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암 채제공의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

 

글 · 이치억(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사진 · 사람과 산 DB

 

관악산 남북주릉. 정상인 연주봉이 아스라하다.
관악산 남북주릉. 정상인 연주봉이 아스라하다.

 

갓의 모양을 닮은 화산

관악산(冠岳山)은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松岳山),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포천의 운악산(雲岳山), 가평의 화악산(華岳山)과 더불어 경기 오악(五岳)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높이 632.2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빼어난 모양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다. 지금은 서울에 속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도성인 한양을 나와 한강을 건넌 남쪽에 우뚝하게 솟아있는 산이었다. 그 뒤쪽으로는 청계산, 백운산, 광교산으로 연결되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이 이어진다. 능선마다 바위가 많고 특히 정상부가 바위로 되어 있는데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닮아있다 하여 관악산(冠岳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갓을 쓴 자신들의 모습과 닮아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조선이 건국될 때, 도성의 풍수를 살피던 사람들은 관악산이 강한 불기운을 가진 산으로 인식했다. 이에 관악산을 화산(火山)이라고도 하여, 궁의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불기운이 너무 강해 그 해를 입을 수 있을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한 이유로 무학대사(無學大師)는 불기운을 누그러뜨리는 사찰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앞에 연못을 만들어 불기운을 막았다고도 한다.

선비의 모습을 닮은 관악산. 더욱이 도성과 매우 가까이 있었기에 많은 선비들이 올라 유산기를 남겼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의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를 들 수 있겠다. 그는 1786년 봄, 친족·지인 몇 명과 함께 관악산에 올라 유람하고 유산기를 남겼다. 특히 이 글에서 그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그의 아우이자 당대의 군주인 세종을 그리워하며 노닐던 연주대(戀主臺)와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서울대 너머 관악산 정상 연주대가 보인다.
서울대 너머 관악산 정상 연주대가 보인다.

 

후기 조선의 중흥을 꿈꾸었던 선비

채제공의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이다. 지중추부사를 지낸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홍주에서 태어났다. 1735년(영조 11), 15세의 나이로 향시에 합격했고, 1743년에는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영조시대의 핵심 인물로 도승지, 대사헌, 예문관·홍문관 제학, 경기감사·개성유수 등의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승하한 후 왕위 계승작업에 크게 활약했다.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사로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공노비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정조의 핵심 정책을 수행했다.

정조 때에도 규장각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 등을 역임했으나,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 때 노론의 공격을 받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1788년 정조의 명으로 우의정으로 복직되었고, 이후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했다. 이후 주로 수원 화성 축조를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했다. 정조시대 드물게 큰 활약을 했던 남인으로서,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미수 허목(眉 許穆, 1595~1682),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계통의 학맥을 잇는 것으로 자부했다.

 

번암 채제공의 관악산 유람

번암 체제공의 관악산 유람은 그가 존경하던 미수 허목이 일찍이 83세 때 관악산 주봉 연주대를 올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뒤를 따라 오르고자 했다는 계기에서 시작됐다. 허목은 조선 중기 학자 겸 문신으로, 퇴계와 한강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호에게 연결함으로써 기호 남인이자 근기 실학파의 선구가 되었던 인물이다. 전서(篆書) 필체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어 지금도 주요 문화유적 곳곳에서 그의 필체가 담긴 현판과 비문을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미수는 그의 호에서 볼 수 있듯, 신선과 같은 풍모를 지닌 인물이다. 그토록 존경하던 미수가 83세의 고령에 험준한 관악산을 날아오르듯 올랐다는 이야기를 접한 번암이 이 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나는 이전에 미수 허 선생이 83세의 나이에 관악산 연주대(戀主臺)에 오를 때,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 관악산은 경기 내에 있는 신령한 산이다. 선현들이 예전부터 즐겨 노닐던 곳이었으니, 꼭 한번은 그 정상에 올라 마음과 눈을 상쾌하게 하여 산을 우러르는 마음을 기르고자 했다. 그러나 계속 생각만 했을 뿐 일에 얽매여 갈 수가 없었다.     

 

한양에서 지근의 거리에 있었던 산이었으나 시무에 쫓기어 오르지 못했던 동경의 산. 누구든 이처럼 묘하게 인연이 닿지 않는 산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산이었지만 번암은 마침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고 있던 시기에 오를 기회를 얻었다. 그의 나이 67세 때의 일이었다.     

 

병오년(1786년) 봄에 나는 노량진 강가에 우거하고 있었다. 관악산의 푸른빛이 거의 눈에 들어와, 그 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해졌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남쪽 이웃에 사는 이숙현과 약속을 하고 4월 13일 드디어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자제들과 종도 4~5명 함께 길을 나섰다. 10리쯤 가서 자하동으로 들어가니 한 칸 정도 되는 정자가 보이기에 거기서 쉬기로 했다. 그 정자는 신씨 성을 가진 자의 별장이다. 산골짜기에서 계곡물이 흘러나오는데 숲이 그것을 뒤덮고 있어서 물의 근원을 알 수가 없었다. 물길은 정자 아래로 흘러 내려와 바위를 만나는데, 바위에 튀어 흩날리는 것은 포말이 되고 고이는 물은 푸른빛을 이루었다. 물이 고인 후 다시 흘러넘쳐 골짜기 입구를 한 번 휘감아 돌아 멀리까지 흘러가는데, 마치 그 광경이 옷감을 펴놓은 것 같았다. 언덕 위에는 철쭉이 막 피어 있어 바람이 지나갈 때는 은은한 향기가 물을 건너 다가왔다. 산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시원하고 그윽한 흥취를 느낄 수 있었다.

