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 박기성 편집위원 철원에는 미세먼지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고구려는 철원(鐵圓), 신라는 철성(鐵城), 고려는 동주(東州), 조선은 철원(鐵原)으로 불렀던 데로 남북전쟁 이후에는 철의 삼각지대로 일컬어지는, 범상치 않은 고을이다. 여기는 언제 찾아도 이방의 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주영의 소설 처럼.“주인공 ‘나’와 방송국 직원인 박삼재는 우연히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고석정으로 향하는 여행길에 오른다. ‘나’는 7년 전 가보았던 철원을 오롯이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여행길은 순탄하지 않다. 고
글•사진 박기성 편집위원 상주,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은 고을이었다. 산 높고 물 맑은 고장에다 삼한시대부터의 역사가 은은하게 배어있으며 에서, “들이 넓은 데다 낙동강을 끼고 있어 농업 이익과 상업 이익을 다 취할 수 있는 땅”으로 호(號)가 난 고장이어서였다. 날짜는 9월 12일로 잡았다. 이른 아침 정릉에서 김장욱 이사를, 왕십리역에서 이가경씨를 태우고 네비게이션을 따라 달리다 보니 몇 시간만에 공검지(恭儉池)에 이르렀다. 기원 전후 제천 의림지(義林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김제 벽골제(碧骨堤) 등과 함께 판축법
글•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이달 인문산행 대상지는 예향 강릉이었다. 10~11일로 날을 받았는데 하필이면 태풍 카눈이 그때 강릉을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래 일정을 늦추고 늦춰 14일 아침 7시에 왕십리역에서 이가경씨와 함께 강릉을 향해 떠났다. 태풍 뒤의 상쾌한 기운에 힘입어 한달음에, 세시간만에 대관령휴게소까지 갔다.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고 관광안내소에서 강릉 소개 자료를 챙긴 다음 시내로 들어갔다. “어디부터 갈 거예요?” “동예의 흔적이라는 예국고성(濊國古城). 근데 얼마나 찾을 수
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이번 주에는 게릴라성 폭우 정도가 아니라 진짜 물폭탄이 떨어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보를 듣고 떠난 부여 취재였다. 장마전선이 중부지방을 계속 오르내리는 마당에 티벳 고기압이 끼어들어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만 미터짜리 비구름을 만들 것이라니 운수 사나우면 물 속을 허우적거리다 와야할 것 같았다. 그리고 가는 날 7월 4일부터 장대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여에 도착하자 비는 그쳤다. 하지만 언제 다시 말떼 땅 두드리듯 할지 몰라 우선 부소산성부터
글•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백제와 신라의 전투가 한창일 때 좌평(佐平) 흥수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古馬彌知)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 묻기를 “일이 급박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흥수가 말하기를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나라의 요로(要路)입니다. 한 사람, 한 자루의 창만 있어도 만인이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용사를 뽑고 가서 지키게 하여 당병(唐兵)으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신라 사람은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면서 성문을 겹겹이 닫고 굳게 지켜 저들의 군
글•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대전은 분지다. 동으로는 계족-식장산맥이 병풍을 두르고 서쪽에는 금북정맥의 명봉 계룡산(845.1m)이 우산봉(573.8m), 갑하산(469m), 관암산(526m), 빈계산(415m) 등과 산군(山群)을 형성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멀리 대둔산(878.9m), 장태산, 만인산(537.8m)이 첩첩이 에워싼 가운데 갑천, 유등천, 대전천이 발원, 분지의 벌판을 적시며 흐르는 살기 좋은 땅이다. 그래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청동기시대에는 남한에서 가장 번성한 군장(君
