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덕용 칼럼 _ 다니구치 케이

 

태양의 한 조각이 되다

 

글 · 임덕용(꿈속의 알프스 등산학교)  사진 · 다니구치 케이

 

 

“대학에서 4년간 편히 지내기 위해서 지금 이 소중한 시간을 

의미 없는 공부로 보낸다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나 했을까요?

 스스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요? 

이 지구에 사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등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이나 하는 것일까요? 

…일직선으로 강을 내려가기보다는 강의 흐름을 따라 

구불구불 이리저리 굽어가며 전진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실패할지도 모르며 좌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런 삶의 길이 내 마음에 듭니다.” 

- 다니구치 케이가 고등학교 때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태양의 한 조각』(저자 오이시 아키히로) 일부 발췌 -

 

 

잊을 수 없는 첫인상

필자와 다니구치 케이(1972~2015)는 황금피켈상 심사위원과 후보의 자격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에서 그의 생전에 몇 번 만났었고, 그 인연으로 샤모니 아르장띠에르에서 함께 믹스 등반을 하기도 했다. 

케이의 첫인상을 잊을 수 없다. 우리의 첫만남은 황금피켈상 심사에서였는데, 당시 케이와 같이 온 남성 등반가들은 필자에게 매우 정중하게 (동양적 사고에 따른 심사위원과 산악인 선배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지만, 케이는 고개 한 번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왜인지 필자는 첫인상을 시작으로 그를 만날 때마다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당당함에서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게 다 있어!’라는 생각을 했었는지 모른다. 

‘싸가지가 없다’라는 말은 ‘버릇없다’, ‘윗사람에게 예의가 없다’라는 의미로, 표준어는 아니지만 누구나 잘 아는 욕이다. 우리가 살면서 피하고 싶은 사람으로 잘난체하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 화를 잘 내고 거짓말하는 사람, 이간질하며 신의가 없는 사람, 배려가 없으며 구두쇠 같은 사람, 불편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피하고 싶은 사람은 ‘싸가지 없는 사람’이 아닐까? 싸가지 없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합쳐놓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케이는 황금피켈상 같은 형식적인 행사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초청받아 온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등반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만 차 있었던 것 같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여성 최초 황금피켈상(제17회) 수상자라는 명예나 타이틀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심사위원과 후보자들이 같이 등반할 수 있는 기회였던 아르장띠에르에 도착하자마자 날렵한 닌자처럼 변한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로프를 묵고 장비를 챙기는 그녀의 눈은 살쾡이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쉬운 루트이지만 날렵하고 확실하게 확보물을 설치하며 오르는 그녀가 인상적이었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뜨거운 열정

다니구치 케이는 2008년 가을, 파트너 카주야 히라이데와 2인 혼성으로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 미등봉 카멧(7,756m) 남동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올랐다. 1,800m 벽 길이에 난이도 M5의 카멧을 선택한 것은 미지의 세상에 대한 신성한 도전이었다. 

9월 1일, 니티를 출발해 이틀간 도보 카라반으로 동(東)카멧 빙하와 라이카나 빙하가 만나는 4,7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9월 4일, 고소적응과 정찰을 위해 동 카멧 빙하로 향했다. 이후 5,000m의 1캠프와 5,500m의 2캠프를 거쳐 모레인 지대가 끝나는 5,750m 지점까지 진출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하고 9월 10일, 케이는 두 번째 정찰과 고소적응에 나섰다. 노말 루트를 통해 7,200m의 미드콜(Mead Col)을 넘어 6,600m의 4캠프에서 이틀간 비박하며 벽의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9월 17일부터 25일까지 휴식하며 등반을 위한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내린 눈은 폭설로 변해 일주일간 계속됐고 빙하에는 눈이 2m나 쌓였다. 9월 28일, 남동벽 바로 밑 5,900m에 진출, 전진캠프를 설치했다. 날씨는 좋았고 한동안 이 상태가 지속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벽 등반을 시작했다.

9월 29일, 전진캠프를 떠나 크레바스를 건너 눈과 얼음이 섞인 벽을 올랐다. 설질은 나빴지만 얼음 상태는 좋았고, 6,600m 지점에서 비박을 했다. 다음날, 얼음과 푸석 바위가 섞인 믹스구간을 돌파해 6,750m 지점에 도착 후 비박했다. 등반 3일 차, 썩은 얼음과 바위로 이어진 구간을 올라 7,000m 지점에서 비박했다. 7,000m 이후 구간은 어려운 혼합등반 구간이었다. 암벽구간을 넘어선 후 설 벽을 오른 뒤 7,100m 지점에서 비박했다. 다음날, 최고 난도의 빙벽구간을 돌파해 바나나 꿀르와르 직전에 도착했다. 7,250m 지점에서 비박 후 바나나 꿀르와르를 통과, 7,600m 지점에서 비박했다. 

