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순의 풍수이야기
속리산 복천암과 보은 우당고택
글 사진 · 김규순(지리학 박사)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불교 문화재와 유교 문화재가 있다. 두 공간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은데, 우선 불교 공간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조성된 유서 깊은 곳이고, 유교 공간은 주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장소이다. 또한, 불교 공간은 종교적 공간으로 붓다를 모시고 있고, 유교 공간은 도학적 공간으로 공자나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불교 공간은 조망이 좋고, 수행하기에 적절하지만 풍수적으로 불리한 곳에 자리하고, 유교 공간은 마을 영역 안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풍요하며 사람과 부대끼며 그 속에서 도학을 추구하고자 했다.
한글 창제 숨은 이야기 품은 복천암
한글날을 3일 앞두고 복천암을 찾았다. 복천암은 세종의 한글 창제에 동기를 부여했다든가 또는 세종의 지원을 받아 한글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신미대사가 주석했던 곳이고, 그의 부도가 자리한 곳으로 그의 맥이 아직 살아있는 절이다.
신미대사는 조선 초 무학대사, 신미대사, 학조대사로 이어지는 불교의 맥을 이어간 선지식이었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다면 신미대사는 세종에겐 보살이었고, 학조대사는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왕실과 불교의 유대관계가 돈독했음을 보여준다.
종무소 보살에게 미리 전화는 했지만 월성 큰스님을 만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는데, 다행히 만나주셨다. 복천암의 보살들은, 큰 스님께서 외부인들을 잘 만나주지 않는데 우리 일행을 만난 것은 부처님이 도우신 거라고 했다.
신미대사는 영산 김씨 김훈의 장남으로 영산 부원군 김수온의 형이었다. 그는 1438년에 범어를 이용하여 <원각선종석보> 다섯 권에 발음을 작성하였다. 이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1446년보다 8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월성스님은 “세종이 김수온의 소개로 신미대사의 <원각선종석보>를 보시고 한글 창제에 뜻을 가졌다”라고 말했다.
그 후 세종은 신미대사와 의기투합하여 경복궁에 내불당을 짓고 신미대사를 기거하게 한 뒤 한글 창제에 전념하게 했다.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 세종의 자식들이 신미대사와 함께 주도적으로 한글을 만들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지원하는 정도에 그친 것이라고 한다.
신미대사의 공로와 세종의 승인
그리하여 세종께서 그 보답으로 복천암을 중창하는 데 지원하였고, 아미타삼존불상을 하사하였으며 안평대군은 이를 확인하러 복천암으로 내려갔다. 세조는 추운 2월에 신미대사를 찾아 복천암을 방문하여 3일을 묵으면서 복천의 물로 목욕하여 피부병이 낫기도 했다. 그리고 쌀 3백석, 노비30구, 밭 200결을 하사하였다. 성종은 신미대사와 학조대사를 위해 말을 하사했고 소금 93석 5두를 지원했다. 왕실의 특별한 지원을 볼 때 신미대사의 혁혁한 공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미대사는 스님으로서 중생들이 무지에서 벗어나도록 한글을 만드는데 진력을 다하셨으니 큰 보시를 하신 것이다. 한글을 신미대사께서 만들었다고 해도 단정적으로 말하기에 조금 부족한 면이 있다. 그 당시 왕의 한글 창제 반포가 있었으니 온 백성이 편히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의 승인이 없었더라면 창고 속에서 썩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종께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상계에서는 정치적인 판단과 결정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1924년에 세워진 민족의식 고취의 뿌리
우당고택은 선정훈(1888~1963)씨가 1903년에 나라가 망하자 보은의 민족회운대길지(民族回運大吉地)에 터를 잡고 1924년에 완공한 고택이다. 그가 찾은 길지는 하천 가운데에 있는 섬이었다. 이런 지형을 도중도(島中島)라고 한다. 윤봉길 의사 생가도 예산의 도중도에 있다. 도중도는 연화부수형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절치부심하는 곳이다. 도중동에서 태어났거나 생활하는 사람은 정확한 판단과 확실한 예지력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실행력을 지닌 내공의 소유자일 경우가 많다.
선정훈은 보성 선(宣)씨로, 전남 고흥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는 고종 때 비서실장을 지낸 선영홍(1862~1924)이다. 선정훈은 부친과 함께 무역회사 대동상사를 설립하여 중국과 교역하면서 큰 부를 축적하였다. 부친 선영홍씨는 고흥사람들에게 밭을 나누어 주었고, 그들의 세금을 대신 내주었으며 굶어 죽는 소작인이 없도록 보살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선정훈은 우당고택을 지은 후, 1926년에 민족 재건을 위해 관선정 서숙을 지어 학자 양성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숙식과 교육의 모든 운영비용을 지원하며 무료교육을 실시하는 등 민족의 운을 되돌리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200여 명의 학자를 배출하는데 자기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는 식민교육에 대항하여 전통유학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폭탄을 던져 일본 수괴를 처단한 것은 그의 판단과 예리한 실행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듯이 선정훈도 윤봉길 의사와 다름없는 삶이었다. 이후 일제는 뒤늦게 선정훈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는 1944년에 관선정을 파괴시켰다.
관선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에는 봉화의 선비였던 홍치유가 있다. 선정훈은 그를 초빙하여 교수 겸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홍치유 원장은 퇴계 선생의 학맥을 이었으면서도 율곡 선생의 학설도 인정하는 등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선정훈과 홍치유는 일제의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킨 보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