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진흥회와 함께 걷는 해파랑길 _ 속초 아바이마을~죽도정

 

미안하다, 비파랑길이었다

아바이마을~낙산해변~~~

 

무슨 용한 재주를 지녔다고 그 지독했던 비구름을 피했겠는가. 맞기에 적당하다 할 수는 없지만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비가 내린 날이었다. 대략 40km 정도 걸었던 12시간 정도 가운데 비가 내리지 않았던 건 한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비가 아니었다 해도 어차피 땀에 젖었을 테니 날씨 탓은 하지 않았다. 빗줄기는 시원했고 파도는 사나웠으며 길은 여전히 걷기에 좋았다.

 

글 사진 · 서승범 객원기자

 

 

‘우리 국토를 종주하려면 눈·비·바람·더위를 이겨내면서 4계절을 겪어보셔야 합니다.’

지리한 장마가 한창이었을 때 트레킹 일정을 며칠 앞두고 공지가 떴다. 강원 내륙과 경기 북부는 호우경보로 시끄러고 강원 영동의 동해안은 강우 확률 80%였지만 비의 양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예보되었다. 비가 예보되면 걸을 준비가 굉장히 번거롭다. 어떻게 하면 젖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을 조금 달리하면 아주 단순해진다. 어차피 젖을 거잖아. 이번엔 후자다. 갈아입을 옷만 챙기면 끝.

 

 

파도의 고장

물론 양양은 설악의 고장이다. 설악의 남쪽과 점봉산의 북쪽이 양양군이다. 대청봉 정상석 한 뼘 위에 떨어진 빗방울은 쌍천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가고 한 뼘 아래 떨어진 빗줄기은 남대천을 거쳐 동해로 접어든다. 남대천은 동해로 흐르는 ‘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저 아래 형산강처럼 ‘강’ 꼬리표를 단 물줄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처럼 비가 많은 시절의 남대천 하류는 무척 사납다. 바다와 만나기 직전의 남대천을 건너는 낙산대교에서 바라본 남대천에는 황톳물이 격하게 파도치며 흘러갔다. 남대천의 파도 때문에 양양을 파도의 고장이라 한 건 아니다.

지나온 고성의 바다와 마찬가지로 양양의 바다 또한 빼어난 모습들을 하고 있어서 어딜 가나 아쉽지 않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맑은 물과 고운 모래로 유명한 해수욕장이 여섯 곳 있다. 북쪽에서부터 뒤져보자면 설악, 낙산, 수산, 하조대, 죽도, 남애해수욕장이다. 이 해수욕장들은 고운 모래사장 혹은 전망 좋은 바위산의 조망 등과 어우러져 그동안 이름이 높았다.

지금은 인기의 척도가 다르다. 파도가 좋아야 한다. 양양의 바다에서 아니 강원도의 바다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죽도다. 검은 웨수트 차림으로 젖은 머리를 늘어뜨린 청춘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눈길이 바다 저 먼 곳의 라인업에 이른다. 라인업은 서퍼들이 파도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바다 위의 대기선이다. 바다의 움직임이 파도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해 탈 만한 파도인지를 가늠하는 ‘서핑의 최전방’이다. 죽도는 파도도 좋지만 해안에서 라인업에 이르는 대부분의 구간이 수심이 낮고 평평하게 이어진다. 수심이 급격하게 깊어지는 여느 해안과 다르다. 죽도는, 그리고 양양은 파도의 고장이다.

죽도에서 꽃을 피운 서핑 바람은 다른 해수욕장까지 번져 인근의 인구, 기사문, 동호해수욕장도 서퍼들로 북적인다. 이 궂은 날씨에도 말이다. 서퍼들의 검게 그을린 등짝은 말한다. “어차피 바다에 들어가는 건데 비가 무슨 상관?” 우리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비 내리는 새벽 도로를 따라 걷다가 마주친 차들은 우리 앞에서 속도를 낮췄다. 안전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 사람들 지금 이 비를 맞고 걷는 거야?’ 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시선을 느낄 때 우리끼리 그랬다. “어차피 땀으로 젖을 거, 비에 젖는 게 무슨 상관이겠어.”

