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식의 산에서 듣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산 속에 사는 조각가 정봉기씨

이름 모를 들풀 하나도

남이 아니구나

 

글 · 박원식  사진 · 주민욱 기자

 

조각가 정봉기씨(51)가 산 속에서 살기 시작한 건 8년 전부터였다. 심히 외지거나 거친 산중은 아니다. 그러나 슬쩍 깊은 맛을 풍기는 산자락 발치. 산과 산 사이 으슥한 계곡 가에 둥지를 틀었다. 산과 하늘, 이 둘 외에 표 나게 더 보이는 게 없다. 일러 적막강산이라.

차갑고 흐린 겨울 한낮. 골짜기 아래에서 몰아치는 맵찬 바람이 나무들의 몸을 흔든다. 이미 누드로 늘어선 초목들은 더 벗을 것도 더 떨굴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삭풍을 견딘다. 좌정처럼 묵연하다. 얼어붙은 골짜기 양안에 두터이 쌓인 눈 더미 위엔 산에서 내려왔다가 산으로 돌아간 짐승들의 발자취.

산중 살림 8년. 애환도 시련도 드물지 않았겠지만, 자연 안에서 누린 즐거움과 얻은 소식의 수효도 많을 테지. 도시생활의 잡답(雜沓)에서 벗어난 지 오래이니 담백한 생활의 속살이 이미 실팍하겠지.

정씨가 애초부터 산림 생활을 선망했던 건 아니다. 가급적 자연 속에 묻혀 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을 앞세운 바가 없었다는 게 아닌가. 초야에서의 은거나 풍류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단다. 오직 절박하고 단순한 까닭으로 산야에 들었을 뿐이라지.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화업( 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건물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정씨 역시 작업실을 장만하기 위해 아예 산골로 이주했던 것.

동기는 그랬으나 산골 생활에 경력이 붙으면서 산림 애호가로 변했다. 산을 어버이처럼 숭상하고, 숲과 초목과 짐승들을 이웃사촌처럼 여길 수 있는 감성의 폭을 키웠다. 이 산골에 들기 전의 정씨는 이태리에서 살았다. 이태리 까라라 국립미술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던 것. 아내는 물론 초등생이었던 아이들 둘까지 동반한 유학이었으니 웅장한 행차였다.

“다소 늦은 나이에 유학을 결행한 건 터닝 포인트랄까, 갱신이랄까, 그런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었어요. 지지부진한 작업에 몹시 괴로웠던 거죠. 사실 유학을 할 만큼의 경제상의 여유도 없었지만, 이판사판 모든 걸 미술 하나에 걸겠다는 오기 비슷한 각오로 후다닥 떠났어요. 전 재산이었던 5천만 원을 쥐고 날아갔는데요, 학비며 생활비 지출을 하다 보니 1년 만에 완전히 바닥나더라고요. 죽을 맛이었죠. 아이고, 어쩌나, 고민 고민 하다가 이태리에서 만든 작품들을 싸들고 저 혼자 일시 귀국, 개인전을 열었어요. 그런데 용케 운이 따라줬죠. 작품이 꽤 팔린 겁니다.”

“작품이 좋았던 덕분에?”

“그럴 리가.(웃음)”

“그럼 행운의 여신이 방문하셔서?”

“그랬다고 봐야죠. 그 당시 제가 이름 난 조각가도 아니었고, 기량이 남달리 빼어난 것도 아니고, 쉽게 팔릴 리 없죠. 제 고향 충주에서 전시회를 했는데 처음엔 도무지 판매가 되질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 사는 어떤 분이 우연히 전시장을 들렀다가 작품 다섯 점을 사가는 게 아니겠어요? 무려 다섯 점이나 말이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그러자 충주 시내에 좍 소문이 퍼졌어요. 야, 정봉기의 조각이 대단한가봐,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이죠. 그러면서 충주 사람들 몇몇에게 작품이 또 팔려나갔어요. 한 마디로 뜻밖의 성공을 거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을 들고 이태리로 돌아가 유학생활을 계속했어요. 이런 일은 해마다 반복됐죠.”

“독을 품고 결행한 유학이 마침내 전환점이 된 거에요?”

“절절한 고심 끝에 내린 유학이었기에 온몸으로 열심히 살았죠. 작품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근성 같은 게 제 삶에 붙은 계기였던 건 분명해요. 하지만 생활은 늘 고달팠어요. 물질적 심적으로 말이죠. 외국생활이란 실로 녹녹치 않더라고요. 음, 뭔가 뿌리 뽑힌 삶이라는 느낌? 그런 거! 물 위에 떠 갈피없이 흔들리는 돛단배! 안정감을 찾기 어려웠어요. 그렇다고 집도 절도 없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여의치 않았고요. 하지만 결국 5년 만에 귀국, 이 후미진 산골로 들어온 겁니다.”

