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대구의 북쪽경계는 팔공산(1,193m)이 있고 남쪽 경계는 비슬산(1,084m)이 우뚝하다. 팔공산과 비슬산 사이로 대구의 젖줄인 금호강이 가로지르고 있다. 동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경주 단석산이, 서쪽으로 낙동강 건너 100리 떨어진 곳에 가야산이 서로 조응하는 곳이다. 남북으로는 1,000m고지의 산으로 막혀 있으나 동서로는 대구의 젖줄인 금호강이 흘러 사람이 살만한 지형을 만들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중첩되는 불국토 팔공산신라시대에 국가적으로 삼산오악과 명산대천에 대중소(大中小)로
달님아 높이 솟아 멀리 (내님을) 비추어라 어기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 저자거리에 계신가요 험한 데를 디딜세라 어기야 어강도리 어디에 계시는지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세요 어기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백제시대 민간전승가요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백제시대의 민간전승가요 의 배경 무대는 정읍이다. 장사꾼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낙네의 망부가로,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불린 히트곡이었다.정읍은 조선시대에는 고부나 태인보다도 작은 지방 고을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고부와 태인 지역민들의 반대로 철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무교의 성지 대관령국사성황사강릉의 진산은 백두대간 대관령이다. 조선시대에는 고개마루인 령(嶺)도 산으로 간주했다. 산은 인문학의 진수이다. 전통시대에 산은 마을로 부는 바람을 막아주고 사시사철 땔감을 공급하고 빗물을 계곡으로 모아 물을 공급하여 경작을 도와주었다.대관령국사성황사는 강릉단오제가 시작되고 끝나는 장소이다. 이곳에는 산신과 용신 그리고 칠성신을 모시고 있는 성소이다. 바다에 용왕이 산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산에 사는 용신은 무엇인가. 용신은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있다. 특히 산에는 끊
독락당의 공간미학과 옥산서원의 예학적 관점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한 회재 이언적회재 이언적은(1491∼1553) 이번(여강)의 아들로 외갓집인 경주 양동 서백당의 태실에서 태어났다. 회재는 1514년(24세)에 문과급제하였고, 사간원 사간으로 재직하면서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했다가 파워게임에 밀려 낙향하였다. 이때 경주 옥산으로 들어와 마련한 것이 독락당이다. 그의 호는 회재(晦齋), 자옥산인(紫玉山人), 자계옹(紫溪翁) 등이다.독락당(獨樂堂)은 봉좌산을 중심에 두고 자옥산과 도덕산을 서쪽, 어래산을 동
신라불교에서 자장, 원효, 의상 등 위대한 고승 세 분이 출현하여 한국불교의 토대를 만들었다. 원효가 창건한 절이 영남, 호남, 충청, 경기 등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고, 특히 부산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민중을 왕실 중심으로 단합하게 한 원효김춘추(태종무열왕)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달라’는 의미를 파악하고는 원효를 궁궐로 불러들이던 중 문천에 빠진다. 이에 무열왕은 원효를 요석궁으로 보내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누게 만들었다. 이는 이미 요석공주와 사전에 합의된 일이라 여겨진다. 이 당시 남편은 백제와의 전투에서
겨울바다와 나누는 힐링시간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강원도 동해시로 여유 만만한 힐링여행을 기획하였다. 힐링여행인 만큼 유유자적하게 다녀올 생각이다. 예부터 사대부들은 주거지에서 한두 시간 거리에 멋진 풍광을 즐기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산수가 있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은 KTX가 있어서 서울에서 동해안까지 80분이면 족하니 덕분에 사람 살만한 곳이 많아진 셈이다. 물이 고이면 썩는다. 사람의 기(氣)도 정체되면 약해진다. 기(氣)를 재충전하는 데는 여행이 최고다. 겨울 동해여행도 식후경동해시로의 기차여행은 처음이다. 청량
