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영과 걷는 영호남의 산 _ 경남 합천 악견산~의룡산

 

합천군 대병면 악견산(634m)은 면내의 허굴산(682m) 금성산(592.1m)과 함께 ‘대병 3산’으로 꼽히는 작은 악산, 그러나 ‘큰 바위산’이란 의미를담고 있다.

걸음이 빠른 이들은 의룡산(481m)까지 넣어 ‘대병 4악’ 종주를 하기도 하는데, 기암괴석은 물론 합천호와 황강 조망이 끝내주는 코스다. 산 내엔 경상남도기념물로 지정된 악견산성이 있다.

글 사진 · 황소영 기자

 

허굴산, 금성산과 함께 대병 3산으로 꼽히는 악견산
허굴산, 금성산과 함께 대병 3산으로 꼽히는 악견산

 


악견산 산행 코스는 원오선원(용문사)에서 의룡산으로 먼저 오르는 1코스, 원오선원에서 악견산으로 바로 가는 2코스, 악견산주차장에서 올라가는 3코스, 합천댐에서 출발하는 4코스로 나뉜다. 취재진은 3코스인 주차장을 출발해 악견산에 올랐다가 의룡산을 거쳐 원오선원으로 하산했다. 다만 차량 회수를 하려면 인도가 없는 도로를 따라 2.4km쯤 걸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차량 회수를 쉽게 하려면 원오선원 원점회귀가 제일 좋은데 이 경우 삼거리에서 악견산 정상을 왔다 갔다 0.72km를 왕복해야 한다.     

 

가파른 구간이 많아 비온 직후엔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가파른 구간이 많아 비온 직후엔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바위를 짚고 올라갈 땐 미리 스트레칭을 해두지 않은 게 후회될 정도였다.
바위를 짚고 올라갈 땐 미리 스트레칭을 해두지 않은 게 후회될 정도였다.

 

악견산, 3코스에서 1코스로

계곡 산행지 몇 곳을 물색해보지만 비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물이 많기로 소문난 지리산도 물이 귀할 정도였다. 5월 31일 기준 세석대피소 식수대는 사용이 불가했고, 탐방객들은 매점에서 생수를 사야 했다. 6월 중순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흐렸지만 정작 비는 거의 오지 않았다.

차는 동쪽을 향해 달렸다. 지난 늦가을 거창 월여산(863m) 때도 이 길을 지났던 것 같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길은 산의 반대쪽이어서 어쩌다 합천호를 한 바퀴 돌았었다. 악견산은 그 합천호가 잘 보이는 산이다.

취재진은 3코스로 올라 1코스로 내려서기로 한다. 산행안내도 옆엔 악견산성(경상남도기념물 제218호) 안내판도 있다. 세종 21년(1439)에 만들어진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에 의해 본격적으로 축조 및 관리되었는데 지금까지도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란다.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은 2.7m. 비변사의 요청에 따라 성안에 창고를 설치하고 주변 백성들의 피난처로 사용됐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엔 문헌상에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니 그 후론 제 역할을 다하고 산과 하나가 되었던 모양이다.

악견산성엔 재밌는 전설도 있다. 왜군과의 대치가 길어지자 곽재우는 인근 금성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악견산까지 줄을 맨 뒤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달았단다. 달빛에 비친 그 모습이 마치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였고, 지레 겁을 먹은 왜군은 전멸될 것을 두려워해 도망쳤다는 것이다. 실제 정상엔 ‘구멍바위’가 있는데 아쉽게도 찾진 못했다. 그 밖에도 권양 권해 형제와 박사겸 박엽 등 합천의 선비들이 의병을 모아 왜적과 맞섰던 산이다. 합천댐에서 출발하는 4코스로 오르면 악견산성을 만날 수 있다.