 

 

구름보다 묵직한 근심

아바이마을에서 죽도정까지 두 번에 나누어서 걸었다. 구간으로 따지면 45코스 중간부터 42코스 시작점까지다. 대략 40km 정도이니 한 번에 20km씩 걸은 셈이다. 지난번에 알린 것처럼 서울에서 자정에 출발해 깜깜한 새벽에 동해에 도착한다. 전에는 좀 걷다가 점심으로 준비한 도시락을 먹었지만 해뜰 때 걸으니 이젠 도시락이 점심이 아니라 아침이다. 그나마도 하루종일 내리는 비 때문에 생략하고 걷기 전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든든하게 밥을 챙겨 먹고 출발지로 이동해 잠시 쉬었다가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면 걷기 시작한다. 중간에 두세 번 정도 모여서 쉰다.

새벽 5시 반 정도부터 걸으니 5시간이 걸린다 해도 오전 10시 반이고 6시간이 걸려도 오전이다. 20km면 옛말로 50리 길이고,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가 25km 남짓이니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바닷가를 따라 난 평평한 길로 걷는 50리는 좀 걷다 보면 뚝딱이다. 아바이마을에서 수산항까지 걸은 날도 11시쯤 끝이 났고 수산항에서 죽도정에 이르는 코스도 오전에 끝냈다. 집에 있었다면 늦잠 자고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시간, 우리는 먼 길을 달려와 50리를 걸었으니 제법 뿌듯하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그렇다. 그리 크지 않은 세상이지만, 그게 다 내 세상 같다.

비랑 같이 걷는 일이 딱히 어렵거나 싫은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비의 정도가 좀 심한 편이어서 아쉬움이 많았다. 제법 큰 기대를 했던 하조대, 군 휴양소가 있고 바닷가 바위 쪽으로 데크로 길을 만들어 바다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도록 해두었는데 비와 바람 때문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더불어 서핑을 할 수 없는 해변이라면 파라솔도 꼭꼭 싸맨 채 인적없이 철 지난 바닷가처럼 썰렁한 풍경도 아쉬웠다. 길 건너 캠핑장과 주차장에는 캠핑과 차박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정작 에너지가 넘쳐야 할 바닷가에는 상인들의 근심만 깊다.

낙산해수욕장이었던가 그 언저리 다른 해수욕장이었을까, 빗속에 굽은 허리로 작은 통에 복숭아를 팔려고 해수욕장을 오가던 할머니는 우리 일행을 보고 반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너른 해수욕장에 사람이라고는 우리뿐이었으니. 하지만 비 맞은 복숭아가 어찌 탐스럽겠는가. 각자의 배낭에 먹고 마실 것을 챙긴 까닭에 우리는 복숭아를 사지 않았다. 복숭아를 비닐 봉투에 포장해 포장지에 웃는 얼굴을 그려 길 건너 펜션 손님들에게 “비 오는 날엔 햇살 담은 복숭아를 드세요” 권하면 어땠을까. 뒤돌아서며 “거 좀 사주지” 볼멘소리가 죄송하고 안타까웠다.

 

 

비는 내리고 사람은 걷는다

이틀 중에 하루는 걷기 전부터 내려 끝나서도 비가 내렸고, 하루는 한 시간쯤 걷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해 마칠 즈음에 그쳤다. ‘비 온댔는데 안 오네’로 시작했지만 ‘그럼 그렇지’로 바뀌었다. 바람도 좀 셌다. 거칠게 몰려오던 파도는 부두에 성처럼 쌓인 페트라포트에 부딪혀 하늘로 튀어올랐다. 비는 비의 일을 했고, 바람은 바람의 일을 했고, 파도는 파도의 일을 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의 일을 했다. 그것이 파도를 타는 일이든 길을 걷는 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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