 

산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던 그 흥취란, 이미 서울의 강역 내에 들어와 버린 오늘날의 관악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취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이러한 유산기를 남겨 준 선현의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당시로서는 노령이었던(67세) 번암은 산에 들어서자 일찍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정자를 거쳐 다시 10리쯤 나아갔다. 길이 험해 말을 탈 수 없게 되어 말과 마부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 넝쿨을 잡고 골짜기를 건넜다. 앞에 인도하던 자가 절의 향방을 잃어버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해가 떨어질 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주위에는 나무꾼도 하나 없어 길을 물어볼 수 없었다. 모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숙현이 마치 날아가는 듯한 걸음걸이로 절벽을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함께 그 광경을 보긴 했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한편으로는 괴상하게 생각되고 한편으로는 괘씸한 마음도 들었다. 한참 후, 하얀 승복을 입은 사람 4~5명이 빠르게 산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일행들이 갑자기 “스님들이 오신다.”라며 기쁜 듯한 소리를 질렀다. 숙현이 멀리서 절을 보고 재빨리 승려들에게 가서 우리 일행이 이곳에 있다고 알렸던 듯하다. 승려들의 인도로 이윽고 약 4~5리 떨어져 있는 불성사(佛性寺)라는 절에 당도했다. 절은 삼면이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었고, 한쪽 면만 막히지 않고 트여 있었다. 문을 열면 앉아서나 누워서도 천 리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관악산 최고의 장관인 연주대 전경. 깎아지른 절벽 위에 연주암 응진전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얹혀있다.
관악산 최고의 장관인 연주대 전경. 깎아지른 절벽 위에 연주암 응진전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얹혀있다.

 

양녕대군의 자취가 서린 연주대

다음날 아침 해 뜨기 전에 밥을 재빨리 먹었다. 연주대(戀主臺)를 찾아가려고 건장한 승려 약간 명을 선별하여 도움을 받았다. 승려들이 나에게 말했다. “연주대는 여기서 10리쯤 떨어져 있는데, 길이 아주 험난해서 나무꾼이나 중들이라 해도 쉽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나리의 기력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이에 내가 큰소리쳤다. “천하에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오. 마음은 장수이고 기운은 졸병이니, 마음이 가는 곳에 어찌 졸병이 가지 않겠소?”

이윽고 절 뒤편의 가파른 벼랑길을 넘어가는데, 끊어진 길과 깎아지른 벼랑을 만나기도 했다. 그 아래가 천 길이라 몸을 절벽에 바짝 붙이고 손으로 묶은 나무뿌리를 번갈아 잡으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현기증이 나서 곁눈질도 못 할 정도였다. 간혹 큰 바위가 길 한가운데를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곳에 이르면 감히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그나마 덜 뾰족한 틈을 자리를 잡고 두 손으로 주변을 부여잡고서 겨우 미끄러져 내려갔는데, 바지가 걸려 찢어져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이와 같은 곳을 여러 번 지난 뒤에야 비로소 연주대 아래에 이르렀다. 

겨우 기력을 다해 엉금엉금 기어서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수십 명이 앉을 만한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차일암(遮日巖, 해를 가리고 앉은 바위)이라고 했다. 예전에 양녕대군이 왕위를 피해 관악산에 와서 거주할 때, 가끔 이곳에 올라와 궁궐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뜨거워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작은 장막을 치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바위 모퉁이에 오목한 구멍을 4개 파서 장막의 기둥을 고정시켰는데, 그 구멍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대 이름을 연주대(戀主臺: 군주를 연모하며 바라보는 대)라 하고 바위를 차일암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이다.

 

관악산 정상.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비스듬하고 널찍한 암반 위에 자연석 정상석이 놓여있다.
관악산 정상.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비스듬하고 널찍한 암반 위에 자연석 정상석이 놓여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에 대한 역사적 논란은 있으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인 세종대왕이 있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양녕대군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양녕대군이 세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한거할 때, 이 관악산 정상 연주대에 차일막을 치고 북쪽을 연모하며 바라보았던 것이, 군주 자리에 대한 미련보다는 아우인 세종대왕에 대한 순수한 우애와 국가에 대한 충정심의 발로였음을 번암은 믿고 싶었으리라 추측한다.

 

연주대는 구름 속까지 우뚝 솟아있는데, 지금의 나 자신을 보니, 천하 만물 중에서 감히 높이를 함께 다툴 만한 것이 없었다. 사방의 봉우리들은 자그마해서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오직 서쪽에 기운이 쌓여 흐릿한데, 마치 하늘과 바다가 이어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면 모두 바다 같을 것이고, 바다에서 보면 하늘처럼 보일 것이니, 하늘과 바다를 또한 누가 분간할 수 있겠는가? 한양의 도성이 마치 밥상이 놓인 것처럼 바라보였다. 그중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싼 곳이 경복궁 옛터임을 알 수 있었다. 양녕대군이 배회하며 군주를 그리워함을 비록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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