등반 8일 차, 정상 리지를 통해 1시간 만에 등정에 성공한 후 북동벽의 미드 콜을 거쳐 4캠프로 하산했다. 하강을 시작했을 때 날씨가 흐려지더니 다음날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모레인 지대로 하산해 10월 6일, 2캠프에 도착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밤을 새워 걸어, 마침내 10월 7일에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벽에 매달린 채 6일을 비박하며 8박 9일 만에 등정한 실로 엄청난 등반이었다. 케이는 미지의 벽에서 경량 속공등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2001년 미국 데날리(6,190.5m) 등반 후 2002~2003년에는 에베레스트에서 청소등반, 2004년 파키스탄 스팬틱(7,027m) 골든피크 북서벽 신 루트와 라일라피크 신 루트 개척, 2005년 무즈타그아타(7,564m) 동릉 등반, 2006년 마나슬루 등반, 2008년 인도 카멧(7,756m) 남동벽 사무라이 다이렉트 신루트 개척, 2009년 파키스탄 쿠냥치히시(7,400m) 서벽 등반, 티베트 가우리상카(7,134m) 동벽 등반, 파키스탄에서 미등벽으로 남아 있던 시스파르(7,611m) 남서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했다.

케이는 이후 파키스탄과 티베트, 북미와 알래스카로 방랑의 길을 계속 걷다 2015년 12월 21일, 훗카이도 다이세츠산 구로다케(1,984m) 정상에서 추락해 세상을 떠났다. 2000년 케이오산악회에서 등반을 시작한 지 15년, 태양의 한 조각처럼 뜨거웠고 열정적인 삶이었다.

 

 

싸가지 ‘있는’ 알피니스트

케이는 “자연을 만나기 위해 산에 간다”라고 말할 정도로 진심으로 자연을 사랑했다. 또한 그는 “미지의 세계 속에서 미지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결과가 뻔한 등반은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다니구치 케이의 좌우명은 ‘일생에 한 번뿐이다’라는 의미의 ‘일기일회(一期一會)’였다. 그녀는 한 번 갔던 산은 정상에 올랐든 오르지 못했든 다시 가지 않았다. 새로운 것만 찾는 것,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었다. 또한 “산의 작은 것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오르는 게 좋다”라며 철저하게 알파인 스타일 등반을 했다. 사실 그는 공정한 싸가지 있는 알피니스트였다. 자유로운 등반을 위해 후원 사 도움도 받지 않았기에 항상 어려운 원정 등반을 했던, 정말 진정한 싸가지 많은 산악인이었다.

다니구치 케이는 2009년 스팬틱 원정에서 고 김형일 대원과 친분이 생겼다. 이후 김형일 대원은 자신이 주관했던 토왕폭 등반 행사에 케이를 초청했고 케이는 원정 등반에서 돌아오자마자 주저함 없이 참가하기도 했다. 2011년 김형일이 촐라체 북벽에서 추락사한 후에 케이는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김형일의 어머니를 만나 가슴 깊이 울었다고 한다. 2011년 먼저 간 김형일이 케이를 오라고 한 게 아닐까? 오라고 한다고 케이는 왜 겁 없이 갔을까? 두 사람은 지금 함께 줄을 묵고 가고 싶은 산을 실컷 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항상 두려움에 물러나지 않았던 다니구치 케이. 그저 담담하고 당당하게 산에 오르던 싸가지 있는 43세의 젊은 그녀가 그립다. 겉으로는 싸가지가 없어 보였지만 그의 뜨거운 가슴 속에는 진한 싸가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다니구치 케이, 그녀는 내가 만난 가장 싸가지 있는 여성 알피니스트였다. 

일직선으로 강을 내려가기보다는 강의 흐름을 따라 구불구불 이리저리 굽어가며 전진하는 것도 재미있다면서 작은 몸을 던져 살았던 사람,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강한 사람, 자연을 더 자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산을 오르던 사람. 태양의 한 조각이 되어 뜨겁게 타오른 다니구치 케이, 그의 빛이 진정한 알피니즘의 미래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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