손수 지은 컨테이너 하우스

산에 들어 먼저 한 일은 당연하게도 집짓기였다. 이미 가진 건 없었으니 조촐한 집을 짓는 게 합당했겠으나 그는 그러질 않았다. 목표가 분명하면 그럴싸한 상황이 주어지는 게 인생이라 믿었던 정씨는 주변으로부터 빚을 얻어 번듯한 2층집을 지었다. 빚에 쫓기기란 맛이 간 도사견에게 추격을 당하는 것처럼 만고에 괴로운 일. 그러나 그는 지레 겁을 먹기를 삼갔다. 믿는 구석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작품이었다. 작품을 오지게 생산해 갚아나가면 그만이라 여겼으며, 실제 그는 어렵사리나마 그렇게 일을 처리해왔던 것 같다. 2층짜리 살림집 옆댕이에 그는 작업실 하나를 추가로 지었다.

작업실은 수출입 화물용 중고 컨테이너를 소재로 삼았다. 그건 일반 컨테이너와 달리 벙커처럼 튼튼한 구조물이다.

“비용이 덜 드는 건축을 궁리하다가, 인터넷에서 컨테이너 하우스에 관한 정보를 보고 필이 꽂혔죠. 아하, 그거 재미있겠다! 철판 구조물이라는 게 우선 호감이 갔어요. 철이란 조각의 소재이기도 하니까. 용접이나 구조 형성이라든가, 그런 건 제 손으로 직접 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점에도 매력을 느꼈어요.”

“전체 공정을 혼자 감당했나요?”

“조수 한 사람을 데리고 모든 과정을 직접 처리했죠. 고생이 많았어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컨테이너를 활용했던 것인데, 완성에는 자그마치 1년 반이나 걸렸죠. 돈을 주고 업자에게 맡겼다면 한두 달이면 뚝딱 다 끝났을 것을. 물론 비용 절감은 되었죠. 인건비를 대폭 줄일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철 작업을 한다는 게 신났어요. 마치 작품을 만들 듯이.”

“주변 자연 풍치와 자칫 불화하는 건축이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안정된 2층 구조와 통유리를 과감하게 적용한 개방성으로 유연한 표정을 살려냈다는 느낌이 들어요. 컨테이너 하우스의 장단점은 무엇을 들 수 있죠?”

“단점은 딱히 발견하질 못했어요. 벽체와 천정의 단열을 완벽하게 보완할 경우, 일반 주택보다 불편할 건 없다 봐요. 장점이라면 약간이라도 비용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 여느 주택에서 구현할 수 없는 개성을 연출할 수 있다는 점이겠죠.”

정봉기씨는 최근에 세 번째 집을 다시 지었다. 마당 모퉁이 높직한 둔덕에. 이 건물은 작품 전시장으로 쓸 작정이란다. 산에 들어와 지은 집 세 채 가운데 두 채는 작품을 위한 공간이니 그의 창작 욕구와 실력을 가늠해볼만 하다.

그는 미대를 졸업했던 20대 후반 한때 석공장 석수(石手)로 취직해 3년간 일을 했다. 이른 결혼으로 얻은 처자를 부양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지. 이왕에 조각가의 꿈을 키워온 바에야 돌의 맨살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 있는 석공장 체험이 실속 있으리라는 계산도 없지 않았을 게다. 닦으면 빛이 나는 법. 석공장에 근무하며 날이면 날마나 돌을 다듬은 덕분에 그의 기술은 숙련되었고, 돌에 매료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오직 돌만을 작품의 재료로 삼고 있다.  

“돌이 지난 정서적이고 안정적인 속성, 따뜻한 내면성이 좋아요. 철이나 동은 딱딱하고 차갑죠. 제가 인간의 내적 심성을 드러내는 작풍을 구사하는데, 그러기엔 돌보다 나은 재료가 없어요. 화강석, 대리석, 옥돌, 오석, 맥반석 등 다양한 돌들을 소재로 끌어들이고 있어요.”

