온다. 

총은 대표적인 살상무기이다. 피상적으로 ‘매혹적이면서 잔인하고 비정하다’는 미학적인 말은 킬러들의 가학적 표현이다. 총에서 가을의 숙살(肅殺)이 느껴진다. 총에 맞으면 매우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삶이 된다. 죽을 만큼 아파 생지옥을 헤매다 죽기도 한다.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매년 약 4만 명이 총기로 사망하고, 약 4만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고 한다. 총기소유 허용이 안 된 것에 감사하다. 이 주제가 너무 선정적이어서 불금될까 걱정이다. 그러나 AK-47을 통해서도 세상을 보고 관조하며 사색할 수 있다. 이번에는 AK-47자동소총을 메고 달리는 ‘자전거 순례’이다. 

 

 

 1. 혁명과 반란, 저항 테러의 동반자 
보드카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에 가장 많이 보급된 AK-47은 야전에서 가장 가성비가 높다고 한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무기로 혁명과 저항, 반란과 테러의 상징이다. A는 Автома(자동), K는 개발자 Калашникова(칼라시니코바), 47은 1947년 개발연도를 조합한 ‘AK-47’은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으로 불린다. 1947년 기관차 정비사인 칼라시니코프가 만든 소총이 AK-47이고, 1956년 항공기 정비사인 유진 스토너가 만든 소총이 M16이다. 여러 변형과 아류들이 있지만 사용하는 총탄이 7.62×39mm 규격을 사용하면 모두 AK-47로 취급한다. 30발 탄창 포함 무게가 4.8kg, 전체길이가 870mm(총열415mm), 유효사거리가 300m(분당600발)이다. 탁월한 성능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킬러들의 사랑을 받고 정품과 불법 복제판까지 합치면 인류가 만든 무기 중에 가장 많은 2억 정이 넘게 생산되어 지금까지 현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매년 분쟁지역에서 2만~10만 명이 총상으로 사망하는데 대다수가 AK-47 때문이라고 한다.

디스커버리지(Discovery)에 의하면 “AK-47이 세계 최강의 보병 무기 1위에 뽑힌 적이 있고,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무기 2위로 뽑혔다”. 흥미로운 것은 1위가 인간이고, 2위가 AK-47이라는 것이다. 또한 “AK47은 단지 500m 내에서만 세계 최강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 보병전은 서로가 보이는 4~600m 내에서 벌어진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AK-47을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로 보도했다. 핵무기는 위력과 재앙이 끔찍해서 모두가 사용을 자제하지만, AK-47은 사소해서 남용하다보니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많은 살상을 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였다.

 

 

2. 단순하고 성능이 우수하며, 튼튼하고 고장이 나지 않는다 
AK-47의 부품은 모두 80여 개인데 가동부품은 8개로 부품 수가 적고 내구성이 높다. AK 소총은 그 간단한 구조로 인하여 아프간, 파키스탄 등지 대장간에서 솜씨 좋은 장인들이 뚝딱뚝딱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만들어지므로 M-16과 달리 AK-47의 생산 수량이 정확하지 않고, 저렴한 가격만큼 성능도 들쑥날쑥했다. 프레스 방식으로 총을 만들기 때문에 필요시 대량생산할 수 있고 생산 단가도 매우 저렴하다. 일반적인 AK-47은 싸고 성능이 좋다 보니 수요가 많아 상인들에게는 현금처럼 통용된다. 

총에 무지한 사람도 1시간 정도면 바로 조립과 분해는 물론 목표에 사격까지 할 수 있다. 인류에게 불행한 일이지만 사용이 쉽고 명중률도 높아서 정규군은 물론 게릴라, 파르티잔, 탈레반, 알카에다, 민족해방전선, 민병대원 등이 선호했다. 아프리카 아프칸 등 분쟁지역에는 8~9살의 AK 소총을 든 소년병들도 많다.

