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통종주 _ 땅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장마 속에 3대강 분수계 태백 삼수령을 지나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에 둘러싸인 태백시는 멀리서 보면 마치 고대 성 안의 마을처럼 느껴진다. 태백시 삼수령에서 출발하여 카르스트(석회암층) 지형의 결정판인 덕항산, 환선봉과 고랭지 배추밭이 유명한 귀네미마을을 지난 이번 산행은 긴 장마와 아내의 자전거 사고로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글 사진 · 나종대

 

 

제54구간(땅통 백두대간 26구간)

삼수령~덕항산~댓재

26.1km, 10시간 58분

 

백두대간 고지대 오지마을

7월부터 끝을 모르고 계속되는 장마 때문에 매일 기상청 일기예보를 주시한다. 8월 1일, 장마전선이 중부와 북한 지방으로 올라갔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태백시로 향한다. 오전 7시 50분에 광주송정역에서 KTX를 타고 오송역에 내린 뒤, 다시 시내버스로 청주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그런데 뒤늦게 문제를 발견한다. 너무 오랜만에 신은 탓인지 중등산화의 밑창이 떨어진 것이다. 부랴부랴 청주버스터미널 앞 아울렛에서 경등산화를 구매한다.

10시 50분, 청주버스터미널에서 태백 가는 버스를 탄다. 버스요금은 28,000원이다. 휴가철이라 차가 많이 밀린다. 오후 2시 20분에 도착하여, 급하게 옥수수와 빵으로 점심을 먹은 뒤 귀네미마을 가는 2시 40분 농어촌버스를 탄다. 버스는 삼수령 가는 35번 국도를 타는데, 승객은 나 혼자다. 귀네미마을에서 태백시로 돌아가는 막차는 오후 4시 15분에 있다고 버스기사가 알려준다.

귀네미마을을 향해 바삐 오른다. 하늘을 쳐다보니 날이 흐리다. 마침 승합차가 와서 손을 들었더니 태워준다. 서울에서 고향 울진으로 여름휴가를 온 가족들인데, 3대가 함께 왔다. 귀네미마을은 삼척시 하장면 동댐 건설로 수몰됐던 30여 가구가 백두대간 고지대에 이주해서 개척한 마을이다. ‘귀네미’라는 마을 이름은 산의 형세가 소의 귀를 닮았다는 ‘우이령(牛耳嶺)’에서 유래했다.

내일 백두대간을 타면 귀네미마을을 지날 수 있지만, 먼저 들린 이유는 내일 산행거리가 26km인지라 백두대간 길에서 귀네미마을 하단까지 내려오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또 차분히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마을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비가 내린다. 농로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비가 더 세차게 뿌린다. 만약 승합차를 만나지 못했다면, 사진도 못 찍고 비만 쫄딱 맞을 뻔했다.

“덕분에 비를 피해 사진을 잘 찍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표하자, 할머니께서 도움이 되어 기쁘다며, 장마철인데 내일 산행 잘하라고 격려까지 해 준다. 각박한 세상에 승합차 가족이 배려해 주었듯이, 나 또한 남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겠다고 다짐한다.  

태백시버스터미널 인근에 숙소를 정하고 이른 저녁을 먹는다. 식후 산책 겸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연못을 찾는다. 이전에 낙동정맥, 백두대간, 태백산 눈꽃산행을 했을 때 태백시에서 목욕과 식사를 하곤 했지만, 산악회와 단체행동을 해야 하므로 황지연못을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카르스트지형(석회암층)에서 물이 솟아나는 황지연못은 크게 상지(上池), 중지(中池), 하지(下池)로 이루어져 있다. 상지에서만 하루 5천여 톤의 물이 솟아난다. 황지연못에서 나온 깨끗한 개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세 개의 물길이 갈라지는 고개

8월 2일, 밤새 유리창에 부딪히는 비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새벽 4시 20분, 알람이 울린다. TV를 켜보니 어제 거쳐 왔던 제천, 단양, 영월에 200mm 이상 폭우가 내려 영동선, 태백선이 운행 중지되었다고 한다. 핸드폰으로 기상청 예보에 들어가 보니 오늘 통과할 삼척시 하장면에 오전 9시부터 18시까지 시간당 40~69mm 폭우가 예보되고 있다. 또 내일도 비가 온다고 한다. 밖으로 나가니 세찬 비가 내린다. 실망하여 광주에 내려가려고 방에서 산행 때 먹을 빵을 먹는다.