조각가란 혼이 없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적’을 행한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 왕이었다. 천재 조각가이기도 했던 피그말리온은 현실의 여성을 멀리하는 대신 상아를 빚은 아름다운 여인상 조각에 심혈을 기울였다. 작품은 완벽했다. 실제의 여인처럼, 그 입술에서 숨결이 흘러나올 것처럼 생생하고 수려했다. 피그말리온은 마침내 상아조각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연인으로 여기어 극진한 사랑을 바쳤다. 밤이 되면 그녀와 함께 동침, 간절한 포옹과 입맞춤을 했다지. 그 가망 없는 나르시시즘이라니. 심혼(心魂)을 다해 빚은 차디찬 상아조각으로 구원(久遠)의 여인상을 창조하고서 황홀한 혼란에 빠진 피그말리온의 신화는, 생명 없는 물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조각 예술의 마술을 웅변한다. 조각을 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물체의 속성에는 변화가 없지만, 작가의 심상으로 빚어진 형상은 그 이전의 물체와 달리 혼을 머금는다. 조각가의 꿈과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생명감 말이다. 정봉기씨가 말하는 ‘내적 심성 드러내기’란 바로 이 ‘생명감’에 관한 언설일 터.

 

‘기어이 꽃을 피우는 나무들’

정씨는 거처 안팎 곳곳에 수많은 조각 작품들을 전시처럼 진열해 두었다. 누구나 찾아와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거처를 개방, 소통의 장을 마련한 거다. 구상 조각을 위주로 하는 그의 작품들은 섬려하거나 정교해 쉽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여인상이 대부분이다. 밭둑에서 주워온 돌덩어리에 관음보살의 상호(相好)를 새겨 넣은 작품들엔 돌을 반죽처럼 능란하게 주무르는 고수의 기량이 완연하다. 그러나 이 멍청이가 보기엔 대체로 새롭지 않다. 동어반복적인 정형화의 틀이 느껴진다. 이와 같은 소감을 전하자 그가 이렇게 응수한다.

“현대미술은 흔히 시각적, 소재주의적 새로움만을 추구하죠. 그것으로 삶과 현실을 도발하거나 전복을 꾀하기도 해요. 그 역시 미술의 본령입니다. 하지만 저는 시각적 효과보다는 내적 감성의 표출이라는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일테면, 인간사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이라는 가치, 인간애의 지평, 인간 본성의 순수성, 이런 것들을 미적으로 승화하자는 게 일관된 지향이죠. 글쎄,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흔들림 없는 집요한 추구란 매너리즘과는 이미 다르지 않을까?”

“선생은 자연 속에 살고 있어요. 이렇게 살면 정신적으로 한결 자유로울까?”

“어디에 살건, 삶이란 때로는 자유를 부여하지만, 또 때로는 감옥이지 않겠어요? 전전긍긍과 고독 같은 게 아니고서 창작 의욕을 돋울 수도 없으니, 때때로 느끼는 감옥살이 기분도 나쁜 건 아니죠.”

“창작에 관한 자극과 경쟁의 요소가 드문 산 속에서 무엇으로 에너지를 얻죠? 자연에서? 물소리 새소리, 꽃피고 지는 초목들에서?”

“산에 조예 깊은 이들이 흔히들 말하길, 자연이 선생님이라고들 하죠. 이 산골에 살며 그걸 실감합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 보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보여요. 인위에 길들여진 사고에 변화가 와요. 감정이입이랄까, 모진 비바람에 시달리면서도 기어이 꽃을 피우는 나무들과 나의 고달픈 삶이 무엇이 다르랴 하는, 이름 모를 들풀 하나도 남이 아니구나 하는, 그런 감흥으로 안심과 힘을 얻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활은 늘 난적이죠. 일테면 처자를 건사하는 일, 물질의 결핍, 그런 게 여전히 덜미를 틀어쥔다는…. 그래서 그리운 건 홀로서기에요. 혼자 살기! 하지만 용기 있게 다 내려놓을 수도 없으니 무슨 인생이 이렇단 말인가?(웃음)”

“과히 비관 마시라. 부단한 노력으로 가족을 건사해 온 선생은 무죄이니.”

“저는 예술지상주의자는 못 됩니다. 밥벌이란 지겨운 일이지만, 그 안에 인격과 예술을 성숙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일 뿐이죠. 저 숲의 모든 동식물들치고 먹지 않고서도 생을 유지하는 놈이 하나라도 있던가?”

일희일비, 두 맛을 고르게 맛보았겠지. 자연이 주는 안도감은 단맛이요, 멍에처럼 들러붙는 생활이란 쓴맛일 터. 인생이 하루살이와도 같다고 하지만, 그 짧은 어간에 희비 곡절을 겪지 않고 지상을 통과할 수 있는 천하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무욕이 상책이라지만, 욕망엔 눈이 없어 럭비공처럼 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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