간단한 구조에 롱스트로크 가스피스톤 방식은 오염 물질로부터 안정성이 뛰어나 잦은 청소나 별다른 정비가 필요치 않고 모래 먼지가 가득한 사막 늪지대나 얼어붙은 시베리아 극지방 등 어느 지역 어떤 환경이라도 반드시 발사된다. 베트남전 당시 죽은 베트콩과 6개월 이상 물에 잠겨있던 총에서 뻘을 대충 헹구고 물기를 털어 낸 후 바로 발사가 되었다는 실화도 있다. 늪지대 진흙탕에 처박아둔 것은 물에 헹궈내고, 모래가 든 것은 털어내면 발사가 되지만, M16이라면 당장 갖다 버려야 된다고 한다.  

 

 

3. AK-47과 M16 
AK-47을 기본으로 무게를 줄이고 디자인을 살짝 바꾼 AKM (3.61kg), 5.45mm 탄약을 쓰는 AK-74(74년산, 5.45×39mm인 30발 탄창과 총무게 3.3kg, 전장 943mm(총열 415mm), 유효사거리 500m(분당 600~650발)) 등을 만들었다. 분대지원 경기관총인 RPK-74, PK기관총 등도 명품으로 평가받는다. 90년대 후 업그레이드된 AK100시리즈(101~109) 등이 있고, 러시아 육군은 최신형 AK-12를 제식 소총의 하나로 채택했다.
개인적으로 M16A1소총으로 군대생활을 했다. 훈련소에서 M1소총, 카빈소총과 함께 아카보소총(북한판 AK47)도 경험해 보았다. 아카보소총 끝에 달려있는 은백색 날카로운 스테인리스 대검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조준은 가늠자와 가늠쇠와 목표물을 정렬하면 되니 짧고 빠른 조준이 가능해서 실전에서 명중률도 높다. 단거리에서는 빠른 속사가 가능하지만, 원거리 조준사격은 M16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 같다.

M16은 원형의 가늠자에 가상의 +자의 중심에 가늠쇠와 목표물을 일치시키고 사격한다. 시간은 걸리지만 상당히 정밀하다는 장점이 있어 저격수처럼 원거리에서 저격할 때 유리하다.

AK47의 유효사거리가 300m로 M16의 460m에 비해 훨씬 못 미친다. AK-47 자동소총은 강선은 4조우선이고 M16은 6조우선이다. AK-47 전체길이가 87cm(총신은 41.6cm)로 M16의 99cm보다 더 짧아서 밀림과 좁은 시가전에서 민첩하다. 

AK-47(4.3kg)이 M16(2.89kg)보다 훨씬 무겁고 힘들지만 반동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AK-47과 M16은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냉전 당시 동구권의 주력 소총이 AK-47이고, 서구권은 M16이었다. 제3세계에서 정부군의 소총이 M16이면 반군은 AK-47, 정부군이 AK-47이면 반군은 M16이었다.

 

 

4. 카피 레프트(Copy left) 
소련은 바르샤바조약 회원국과 북한·중국 등 24개 나라에 AK-47의 라이선스 생산을 인정했다. 북한은 58년 ‘58식 보총(아카步 소총)’이라는 이름으로 자체 생산했다. 불법복제 AK-47이 전 세계로 흘러 들어가 현재 운용 국가가 108개국이나 된다. 냉전 도중 소련이 특허권을 무시하고 닥치는 대로 뿌리고 면허 생산을 남발했다. 여러 가지 실용성 때문에 현재까지 많은 국가에서 애용하고 있다. 사회주의국가와 제3세계 분쟁국가들, 베트남전쟁, 소말리아내전, 유고전쟁, 코소보전쟁, 중동 전쟁, 아프칸 전쟁 등에서 AK-47 같은 총이 진짜 보병화기라고 병사들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1. 기계에 광적인 열정을 보였던 꼬마 
AK-47 자동소총을 개발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1919~2013)는 알타이 지방의 쿠루야라는 마을에서 19명의 자녀 중 17번째로 태어났다. 러시아인들은 다산(多産)으로 유명하다. 아버지는 원래 흑해 연안에 살았는데 인간백정 스탈린 당시 시베리아 알타이지방으로 숙청돼 살다가 사망했지만, 어머니는 1백 살이 넘게 생존했다. 그는 162cm의 왜소한 체형으로 여름에는 수영을 못해 물에 빠져 죽을 뻔하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다 얼음이 꺼져 죽을 뻔했다. 낫에 베어 크게 다치면서 농사짓는 것도 적응을 못했다. 그러나 기계에 대해서만 본능적인 호기심과 재주가 있어 동네의 모든 기계, 심지어 열쇠마저 그의 손에서 분해 조립을 거쳤다고 한다.