오전 6시쯤 밖이 소란하다. 나가 보니 모텔 1층 식당에서 작업자들이 아침을 먹고 나온다. 하늘을 쳐다보니 짙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조금 비춘다. 갈등이 시작된다. 태백시까지 많은 경비를 들여왔고, <사람과 산> 9월호 원고를 8월 10일까지 제출해야 한다. 다시 기상청의 강우예측레이더의 4시간 영상을 보니, 오늘 거닐 구간엔 약한 비구름만 지나고 있다. 결론은 비가 많이 내려 도저히 산행할 수 없을 때 중간 탈출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보자고 다짐한다.

얼마 전 감명 깊게 읽은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가 생각난다. 이 책은 1914년, 배를 타고 영국을 출발해 남극 횡당 탐험에 나선 섀클턴경과 스물일곱 명의 대원들의 634일간의 생존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그들은 영하 30도가 넘는 남극에서도 버텼는데, 비가 조금 온다고 포기하려는 나에게 ‘용기’를 내라고 주문을 건다. 배낭을 메고 나오니 다시 비가 내린다. 터미널에서 망설임 없이 택시를 탄다.

“기사님! 삼수령으로 갑시다!”

백두대간을 할 때마다 피재와 삼수령 지명을 같이 써서 헷갈리는데, 강원대 지리학과 김창환 교수가 2016년에 한국지리학회지에서 발표한 삼수령 관련 자료가 있어 소개한다.

 

삼수령(三水嶺)이라는 지명은 이름 그대로 세 개의 물길이 갈라지는 고개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세 물길이 갈라지는 데는 여러 곳이지만, 동해(오십천), 남해(낙동강), 서해(한강)로 흐르는 3대강의 분수계가 만나는 곳은 삼수령이 유일하다. 그런데 지금 산행을 시작하려는 곳은 ‘낙동강의 물줄기가 분기되지 않는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과거 이곳은 피재였다. 피재는 옛날 삼척 사람들이 난리가 발생하면 이 고개를 넘어왔기에 ‘피난 온 고개’라 하여 피재라 불렀다. 또한 ‘피’는 ‘벼를 못살게 하는 못된 풀’이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1992년에 태백시에서 피재를 삼수령으로 이름 바꾸고, 기념탑까지 세운 것이다. 그러다 2011년에 삼수령에서 1km가량 떨어진 낙동정맥이 분기되는 매봉산 중턱에 제2의 삼수령 표지석을 세웠다. 결국 삼수령이라는 표지석이 두 군데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유물도 충분한 고증을 거치듯, 백두대간 표지석도 신중히 세워야 한다.

 

삼수령 기념탑 옆 정자에서 바지를 타고 흘러내린 물이 신발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비닐로 발목을 감싸고, 우천 스패츠를 찬다. 오늘 산행코스는 건의령, 덕항산, 귀네미마을을 거쳐 댓재까지 가는 26km이다. 여름용 고어텍스 재킷을 산행 시작할 때 입었다가 바로 벗어 배낭에 넣는다. 비를 맞으며 산행을 진행하는데, 분홍색 우비를 입은 부부 백두대간 등산객을 만난다.

“어디까지 가세요?” “두문동재까지 갑니다.”

 

 

긴 장마와 새신발증후군

의령 못미처서 갑자기 햇살이 나서 기상청 일기예보에 들어가 보니 낮 동안 40~69mm 폭우 예보가 오후 5시부터 비가 오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푯대봉삼거리를 지나 점심으로 빵과 떡을 먹는다. 구부시령~덕항산~환선봉까지는 바닥을 치고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이 몇 개 있다. 신발 안으로 이미 물이 들어갔고, 새신발이어서인지 오른발 새끼발가락이 매우 아프다. 그렇지만 비가 그치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꼭 피서를 온 것만 같다. 덕항산에서 마산시의 ‘100대명산’ 등산객을 만나 인증사진을 찍고, 환선봉 정상석 뒤편 조망처에서 환선굴, 삼척시내, 귀네미마을 풍력발전기를 바라본다.