주차된 차는 취재진 차량뿐이다. 연휴가 막 지난 뒤였고 하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장이라도 비를 뿌릴 기세로 협박 중이었다. 배낭 안에 판초를 넣어오긴 했는데 바윗길과 가파른 흙길이 많아 위험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악견산까진 약 1.45km. 흐린 하늘은 다행히 기온을 몇 도씩 뚝 떨어뜨려 주었다.     

 

악견산 정상 직전의 전망대
악견산 정상 직전의 전망대

 

합천호 조망이 끝내줘요

무던한 흙길을 20분쯤 오르자 바위에 그려진 새하얀 화살표 두 개가 보인다. 이 바위를 지나면 서서히 조망이 트인다. 하늘은 선선한 바람을 주었지만 파란 하늘을 거두어 갔다. 흐린 날도 이렇게 예쁜데 맑은 하늘 아래선 또 얼마나 예쁘려고…. 나중엔 일련의 행동들이 지겨워질 만큼 우리는 걷고 멈추기를 반복하며 사진을 찍는다.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다녀온 산도 곧잘 잊히기 때문인데, 기록은 기억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좋은 습관이다. 다만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가끔은 일행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수시로 찍어대는 사진이 민폐가 될 수도 있으니깐.

계단과 난간 등 정비가 잘 된 길을 올라서면 우측으로 금성산이 보인다. 악견산 동쪽은 의룡산이고 서남쪽은 저 금성산에서 허굴산까지 이어진다. ‘대병 3산’에 의룡산을 넣어 ‘대병 4악’으로 부르는데 이번엔 딱 절반만 걷기로 한다. 금성산과 합천댐이 가깝게 보이면서 악견산 특유의 기암괴석도 서서히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자락에 갇힌 물을 배경으로 서면 꼭 섬에 와있는 것처럼 보였다. 합천에서 바다는 멀었지만 산자락에 걸린 구름은 파도처럼 합천호 위를 떠돌고 있었다. 황매산(1,113m) 꼭대기에 걸린 구름은 끝내 떠나질 못하고 오전 내내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합천댐에서 올라오는 4코스와 만나는 삼거리에 닿는다. 취재진처럼 악견산주차장에서 바로 올라오는 게 0.5km 짧다. 여기서 정상은 150m. 짧은 솔숲과 이끼 낀 바위 사이를 지나면 정상이다. “와, 정상이다!”가 아니라 “어, 정상이야?” 이 분위기. 악견산, 그리고 가야 할 의룡산은 유난히 정상에 인색하다.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겠지만 사방이 꽉 막힌 곳에 정상석을 세웠다. 악견산의 멋은 오르고 내리는 길에 있다.

하늘이 맑았다면 몇 배는 더 예뻤을 합천 악견산.
하늘이 맑았다면 몇 배는 더 예뻤을 합천 악견산.
악견산 정상석은 사방이 막힌 곳에 세워졌다.
악견산 정상석은 사방이 막힌 곳에 세워졌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올라온 만큼 내려선다. 바위는 없고 울창한 숲과 가파른 흙길이다. 밧줄은 있지만 비 온 직후엔 제법 미끄러울 길이다. 소나무 사이로 가야 할 의룡산이 보였다. 악견산에서 의룡산까진 약 2.86km. 이렇게 보면 제법 먼데 막상 걸어보면 힘들지 않다. 오히려 고생은 원오선원으로 하산하는 길에 다했다.

악견산에서 360m를 내려서면 의룡산과 용문사 갈림길이다. 용문사가 원오선원으로 바뀌었지만 이정표는 여전히 용문사로 표기돼 있다. 만약 원오선원에서 출발한 원점회귀라면 왕복 0.72km를 걸어 악견산에 다녀온 다음 이 갈림길에서 용문사로 내려서야 한다. 원점회귀의 장점은 있지만 암릉 많고 조망 좋은 3코스에서 시작한 것보단 매력이 덜하다.