14세 때 우연히 동급생 친구가 녹이 슬어 작동하지 않는 총알 6발이 장전된 브라우닝 권총을 어디에서 주워다 주었다. 그는 아버지 몰래 한 달 동안 총을 분해하고 녹을 벗겨 윤활유를 바르고 재조립해서 알타이 강가에서 4발을 시험 발사했다. 총기가 작동하자 환호성을 질렀고, 화약냄새 쇠냄새 윤활유냄새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한 번은 집에서 장난감 총이라고 우기는 여자아이 앞에서 총을 직접 쏘아 경찰이 출동했지만 다행이 증거를 못 찾아 넘어갈 수 있었다. 후에 아버지에게 된통 혼나고 그 총은 압수되어 분해된 후 버려졌다. 훗날 그 때를 회상하면서 ‘사내아이에겐 총은 정말 매력적인 존재다’라는 말을 했다. 대부분 사내아이들은 총과 칼 등의 무기 그리고 자동차와 비행기, 군함 등에 매혹한다. 이것을 사내아이들의 성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 

 

 

2. 기관차 정비기술자에서 소년병 탱크병으로 입대 
미하일 칼라시니코프는 5년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알마티에 있는 시베리아 철도의 기관실 기술자로 취직하여 기관차 수리를 하면서 틈틈이 주위에 있는 총기를 분해하고 익혔다. 1938년 18세에 소년병으로 소련군에 입대하여 전차병으로 근무하면서 고기가 물 만만 듯 기계 수리와 설계와 제작에 몰두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독소전쟁에서 T-34탱크를 몰고 싸우다 중상을 입고 후송 도중 성능이 뛰어난 소총을 가진 독일군들에게 습격을 받고 순식간에 제압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는 부상 부위가 어깨라서 유일하게 이들로부터 도망쳐 살아났다.

 

3. 부상병 시절에 총기 설계에 매진 
병원이 도서관을 개조한 야전병원이라 기계공학 관련 서적이 많이 있었고, 주위에 참고할만한 미국제 총기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미국 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당장 연필과 노트를 빌려서 총기 설계에 매진했다.

총기 설계를 끝낸 칼라시니코프는 1942년 4월 퇴원해서 집에서 휴양하고 대기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총기를 완성하기 위해 근무지였던 알마티의 시베리아 철도 기술부로 가서 1942년 중순에 그의 첫 작품인 PPK-42 기관단총을 완성하여 상부에 올렸지만 좌절되었다. 그러나 총기 설계의 재능을 인정받아 러시아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어 23세에 툴라 조병창에 배치되어 드디어 총기 개발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미국 스타일인 피스톤 방식을 매우 좋아해 훗날 롱스트로크 가스피스톤 방식을 설계에 반영했다. 