속리산 복천암과 보은 우당고택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불교 문화재와 유교 문화재가 있다. 두 공간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은데, 우선 불교 공간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조성된 유서 깊은 곳이고, 유교 공간은 주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장소이다. 또한, 불교 공간은 종교적 공간으로 붓다를 모시고 있고, 유교 공간은 도학적 공간으로 공자나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불교 공간은 조망이 좋고, 수행하기에 적절하지만 풍수적으로 불리한 곳에 자리하고, 유교 공간은 마을 영역 안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의리의 땅 홍성과 조중세의 베품 가을장마 중이었지만 답사일은 하늘이 청명하였다. 처서를 지나니 바람은 시원하지만, 태양열은 여름보다 뜨거웠다.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놓아 주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주시어 영매들이 무르익기를 재촉하시고…”라고 노래한 릴케의 이 생각난다. 답사지는 의기충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홍성으로, 내포 중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홍성이 배출한 인물들고려의 왕사 태고화상 보우는 신돈의 참언(1368)으로 속리산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최영 장군(1316
좌절의 아픔 승화시킨 무등산의 정기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지금의 담양군은 조선시대 담양도호부와 창평현이 통합된 행정구역이다. 담양은 영산강이 흐르는 북향 지형이다. 영산강을 중심으로 남쪽에 무등산이 있고 서북의 내장산과 동북의 회문산을 양축으로 강천산, 추월산, 병풍산 등 높은 산이 진을 치고 있어서 북풍을 막아주는 지형이다. 담양 관아가 영산강변에 위치하여 배산임수가 아닌 배수임산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은 풍수지리적인 측면보다는 교통 지리적인 이점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유형으로 경기도 여주 읍치가 있다. 사
운봉, 전란을 피하지 못한 지리산 턱밑 십승지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척추이다. 이에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나눌 수 있다. 강원도에서는 영동과 영서로 나누어지고, 삼남에서는 경기 충청 호남과 영남으로 나누어진다. 그럼에도 남원의 운봉읍과 인월면, 아영면과 산내면은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특이한 행정구역이다. 전라도에 내린 빗물이 남강을 거쳐 부산 앞바다로 흘러간다면 바로 이곳이다. 여의치 않은 운봉의 역사지형적으로는 경상도 영역이나 행정적으로 전라도였던 까닭인지, 운봉의 역사 또한 여
남사예담촌과 니구산의 정기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지리산 천왕봉의 한줄기가 동쪽으로 이어지다가 웅석봉에서 남으로 방향을 튼 능선의 끝자락에 니구산(尼丘山·182.9m)이 있다. 니구산 아래 사천(泗川)을 경계로 7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마을이 있으니 바로 단성면 남사예담촌으로, 2003년 농촌테마마을에 선정되었다. 산골마을이 배출한 인물들남사예담촌은 비록 지리산 산골마을이었지만, 고려 말부터 역사적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려 말 진양하씨 하즙(河楫, 1303~1380)은 니구산 아래 남사예담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계족산의 정기와 송촌동 사람들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대전 계족산 기슭에 자리 잡은 회덕 답사 가는 날에 봄비가 내렸다. 만물이 소생하는 데는 봄비가 최고이다. 답사일에 비가 내리면 운치는 있지만, 사진을 찍는데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는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 공원으로 조성된 송촌동 유적지조선시대의 공주목과 회덕현 그리고 진잠현이 지금의 대전시 영역이었다. 진잠현은 지금의 진잠동 일대였고, 회덕현은 대덕구와 동구 일대였다. 지금 진잠동을 제외한 유성구와 서구 그리고 중구는 공주목 관할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대전역이
김규순의 풍수이야기 _ 구미 구미, 선산과 금오산 정기의 발현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구미시는 크게 네 개의 산을 중심으로 지역을 분류할 수 있다. 비봉산을 중심으로 한 선산읍 일대, 냉산을 중심으로 한 해평 일대, 천생산을 주산으로 한 인동일대, 금오산을 중심으로 한 구미시 중심가 일대를 말한다. 구미시는 조선시대에는 선산도호부였다. 이중환의 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이곳 산맥들 끊고 뜸질을
금산, 전쟁터가 된 인삼재배지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금산의 특산물은 인삼이다. 삼(蔘)의 자생지는 한반도와 만주일대이다. 전한시대에 이미 우리의 인삼이 수출되었다. 삼(蔘)의 우리말은 ‘심’이다. 삼(蔘, 浸)이라고 쓰고 심이라고 읽었다. 산삼 캐는 사람을 심마니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인삼은 원나라, 명나라 그리고 청나라와의 조공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다. 고려 1009년에 벽란도를 통한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수출품에 인삼이 있었다. 야생삼만으로 수출물량이 부족했으므로 이때 이미 산양삼이 재배되었다고 본다. 서