글•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백제 2대 다루왕 36년(63년) 겨울 “왕이 국토를 넓혀서 낭자곡성(孃子谷城)에 이르게 하고 사자를 신라에 보내 모임을 청하였으나 응종(應從)하지 않았다. 37년에 왕이 군사를 파견, 와산성(蛙山城)을 쳤는데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다. 이에 신라가 기병 2,000을 일으키므로 맞아 싸우다 쫓겨왔다. 39년에 와산성을 쳐서 빼앗고 200명을 머물러 지키게 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패하여 신라의 것이 되었다. 43년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범
글•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충주(忠州)는 중원(中原), 나라 가운뎃벌이다. 그래서 삼국시대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을 벌였으며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돌아가며 차지했다. 각각 독산성(禿山城), 국원성(國原城), 석토성(石吐城)으로 불렸는바 이렇게 이름을 셋이나 가진 고을은 두 번 다시 없다. 첫번째 주인 백제는 그 위치만으로도 소유권을 입증한다. 성이 한강 서쪽 강가 해발 337m의 장미산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고구려 같았으면 ‘내륙 명주(溟州)’ 방면의 동쪽에 쌓았을 것이고 신라라면 달천과 남
글 사진 박기성 편집위원 원주는 군도(軍都), 대표적 군사도시다. 몇 년 전의 야전군사령부 체제하에서는 여기서, 동부전선을 담당하는 제1야전군사령부가 6개 군단을 지휘했다. 삼남지방을 커버하는 대구의 제2야전군사령부나 서부전선을 맡았던 용인의 제3야전군사령부와 위상이 같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2019년에 제1과 제3야전군사령부를 통합, 지상작전사령부가 탄생하면서 약간 의기소침해진 듯하지만 예하 부대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동은 치악산(1,282m), 서는 금물산(791m)에서 자산(245m)으로 이어지는 경기·강원도계,
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새해에는 인문산행 대상지를 고을 단위로 잡아 두루두루 살펴보기로 했다. 이 땅에는 역사가 오랜 고을, 크고 작은 도회지에 문화 유적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첫 대상지를 수원으로 꼽았다.수원 하면 일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이었다. 그래 류백현 팀장과 박성남, 이가경씨에게 1월 4일 수원화성박물관 로비에 모여 조성우 학예사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하자고 했다. 거기서는 지금 ‘독서대왕 정조의 글과 글씨’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정조대왕은 이
글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류백헌(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13년 전 의 ‘두타산 대연구’를 위해 두타산을 찾았다. 여기저기 골짝골짝 많이도 다녔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은 정상길 중간에 만난 산성뿐이다. 한 시간 반쯤 올라간 산 중허리에서 불쑥 나타난 돌담불은 그러나 그게 테마가 아니었기에 힐끗 보고는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성의 범위가, 그 놓은 데 쌓여 있는 까닭이 못내 궁금했으나 어디에도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는 없었다. 그래 “목 마른 자가 우물 판다”는 속담을 따라 직접 가보기로 했다. 2022년
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임진왜란의 열전이 식어 소강상태가 계속되던 1596년 3월 3일 병조판서 이덕형이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신(臣)이 1일 중흥동(中興洞)으로 나아가 서북쪽의 외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삼각봉이 높이 솟아있고 그 곁에 봉우리 둘(염초봉 과 원효봉)이 차례로 서 있었는데 성자(城子)는 끝 봉우리(원효봉) 허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시내 어귀의 언덕에 이르러 끝났습니다. 남쪽 외성은 시내의 암벽에서 시작하여 위로, 서남쪽 최고봉(의상 봉)에 이르러 끝났습니다.성에 석문(石門
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이성산성 글을 본 여자 두 명과 남한산성을 종종 가는 여성이 남한산성 답사에 참석하겠다네. 그런데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한 시에는 하산해야 한다는구만. 열 시에 산성역이 아니라 남문에서 만나는 건 어떤지? 이 사람들 차를 남문 주차장에 두고 움직일 예정이라고 하니까.”시월 초하루 류백현 인문산행 운영팀장한테서 이런 기별이 왔다. 그래 그렇게 하자고 한후에 5일 뒤 남한산성 안 카페에서 만났다. 숫자가 한 명 늘어 네 명이었다.차를 마시며 수인사를 나누고 제