 

 

4. 제식 소총이 된 AK-47 개발자의 소박한 삶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군은 독일군의 신형 돌격소총 Stg44처럼 뛰어난 성능의 소총을 개발하고 싶었다. 1947년 칼라시니코프가 설계한 AK-47 자동소총이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고 소련군 제식 소총으로 채택되었다. 그는 이 공로로 1949년 스탈린 훈장을 받고 1951년에 육군 상사로 전역한 후에도 이즈베스크 조병창의 주임 설계관으로 일했다.

자유진영에서 M16을 개발한 미국의 유진 스토너는 재벌이 되어 플로리다 대저택에서 자가용 비행기를 조종하며 살았다. AK-47은 초대박 상품인데도 당시 소련은 특허를 인정하지 않아 모스크바 동쪽 1000km의 군사산업 도시인 이젭스크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월 55만 원쯤 되는 연금을 받으며 평범하게 살았다. 소련은 혁명을 수출하기 위해 AK-47을 너무 값싸게 뿌렸다. 그가 제대로 특허료를 받았다면 최소 2000만 달러(약 213억 원)였을 것이라고 한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AK-47이란 이름을 한 보드카와 시계의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5. 돈보다 명예로운 그의 삶 
그는 일구월심(日久月深) 일취월장(日就月將) 승승장구(乘勝長驅)했다. 금성훈장 2회, 레닌 훈장, 육군 대령 계급 수여(1969년), 공학박사 학위를 수여(1971년) 받으며 명예가 넘치는 삶을 살았다.

소련이 붕괴된 후 이즈베스크 조병창이 민영화된 후에는 ‘이즈마쉬사’의 주임 설계관으로 일했다. 76세 생일 축하 선물로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종신 육군중장 계급을 수여(1994년)받아 당시 최고령 장군이 되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도 총기 설계에 종사하게 했다. 91세 생일에 러시아 대통령 메드베데프는 칼라시니코프에게 러시아 영웅 칭호를 수여(2009년)했다. 구소련과 러시아 정부는 자린고비처럼 돈이 안 드는 것으로 최대한 생색을 냈다.

 

6. ‘대량살상무기’인  AK-47을 개발한 시인의 고뇌 
칼라시니코프는 AK-47을 만든 장본인답지 않게 어릴 때부터 시를 써와서 그가 출판한 시집이 6권이나 되었다. 그가 남긴 말들은 쇠를 깎고 기름 묻은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답지 않게 여리고 섬세했다. 문학의 나라인 러시아에서는 노동자와 기술자도 시를 쓴단 말인가? 

2002년 영국 가디언지 인터뷰에서는 “나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만들었을 뿐, 정치인들이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내 책임이 아니다”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했지만 자신이 만든 무기가 악용되는 것에 대한 고뇌가 많았다.  “AK소총 개발은 파시스트 침략군에게 맞서 조국을 지키려는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만든 내 총이 오사마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들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을 TV에서 볼 때면 과연 ‘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만든 것인가’라는 걸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AK 소총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한 것은 내 잘못은 아니지만 이 소총의 발명가로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즉 범죄나 학살 등에 내가 만든 총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무기 거래와 관련하여 국제적인 통제가 필요함을 느꼈다”며 2006년 UN 개인화기 확산방지 회의, 국제사면위원회(AI), 영국 자선단체 옥스팜 등이 벌이는 개인화기 확산방지 캠페인에지지 성명을 보낼 계획이라고 했다.

칼라시니코프의 고뇌는 인류를 대량 살상하는 원자폭탄을 만든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고뇌와 비슷했다. 오펜하이머는 처음부터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면서 핵무기 확산을 극구 반대했다. 원자폭탄의 위력과 살상력이 AK-47보다 수천만 배 크지만, 사실은 칼라시니코프의 AK-47로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당초 조국을 구하는 목적에서 벗어나 테러리스트·해적·마피아의 도구로 변하는 것에 죽을 때까지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성찰하는 시인답게 고뇌와 불안과 후회는 점점 더 커졌다. 임종을 8개월 앞둔 칼라시니코프는 이젭스크의 병원에서 “영혼의 상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제가 만든 총이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설령 그 사람들이 적이라고 해도 제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닙니까?”라는 편지에 러시아 정교회 수장 키릴주교는 “애국적인 행동을 한 사례였고 조국을 위하는 올바른 행동이었다”는 원론적인 답장을 했다고 한다. 그는 2013년 12월 23일 94세로 졸했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이자 러시아를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이고리 쿠르차토프, 우주 개발의 수장인 세르게이 코룔로프와 함께 소련의 3대 영웅이다.