갈림길에서 5분 남짓 내려서면 길이 양쪽으로 나뉜다. 어디에도 별다른 이정표가 없다. 일단 직진이다. 왼쪽의 의룡산이 점점 멀어지고 마을이 가깝다. 느낌상은 그랬다. 갈림길로 돌아와 왼쪽으로 간다. 이 길이 맞다. 넓은 길, 산불이 난 길, 또 공사 중인 듯한 임도를 지나 본격적인 산길 오르막을 만난다.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돌아보면 마치 익살스런 동화 속 똥 그림처럼 생긴 악견산이 보였다. 아니, 알밤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것도 같다. 합천호는 알밤 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신 대병호와 합천댐 물이 섞여 이룬 강줄기가 새로운 풍경을 자아냈다. 유려하게 휘어진 황강은 아쉽게도 나무에 가려 일부만 보였다.
 

악견산에서 의룡산으로 가는 내리막길.
악견산에서 의룡산으로 가는 내리막길.
의룡산에 서면 독특한 모양의 악견산이 잘 보인다.
의룡산에 서면 독특한 모양의 악견산이 잘 보인다.

 

여기도 좋아요, 의룡산

황강이 잘 보인다는 건 의룡산에 다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룡산엔 정상석이 없다. 이름을 적은 나무판뿐이다. 이쯤 되면 ‘대병 2악’은 정상석에 욕심이 없거나 성의가 없는 셈이다. 조망은 여전히 좋았다. 길은 아슬아슬 벼랑으로 이어졌다. 저 아래로 청와대가 보였다. 관광객에게 공개된 세트장이다. 진짜 청와대가 개방됐으니 세트장을 찾는 이들은 줄어들겠지. 그저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하산을 서두른다. 운전자인 장이산 씨는 차량 회수를 위해 먼저 출발한다. 도로 중간쯤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결국 우리는 이산 씨가 원오선원 앞에 도착한 후에야 하산에 성공한다.

기나긴 계단을 내려설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용문사 1.1km 이정표를 봤을 땐 “하산이니깐 거의 다 왔네.” 방심을 했다. 화살표는 가운데를 가리켰지만 길은 없었다. 우리가 내려온 길을 제하면 왼쪽과 오른쪽뿐이다.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일단 왼쪽으로 간다. 이상하다.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등산로에 줄줄이 산행리본이 떨어져 있다. 한두 개가 아니다. 아직 태풍은 오기 전이었다. 이 길이 아니란 뜻인가? 맞다. 등산앱을 보니 하산과는 점점 멀어져 있었다.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간다.

앗, 다시 갈림길이다. 이정표는 어디에도 없었다. 리본은 직진 방향에 훨씬 더 많다. 일단 리본을 믿고 가본다. 좋았던 길은 절벽 아래서 끝나 있었다. 조망터인 모양인데 조망이라면 볼 만큼 봤다. 날카로운 나무에 긁혀서 10cm가 찢어지는 사고만 당했다. 상처에선 피가 났지만 아프진 않았다. 갈림길로 돌아가 왼쪽으로 내려간다. 이 길이다. 올라올 땐 문제 되지 않지만 하산할 땐 자잘한 갈림길들이 방해가 된다.

 

원오산원 하산 직전의 산수국.
원오산원 하산 직전의 산수국.

 

납량특집도 아닌데 꼭 귀신에 홀린 것처럼 우리는 악견산을 내려와 세 번이나 갈림길에서 길을 놓쳤다. 길을 잃은 게 단점만은 아니다. 그렇게 겨우겨우 원오선원으로 하산해 숨을 돌리고, 막 도로를 따라 걸어가려는데 일행을 대표해 헐레벌떡 주차장으로 뛰어갔던 이산 씨가 차를 되찾아 돌아왔다. 산에서 헤맨 덕에 위험한 도로를 걷지 않게 됐다. 우리는 도로가 싫어 일부러 결단코! 길을 잃은 게 아니라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합천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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