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 _ 안광옥

  

클라이머와 등산교육의 대부!

범산(汎山) 안광옥(安光玉) 선생님을 기리며

 

글 · 신동간(서울산악회)

 

60년대 중반 서울산악회에서 주최하던 크로스컨트리대회에서 심판과 대회운영을 지휘하시던 거구의 안광옥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이 처음 인연이다. 그 후 68년 말 암벽등반을 함께하던 고등학교 선배의 권유로 서울산악회에서 설립한 학생부에 들어가 함께 활동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안광옥 선생님을 비롯해 당시 기라성 같은 선생님들을 알게 되고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모든 산악인들에겐 그러하듯이 선배님이라 부르기는 너무 어려운, 연배가 있으신 선배님들에게는 꼭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쓰고 있다. 지극히 존경하며 지내던 시절에 항상 어렵기도 했고, 꾸지람을 하실 때는 무섭기도 했지만 학생부 시절 인왕산에서 암벽등반 연습을 하고 댁이 있는 영천 쪽으로 하산하여 찾아뵈면 그리도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부근의 유명한 도가니탕 집에서 음식을 사다 모두 배불리 먹고 돌아가게 해주시던, 우리에게는 따뜻한 그러나 어렵기만 한 어르신이었다.

선생님은 후배들과 교육 받는 학생들에게는 무척이나 엄격하고 단호하셨으니, 수년전 넌지시 “왜 그리 엄하게 하셨냐”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은 “자칫하면 산에서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산에서 만큼은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한국등산학교의 교훈인 ‘성실, 인내, 안전’을 모토로 도봉산장에서 서원터까지 아침구보를 하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셨던 일화를 들려주셨다. 엄격함 뒤에 숨은 따듯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선생님은 타고난 기획과 추진력을 가지고 모든 일을 추진하셨다. 전후 그 어렵던 시절 감히 누가 생각지도 못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산장을 북한산 백운대 밑에 건립하는데 앞장서셨다. 건립할 당시 북한산을 찾던 모든 산악들이 건축자재를 나르며 모두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하던 일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신우회 도움으로 이렇게 지어졌던 산장이 20여 년 전 화재로 소실되고, 남은 석조 위에 목조로 현대식 산장으로 지어졌으나, 지금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기념비적인 이 산장을 없애려 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 가득하다.

선생님은 당시 그리 많지 않던 산악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셨다. 하나는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 크로스컨트리대회다. 참가단체팀당 지도심판이 한명씩 배정되어 2박 3일 간의 산행활동 모두에 교육을 해가며 대회를 진행했다. 참가팀 모두에게 우승상을 수여하여 각자 모교에 돌아가 전교생 앞에서 상을 탄 것을 자랑스럽게 발표하도록 해 많은 학생들에게 산악부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던 일 또한 획기적이었다. 이후 당시 대한산악연맹에서 주최하던 전국 등산대회와 대구 팔공산 60키로 극복 등행경기대회, 무등산 등행경기대회 등 많은 등산대회가 열리게 되며 전국적으로 등산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69년 한국산악회 히말라야 원정대 훈련 중이던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10명의 산악인이 눈사태로 사망하는,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최대의 산악사고가 발생했다. 선생님은 당시 구조 수색대장을 맡아 사고를 수습했다. 그 후 겨울 등산기술의 보급과 안전을 위해 우리도 체계적인 등산교육기관을 만들어야겠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크로스컨트리대회에 투입되던 예산을 끌어왔다. 어느 특정단체에 구애 받지 않고 연맹과 한산 등의 소속 회원과 군소 일반 산악회에 소속된 최고의 강사진으로 고루 구성했다. 백운산장 건립부터 크로스컨트리대회 등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던 신우회라는 단체와 조선일보사 방우영 회장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971년 겨울 설악산에서 제1회 겨울등산학교가 열렸다. 여기에서도 선생님의 구보 사랑이 시작된다. 매일 아침 강사와 학생 모두가 선생님을 선두로 지금의 소공원 자리에 있던 경남여관에서부터 노루목 소나무까지 왕복 구보를 수년간 했다. 중간에 끼어들다 들켜 다시 노루목까지 2회 왕복을 하던 에피소드도 기억난다.