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우리나라는 산수의 큰 형세가 모두 서쪽으로 달리는데 유독 가릉(嘉陵) 한 군의 물만이 동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신라와 고려 이래로 이 군을 조종(朝宗)이라 불렀다. 조종천은 그 중 큰물이므로 우리 고황제(高皇帝)의 대통단(大統壇)을 거기 세웠다. 단의 북쪽에 화악산에서 흘러오는 물이 있는바 동남으로 향하는 수십 리를 옥계(玉溪)라고 한다. 골짜기의 경치가 기이하고 웅장하여 볼 만한 것이 많다. 하늘이 황제로 하여금 제사 지내는 산을 만들었다면 그 뒤 창고에 보배
고려시대 성리학이 들어온 이후 이 땅에는 수많은 구곡(九曲)이 생겨났다. 원조인 죽계구곡을 비롯해 율곡의 고산구곡, 퇴계의 도산십이곡, 우암의 화양구곡 등 이름난 학자들은 모두 구곡을 하나씩 경영했다.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의 이기론과 도덕론, 수양론 등을 궁구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그의 노하우,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을 본받았던 것이다.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하지만 조선 후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이르면 선비들은 한가로이 음풍농월(吟風弄月)만 할 수 없었다. 결과 논리는 더욱
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조선시대 이땅에는 9대로가 있었다. 제1은 의주에 이르는 서북로였고 두번째는 경흥·서수라 가는 동북로였으며 제3은 평해 방면의 동로, 네번째는 부산 가는 동남로, 이어 제주 가는 길이 있었다(). 이 외에 태백산이 종점인 동남로와 강화 방면의 서로, 통영이나 충청수영행 루트가 있었는데 맨 뒤 둘은 제주로의 지선이었다.이 중 가장 긴 것은 2123리의 동북로였지만 1086리의 서북로, 950리의 동남로, 육로 950리에 수로 970리의 제주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선비 허목은 1658년 여름 한양 가는 길에 를 지었다. 효종 임금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고 상경하다 고양에 이르러 병을 이유로 사직한 뒤 고봉(高峯) 죽원(竹院), 서산(西山) 독재동(篤才洞), 중흥동(重興洞) 민지암(閔漬巖) 등을 탐방하다 가섭후령(迦葉後嶺)을 넘어 한양성 서쪽의 의원(醫員)을 찾아간다. 모두 ‘옛날 1번국도’ 의주로(義州路) 일대에 있는 것들이다.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송시열과 쌍벽을 이루던 허목의 행로명나라나 청나라 사신
오대산 동대암 옛터를 찾다 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언제나 미적미적, 채근을 받고 움직이던 인문산행 날짜 잡기 이번에는 선수를 치고 나갔다. 8월 24일이었는바… 썩 잘 빠진 스타일은 아니었다.“우물쭈물 하다 9월 첫 주 토요일을 유라시아 문화연대 이사회에 뺏겨버렸습니다. 대전에서 열리는데 그 담날 역사기행까지 하기로 했으니 우야믄 좋노? 이번에는 오대산 동대암 원래 자리 찾으러 갈까 했건만….”류백현 이사는 “주중은 목금 가능하고 주말은 두 번째 주 토일 가능”이라고 포스팅을 올렸다.
나당전쟁을 끝장낸 매초성 싸움터는양주 고을들에서 벌어졌다 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이번 인문산행은 무주구천동으로 가기로 했다. 죽계구곡에 이은 ‘구곡 버전’으로 원래 무계구곡(武溪九曲)이던 것을 ‘9천 명의 생불(生佛)이 나올 정도로 그윽한 골짜기’ 9천둔(屯) 같다 싶었는지 구천동(九千洞)으로 바꾼 데다. 70릿길 긴 거리라 하룻밤 자야할 것 같아 그렇게 하자고 올렸더니 이가경씨가 펄쩍 뛴다. “박이라고요? 당일 아니고?” 이어 닷새 뒤 “1박 2일이면 숙소와 비용은 어떻게 되나요?”
육백년 피비린내 오늘도 씻어내리는 구곡의 원조글 · 박기성 편집위원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인문산행 운영팀장) “7월 인문산행지 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6월 24일 류백현 이사가 단톡방에다 공개 요청서를 띄웠다. 아직 9일이나 남았는데 뭐가 그리 급한지….“순흥 죽계구곡이 어떨까 합니다.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딴 구곡류 최초의 것으로 고려시대 안축이 경영한 것입니다. 여기를 거치지 않고는 어떤 구곡도 찾아갈 자격이 없는 듯해서요.”일주일 뒤 질문이 다시 올라왔다. “모레 인문산행을 어디서 어떻게 출발할지와 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