포항, 동해 용왕의 기운으로 분기탱천한 가문들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포항은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 북쪽에 위치하며 토함산의 물이 형산강을 통해 포항 앞바다로 흘러간다. 산의 정기는 물을 통해 전달되므로 경주 토함산과 남산의 정기가 포항에도 미쳤음은 당연하다. 고려시대에는 경주에 속한 고장이었다. 연일(延日)은 포항 영일(迎日)의 옛 지명이다. 호산지당을 만든 뜻서울에서 출발하여 포항 덕동문화마을을 찾아갔다. 마을은 산골짜기에 있었다. 근대화 물결에 전통마을의 면모는 흩어졌지만, 현재 5개의 고택과 용계정이 마을의 역사적
장흥, 풍수의 고장에서 피어나는 문향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장흥은 삼면이 바다로 싸여 있으며 내륙은 탐진강이 관통하고 있다. 광양 백계산 옥룡사, 여수 금오산 향일암, 장흥 가지산 보림사 등은 도선국사, 원효대사, 보조체징 등 통일신라의 고승들이 사찰을 창건하여 주석했던 것으로 보아 탐진강 동쪽 지역은 백제 지역이었지만 통일신라의 영향력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장흥은 교통 요지로 이곳을 거쳐야 완도와 해남 그리고 진도와 목포로 연결된다. 동쪽 지역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물산이 풍부하며 특히 관산읍, 회진면
보령의 오서산과 토정 이지함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이지함의 선대보령은 오서산 영역과 성주산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 토정 이지함은 오서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미 16세 때 천문과 지리에 통달하여 신통한 재주를 가졌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토정은 모친을 모실 자리를 구하고자 오서산과 연결된 능선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가 모친이 유산상속으로 받은 서해를 바라보는 고만산 기슭에 선친과 합장할 산소 자리를 정한다.그러나 형 지번이 그 자리를 보고는 장자나 차남의 후손들에게는 좋은 곳이지만 삼남인 지함의 후손들에게 재앙이
유가지형의 악양과 선사지형의 화개 하동은 지리산 남쪽 외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예로부터 많은 위인의 사랑을 받았던 고장이다. 지리산에는 최치원, 섬진강 평사리에는 박경리, 노량 앞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하동의 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특히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하동의 악양과 화개를 이름난 마을로 거론하고 있다.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선비의 땅, 악양 긴 장마로 취재답사 일자를 늦추었는데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원고 마감일이 다가오므로 하는 수 없이 장마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강행군을 했다. 대전을 지나가는데 폭우가 쏟
신령스런 빛이 비치는 땅, 영광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명당의 근원은 하늘에 있다. 풍수지형을 충족하면서 하늘에서 광채가 내려오는 곳이 최상급 명당이다. 영광은 신령스런 빛이 가득하다는 뜻이니 사람 살기 좋은 고을이란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영광은 내장산에서 불갑산까지 이어지는 산맥을 배경으로 서해를 접한 지역이다. 옛날 간척사업을 하기 전에는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와 농사짓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나 지금은 드넓은 옥토가 펼쳐져 있어 풍족한 들녘을 자랑한다. 마라난타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인도 간다라의 승려 마라난타는
양구, 우리 시대의 산수명당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현대판 명당양구, 휘늘어진 버드나무가 많은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의 마을이란 의미이다. 성현(成俔)은 양구 사명산 기슭에 버드나무가 많다고 노래했고, 고려시대 김극기는 이곳을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고 노래했다. 양구는 산수명당이다. 산수(山水)란 자연을 의미하는 조선시대의 표현이다. 산수명당은 여행객이 수려한 경치나 절경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즐길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서울 잠실에서 양구까지 거리는 133km이고 자동차로 2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