 

 

#덩치 큰 미국 형님들 야반도주하다!
미국이 아프칸 전쟁 전에 소련의 아프칸전쟁(1979~1989)이 있었다. ‘질량상대성(質量相對性) 법칙’에 의해 소련과 미국처럼 덩치가 크면 질(質)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하자. 미국 CIA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무자헤딘 탈레반 같은 반정부 세력을 지원했다. 소련이 물러가자 헌신짝과 함께 버렸다. 그 버려진 중심에 성깔과 깡이 넘치는 남자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있었다. 국제 사회에서 미국은 자기 상황과 자기 이익에 맞춰 수시로 배신하고 적으로 돌변했으니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측면도 있다.

당시 대통령 조지 부시와 국방장관 람스필드는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벌어진 911테러에 대한 복수로 희생양이 필요했다. 자고로 가난하고, 힘없고, 고집세고, 성질 고약하면 희생양으로 삼기에 딱 좋았다. 그러나 누가 봐도 아프칸은 세계 최빈국이고 미국은 최강국이라 애초에 게임 상대가 아니었다. 유치원생과 격투기 선수가 싸운다고 생각해보라.

아프칸 반군들은 AK-47소총, 60mm박격포, RPG7(휴대용 대전차 유탄발사기), 사제 미사일 등 유치한 재래식 무기들로 무장했다. 미국은 아프칸에 최고 최신 무기들을 동원해 미친듯이 공중폭격을 하고 엄청난 포탄과 미사일을 퍼부었다. 총구에서 나온 권력을 너무 남용했다. 쉽게 설명하면 모기보고 칼을 뽑는 견문발검(見蚊拔劍)을 한 것이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이런 미친 전쟁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9월 11일까지 아프칸에서 완전 철수를 선언했다. 앞으로 아프간이 탈레반에게 장악당하건 말건 무조건 철군한다는 것이다. 아프칸 대통령은 벌써 어디론가 도망쳤다. 미군 철수 이후에 바로 탈레반 정권이 들어섰다. 깡마른 탈레반 지도자는 북베트남 베트콩 지도자들처럼 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세계 최강국 미국을 이겼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슬프게도 ‘당근과 채찍’ 같은 쉬운 삶의 지혜도 몰랐던 것 같다. 어느 사회에서나 소수의 강짜부리고 텃세부리고 행패부리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을 응징하고 복수해서 해결하지 않는다. 배불리 밥 먹여 주고, 목욕시키고 차비주고 타일러 보내면 된다. 인간사에서 약하다고 얕보지 말고 힘으로 찍어누르지 말며, 신의를 존중하고 약속을 지키며, 도와주고 베풀며,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살면 존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최빈국 아프칸을 침공한 최강국 미국은 자존심과 존엄성은 간 곳이 없다. 아프칸에 2조원이 아닌 2조달러 이상 쓰고 20년간 수많은 생명을 희생했지만 야비하게 야반도주로 끝냈다. 미국은 베트남전을 반면교사 삼아서 전혀 반성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무서운 나라 고약한 나라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아는 나라 존경받는 나라가 되기 바란다. 최강의 미국이 존경을 받아야지 가난하고 배고픈 어린이 여성 노약자들에게 행패나 부리는 깡패 양아치 얼간이 골빈놈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는가?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울 줄 아는 마음)으로 마친다.  

 

 

저작권자 © 사람과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