귀네미마을에 들어서니 고랭지 배추밭에서 농부가 잡초를 뽑고 있다. 백두대간 높은 곳에서 바라다보니 어제 보았던 귀네미마을 풍경과 달라 보인다. 귀네미마을 최고봉(1,076.5m)에는 물탱크가 있는데, 마을 전경과 지나온 덕항산, 환선봉, 그리고 삼척 시내와 동해까지 보인다. 승용차로 농로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어, 사진작가들이 선호하는 출사지라고 한다.

큰재를 거쳐 황장산으로 향한다. 오후 5시가 넘어서니 숲이 으스스하다. 비도 추적추적 내린다. 멧돼지가 라디오나 유튜브 소리를 듣고 미리 피하라고 켜려고 하는데, 난청지역이라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걷다 보니 반가운 가래나무도 만난다. 최근에 광주광역시 천변에 지천인 가래나무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어 금방 눈에 들어온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삼척택시에 전화하여 댓재에 6시 40분까지 오라고 말한다. 황장산 급경사를 내려가 댓재에 도착하니 택시가 대기하고 있다.

댓재에는 휴게소 겸 민박집이 있다. 5년 전 홀로 대간 때 머물렀던 곳인데, 빨간 벽돌 2층집이다. 일주일 전에 전화로 민박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코로나 때문에 휴업 중”이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삼척으로 간다. 삼척까지 택시요금은 32,000원이다. 숙소(모텔) 요금은 7만 원이다. 평소 5만 원 하던 것이 여름 휴가철이라 올랐다고 한다. 숙소에서 얼른 샤워하고 인근식당에서 흑돼지 삼겹살 2인분을 맛나게 먹는다.

고민 끝에 내일 산행을 하지 않고, 아침식사 후 광주에 내려가기로 한다. 내일도 종일 비가 오고, ‘새신발증후군’으로 새끼발가락이 아파 30km의 두타·청옥산을 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와 여기저기에 전화로 일정 변경을 알린다. 내일 산행을 안 하기로 결정하니, 잠도 잘 안 온다. TV를 트니 장마 때문에 전국이 떠들썩하다.

 

 

광주 귀향길과 아내의 자전거 사고

다음 날,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배낭을 챙겨 숙소를 나선다. 모텔 카운터에서 어디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지 물으니, 삼척 중앙시장 쪽에 가보라고 한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마트에서 우산을 사는데 모텔 인근에 삼척문화원이 있다. 아침을 먹고 삼척문화원에 찾아가 자료를 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젊은 직원이 여기는 없으니, 시립박물관이나 삼척시청을 찾아가 보라고 한다. 문화원을 나와 1km 떨어진 삼척버스터미널을 향해 걷는다. 가다보니 꽈배기 가게가 있다. 꽈배기를 보니 내가 떠나온 동안 아내가 식사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걱정된다.

7월 해질 무렵, 영산강 자전거 도로에서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탔는데, 나를 따라오던 아내가 잠깐 방심한 사이 나무다리에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119를 불러, 전남대병원 응급실에 가서, CT와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앞니가 한 개 빠지고, 오른팔이 골절되고, 얼굴에 타박상, 갈비뼈에 실금이 가는 큰 부상을 당했다.

사고 이후 아내가 혼자서 목욕을 할 수 없어 내가 도와주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쑥스러운지, “59년을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라고 말하며 웃었다. 아내의 말에 “책 <어린왕자>에 나온 구절처럼, 내가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 주고, 바람을 막아 준 한 송이 장미꽃이 오천 송이 장미꽃보다 소중하다”라고 답했다.

아내 몫으로 꽈배기 한 봉지를 사서 오전 10시 40분에 삼척종합버스터미널에서 강릉을 거쳐 대전가는 버스를 탄다. 버스요금은 33,600원이다. 버스요금이 많이 올랐다. KTX와 별 차이가 없다. 3시간 10분이면 도착할 버스가 비가 많이 내리고 휴가철이라 5시간이나 걸렸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오늘 산행을 포기하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대전에서 광주행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도착하니 저녁 9시가 되었다. 집에 와 보니 딸이 아내를 도와주고 갔다고 한다. 단, 하루 산행을 위해 3일을 소모한 땅통종주였다. 이번 장마가 코로나도 쓸고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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