당시에는 얼마나 장비가 열악하였던지 아이젠이 8발, 10발, 12발 등 다양했고, 어디서 만들었는지 빙판에서 아이젠을 신고 연습하다보면 일부 아이젠이 부러져서 매일 저녁 속초 선박 수리점에 가서 사정사정해서 용접을 해오던 시절이다. 어느 해인가는 설악동에 가뭄과 기온이 높아 아이젠워크 훈련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학생들을 해수욕장 백사장에 데리고 가서 훈련을 시켰다. 토왕폭이나 양폭, 죽음의 계곡 훈련 시에도 잠시도 쉬지 않고 강사들의 간식이나 떡국이라도 챙겨주시던 자상한 분이셨다.

또한 선생님은 등반장비에 대해서도 철저하셨다. 자일이나 하켄, 카라비너 등 장비를 함부로 다루다가는 심하게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이는 당시 장비들을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안전에 관한 의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다만 클라이머가 아닌 산악인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별을 하시던 편협한 면도 있으셨다.

2009년 가을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에게 “야! 동간아 내가 내년에 88세인데, 기념으로 인수봉과 선인봉을 너희와 함께 오를 수 있을까?” 하셨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인수봉 후면 C코스와, 선인과 만장 사이로 오르면 되겠다 싶어 “가능합니다. 제가 준비하죠” 했다. 두어 번 더 다짐을 하시기에 약속을 드리고 나니, 그날 이후 그 좋아하시던 약주도 줄이시고 체력단련을 위해 자전거도 타고 운동도 열심히 하셨다. 나는 그것을 보고 선생님께 “후면으로 오르시면 간단한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야! 이 녀석아. 그리로 오르면 인수봉을 마지막으로 오르는 의의가 없다”시며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다. 나는 후배들과 논의 끝에 후배 둘이 선등을 하고 세 번째로 선생님 그리고 뒤에 내가 붙기로 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한 두 번의 연습 등반까지 마쳤다.

산악동지회 회원들과 서울산악회 회원들의 합동등반으로 ‘안광옥 선생 88세 인수봉 기념등반’을 하게 되는 날 나는 다시 한 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날을 위해 암벽화, 안전벨트, 헬멧 등을 준비하여 출발점에서 선생님께 드리니 웃으시면서 배낭에서 등산학교 당시 사용하시던 장비를 꺼내시는 것이다. 나는 극구 새 장비 사용을 권하였으나, 불편하다고 옛날 정들었던 장비를 사용하셨다. 자일 파트너가 되어 인수봉 정상에 오르는 순간 수많은 클라이머들의 환호 속에 기뻐하시던 모습… 또한 나를 포옹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동간아 수고했다, 고맙다”하시는 선생님의 여린 모습에 내 눈도 붉어졌다.

기념 촬영 후 마음 졸이며 선생님의 하강과 하산을 마치고, 축하연에서 그리도 기뻐하시던, 우리 클라이머들의 대부 안광옥 선생님! 선생님과의 약속 중 선인봉 등반을 못해드린 점을 못내 아쉬워하며 봄이 오면 인수나 선인에서 안광옥 선생님의 추모등반을 계획해 볼 작정이다.

항상 성실함과 인내를 강조하면서 가장 중요한 안전 산행을 가르쳐 주시던, 큰 산이셨던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그동안 모시고 오르던 산과 바윗길을 회상해 본다. 선생님을 떠나보내는 추도식에 참여해 주신 모든 산악인 선배, 동료, 후배님들께 감사의 말씀 전하면서, 다시 선생님과 함께하던 산길을 오르려 합니다.

 

 

 

 

 

 

원로산악인 안광옥 선생이 12월 8일 향년 95세로 별세했다. 12월 10일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열린 합동추도식에는 한국산악회, 대한산악연맹, 산악동지회와 많은 산악인들이 참석해 고인을 애도했다.  

 

안광옥 선생은 1946년 한국산악회에 가입, 1958년 서울산악회를 창립했다. 1962년 대한산악연맹 창립에 참여해, 초대 이사를 역임했다. 1963년 설악산 하계산간학교, 1971년 설악산 겨울등산학교 등을 열었고, 1974년에는 한국등산학교 창립 발기인과 초대 부교장을 지내는 등 한국 등산교육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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